145화 고귀한 사파의 영웅 (1)
“선공이라니요?”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은 작전이었다.
선공은 전력이 우세한 쪽이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놈들이 더 집결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소수정예로 공격하자는 말이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속내는 따로 있었다.
호현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곳곳이 초토화가 될 터.
결국엔 패도문에서 돌봐주는 아이들까지 휘말릴 게 불 보듯 뻔했다.
비록 강인한 아이들이었지만, 손녀와 달리 스스로를 지키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선공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사파의 원로들은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소수정예라니요. 설마 우리만으로 공격하자는 말입니까?”
“양괴 대협께서 정파 놈들을 너무 얕보신 것 아니오? 창룡대인지 뭔지 하는 쥐새끼들까지 모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호현의 전력을 깡그리 모아도 될까 말까인데, 우리만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는 흑묘파와 패도문의 문주뿐.
나머지는 모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물론 유진산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반발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꺼내었다.
“정면대결을 하자는 것이 아니오. 꼭 우리가 정직하게 싸울 필요는 없지 않소?”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수단을 타협하는 사파였다.
사도련의 부련주인 맹지호가 가장 먼저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어떤 계획을 품고 계시는지.”
“놈들은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할 것이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부분을 이용할 수가 있소.”
이후 유진산의 설명은 반각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 자리에 있는 열 명의 고수만으로 그들을 습격하는 작전에 대해서.
그가 말을 마치자 맹지호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하겠소? 설령 계획대로 된들 압도적으로 열세인 우리가 마무리나 할 수 있을지…….”
“부련주께서는 왜 우리가 열세라 생각하시오? 지금 내 등 뒤에 음괴가 서 있는데.”
자신이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유설이 한 손으로 할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며 씩 웃었다. 마치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그때 지켜보던 백규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이 중에서 우리 음괴 님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신 분이 있습니까?”
“…….”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전설적인 무용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는지, 어느 경지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백규가 음양쌍괴의 정보에 대해서는 사도련 내에서도 말을 아껴왔기 때문이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상상하시던 그 이상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문 앞에서 춤추고 있는 노승도 우리 중 누구보다 강할 겁니다.”
흑묘파의 문주가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수의 예리한 감각과 눈썰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일까? 더는 의심을 가지는 자가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유진산이 못을 박았다.
“무슨 일이든 신뢰가 가장 중요한 법이오.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 함께할 수가 있겠소.”
동의하지 않겠다면 이 일에서 빠지겠다는 뜻이었다.
음양쌍괴의 이탈. 아쉬운 것은 이곳에 모인 사파의 원로고수들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증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상황이 이쯤 되자 그들은 다급해졌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오.”
“맞소. 우리가 함께라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무서울 것이 없소.”
“음양쌍괴 대협들만 믿고 내 목을 걸어보겠소.”
유진산은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정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때문이었다.
사파의 고수들은 호전적이고 자유분방하지만, 감정에 솔직하다. 유진산도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믿어주시니 모두 고맙소. 그럼 지금부터 세부적인 계획을 논의해봅시다.”
* * *
섬서성 서북단에 자리한 회운산(會雲山).
우거진 산세의 봉우리에서 일단의 무리가 맞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금양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었다.
수백 장이나 떨어져 있었으나, 어느 정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한 명 한 명이 초인적인 시야를 가진 무림고수들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숫자는 많지 않은 것 같소.”
“그래도 우리보다 다섯 배는 많아 보이는구려. 일단 문주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도합 열 명의 고수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무림 제일의 살수로 이름난 흑묘파의 문주였다.
그림자 같은 움직임. 경공을 펼침에도 조금의 소음조차 없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다.
“정찰은 어찌 되었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소. 권황뿐 아니라 곤륜무제까지 와있었소.”
음양쌍괴를 제외한 모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곤륜무제가 누구인가.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으로서 엄청난 거물이었다.
권황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그자까지 왔다니.
사파의 고수들이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히히. 청진은 오늘 죽을 거다!”
곤륜무제의 이름을 경망스럽게 외친 인물은 파계승 정혜였다. 죽립을 눌러쓴 그는 무엇이 신나는지 두 다리를 흔들거리며 춤을 췄다.
사도련의 부련주인 맹지호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곤륜무제를 상대할 수 있소?”
“나는 꼬맹이랑 안 싸운다!”
정혜는 전대에 활동하던 인물이기에 배분을 따지면 청진보다 높았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보니 과거에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찌하여 곤륜무제가 죽는다고 말한 것이오?”
정혜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놈은 오늘 설이한테 맞아 죽을 거야.”
“설이? 설이가 누구의 이름이오?”
그때 십여 장이 떨어진 뒤쪽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예요.”
음괴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곤륜무제가 저곳에 있다는데도 조금의 긴장도 없는 모습이라니. 의아한 것이 당연했다.
“음괴 대협께서 곤륜무제를 상대할 수 있겠소?”
유설의 검지가 꼬물꼬물 금양사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할아버지요?”
“이 먼 거리에서 곤륜무제의 얼굴이 보인단 말이오?”
유설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이겨요.”
이곳에서 오직 유진산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곤륜무제가 손녀의 손에서 죽다 살아난 것을.
