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한 대만 때려봐 (1)
“오래전 어르신의 도움으로 천룡상회를 털었던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어찌 그 사건을 잊겠는가. 내 나이가 많아도 아직 치매는 없어.”
유진산의 농담에 은화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그때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얻었던 자금 중 일부를 백양현에 돌려주기로 말이지요.”
과거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그곳의 주민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유진산은 자신의 몫 중 대부분을 그들에게 나눠주라 했다. 당시의 사건이 모두의 기억에서 잊힐 때쯤 말이다.
다만 구두로 한 약속이었기에 지켜지리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었으니까.
“그것참 놀랍군. 정말 방주가 그리하라고 지시했단 말인가?”
“예. 이미 은자 팔백 냥에 달하는 물자를 주민들에게 나눠줬으며, 한 차례 더 지원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아시다시피 정보상의 신뢰는 천금보다 무거워야 합니다. 게다가 최근 여러 사업이 성과를 보고 있어서 부담되는 정도도 아니고요.”
흑야방은 정보를 사고파는 집단이었으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표국과 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상권을 중원 각지로 무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은화린처럼 뛰어난 인재들의 영입에 성공했기 때문이리라.
결정적으로는 사람을 알아보고 품을 줄 아는 풍호의 인품 덕이었다.
“흑야방이 잘 성장하고 있다니 내 일처럼 기쁘군. 다른 어려운 부분은 없었는가?”
“지금은 모든 것이 다 괜찮습니다. 사도련에서 저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으니까요. 모두 음양쌍괴 대협들 덕분입니다.”
사도련주 영영과 맺었던 약조가 효과를 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요구했던 음양쌍괴와 사도련의 불가침 협정. 그 조건은 그들이 흑야방을 괴롭히지 않고, 뒤를 봐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사도련 또한 정보를 얻고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나? 신경 쓸 것 없네. 그저 작은 선물이라 생각해 두시게.”
“어쨌거나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음괴 님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지금은 폐관 수련 중이네. 헌데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김에 두 분께 전해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은화린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음괴에 대한 정체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개봉성의 총타 녀석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던 영향이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남부지사의 지부장한테까지 얘기하지 않았다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내가 위니까, 나한테만 전달하면 돼.”
“아아…….”
은화린은 수긍하면서도 찜찜하다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산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무슨 아? 명색이 지부장이면서 그런 것도 파악 못 했는가? 음괴는 내 손녀야.”
“예에?”
“자세한 건 총타에 가서 물어보시게.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
은화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문을 잃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양괴가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얘기하지 않았다니.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총타에 가게 되면 반드시 따져야겠군요.”
“그런데 자네가 예까진 무슨 일로 오셨는가. 따로 목적이 있을 텐데?”
“네, 실은 이곳이 위험에 노출된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위험이라니?”
“저희의 감시망에 있던 무림맹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행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섬서에서 발견이 되었고요. 개중에는 권황의 모습도 포착되었습니다.”
권황(拳皇) 마광철. 이름만으로도 사파의 무사들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였다.
오로지 두 주먹으로만 싸우며,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절대고수까지 등장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귀의 말에 따르면 섬서에서 활동하는 창룡대원들까지 소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음. 놈들이 섬서로 모여들고 있다면, 당연히 호현을 노리는 거겠지.”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탈출시킨 아이들이 이곳에 있지 않은가. 이 사실을 창룡대에서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되찾아서 창룡대원으로 키우려고 할 터.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상황이었으며, 유진산도 예견했던 일이었다. 이곳으로 파계승을 데려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계속 추적하고 있으니 확인되는 내용이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흑야방의 비밀분타가 있으니까요.”
“비밀분타까지 만들었다니, 들을수록 놀랍군. 그나저나 백규 아우도 이 내용을 알고 있는가?”
“아직은 모르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 뵙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고맙네. 그리해주시게.”
“별말씀을요.”
* * *
유진산은 은화린이 돌아간 직후에도 오직 무공 수련에만 전념했다.
그렇기에 호현의 방어 준비는 모두 백규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
이곳을 신경 쓰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
그때까지는 금강불괴신공의 화후를 최대한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을 그때.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화아악-!
갑자기 유진산의 신형에서 밝은 휘광이 번뜩였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곧이어 감긴 그의 두 눈이 서서히 떠졌다.
지진을 일으키는 동공에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유진산은 머리 위로 양손을 치켜세우며 좋아했다.
드디어 금강불괴신공이 칠성(七成)의 화후에 도달한 것이다.
육성을 달성한 이후 무려 보름 만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고작 한 단계를 올린 것이거늘, 인고의 시간 동안 인내를 견뎌낸 느낌이었다.
바위처럼 단단해진 피부와 강철 같은 근육. 그리고 몸속의 장기는 호신강기를 두른 기분이었다.
강인해진 자신의 신체는 검기(劍氣)에도 버텨낼 것만 같았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체면상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허헛. 모처럼 바람이나 쐐야겠구나.”
문을 열고 나오니 문 앞에 종이에 둘둘 말린 무엇인가가 있었다. 냄새로 보아 문도들이 만두를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아직 미세한 온기가 남은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옆구리에 챙긴 유진산은 다짜고짜 어딘가로 달렸다.
패도문의 장원을 벗어나기 직전 자신을 알아본 아이가 소리쳐 외쳤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자신이 청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이였다.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기도 했다.
유진산은 등 뒤로 손을 올려 보이며 계속해서 달렸다.
“어어, 그래!”
모처럼 그의 음성이 해맑았다.
가벼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손녀가 있을 뒷산이었다.
목적지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의 경공이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소음을 죽이지 않으면, 명상에 방해될 터이니.
며칠에 한 번씩 손녀가 잘 있는지 보러 갈 때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이틀 전의 위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자세 또한 동일했다. 그동안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가, 할아버지가 만두 가져왔다.’
근처에는 며칠 전에 가져다 놓은 주전부리들이 