“그럼 곤륜무제는 음괴 대협이, 그리고 권황은 스님께서 맡아주시면 되겠소. 다른 놈들은 또 누가 있었소?”
정혜는 불가에서 파계를 당한 승려였기에, 이제는 스님이라 불릴 수도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달리 부를 호칭도 없었으니까.
흑묘파의 백상이 이어서 말했다.
“하나같이 한가락씩 하는 녀석들뿐이오. 저들 중 가장 약한 녀석도 절정의 무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복면을 뒤집어쓴 다섯 놈은 창룡대인 것 같고.”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어찌하시겠소?”
모두의 시선이 양괴를 향해 모였다.
계획한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것인지 묻는 것이리라.
고민하던 그가 손녀에게 신호를 보내어 가까이 오라고 했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유설은 곧이어 할아버지의 전음을 들었다.
- 아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응, 뭐가?
- 위험할 것 같은지 물어보는 게다.
- 내가? 왜?
비록 막강한 전력이 모여 있었지만, 손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도는 아닌 듯했다.
유진산의 판단도 그러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는 손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나직이 말했다.
- 지금부터 할아버지 말 잘 듣거라. 절대 무리하지 말고, 깊게 들어가면 안 돼. 입구까지만 갔다가 유인해 오는 거다. 알았지?
- 으응.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즉시 돌아오너라. 여차하면 할아버지가 바로 도우러 가마.
상상해보던 유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큭’ 하고 웃었다.
유진산도 그런 손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방금 말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웃겼으니까.
“자, 그럼 시작합시다.”
양괴가 동의하자 모두가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흑묘파의 문주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며, 다른 사파의 고수들도 근처에서 은신했다.
남은 자는 정혜와 유설 둘뿐이었다.
“간다! 우리 둘이 간다!”
둘은 적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이 난 모습이었다.
임무는 간단했다. 금양사의 입구에서 적당히 쑤석거린 후 일부를 이끌고 지정된 장소까지 유인해오는 것이다.
이 둘이 작전의 선봉으로 차출된 이유는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더라도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란히 허공을 질주하며 금양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나 손잡아줘요.”
“싫다! 설이 손 안 잡을 거다.”
“왜요?”
“나는 다 알고 있어. 내 손 잡고 꺾으려는 거잖아.”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안 걸린다고 했어요.”
잠시 고민하던 정혜는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꺾으면 안 돼~”
“알았어요. 근데 지금부터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정혜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유설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양사에 거의 도착했기 때문이다.
경공을 멈춘 유설과 정혜는 차분한 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반박귀진(返璞歸眞). 무공을 익혔음에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지고한 경지로 둘 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둘의 모습은 무림인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정혜는 변장까지 시켜놓았다. 눈까지 눌러쓴 죽립과 덥수룩한 수염. 설사 그를 아는 자가 있더라도 쉽게는 알아볼 수가 없을 터였다.
입구에 도착하자 도사 한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복장을 보니 화산파의 매화검수였다.
“이곳까지는 어떻게 들어왔소?”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회운산의 입구는 통제되고 있었으니까.
정혜는 입을 꾹 닫고 있었으며, 대답은 유설이 주도했다.
“우리는 이 근처에 살아요.”
이따금 세속에서 벗어나 사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비록 보안 차원에서 산의 입구는 막았지만, 이미 안에 거주하던 자들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사는 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연인치고는 아이의 모습이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특이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긴 뭐하러 왔소?”
정혜에게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유설이 대신했다.
“불공을 드리러 왔어요.”
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정혜를 바라보았다.
“근데 할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없습니까?”
“…….”
죽립 아래로 드러난 정혜의 입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유설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우리 할아버지는 말을 못 해요.”
“음. 어쨌거나 이만 돌아가거라. 당분간 이곳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으니까.”
“꼭 들어가야 해요. 부처님께 기도드려야 목이 나을 수 있대요.”
매화검수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무튼, 못 들어가니까 어서 돌아가!”
유설은 힘싸움이든 말싸움이든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상대가 먼저 언성을 높인 이상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왜요? 이 절이 아저씨 거예요? 우리가 들어간다는데, 왜 막아요?”
소란스러움은 점차 거세졌다.
그에 따라 사찰의 주변을 배회하던 몇몇 고수들이 입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명색이 화산의 정예이거늘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아이에게 쩔쩔매고 있다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매화검수가 정색한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미치겠네.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니 당장 돌아가거라.”
그 순간 연기를 이어가던 유설의 미간이 가운데로 좁혀졌다. 갑자기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한 것일까? 눈빛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이글거렸다.
“그럼 우리 할아버지가 앞으로 말을 못 해도 괜찮아요!? 책임질 거예요?”
매화검수의 얼굴에 황당함과 분노가 동시에 서렸다.
“내가 왜 책임져? 쪼그만 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할아버지랑 같이 험한 꼴 당하고 싶어?”
“뭐라구요!? 지금 험한 꼴이라고 했어요? 아저씨도 한번 당해볼래요?”
그 순간 참을성이 폭발한 매화검수가 아이를 향해 손가락을 내뻗었다. 혈도를 눌러 입을 닫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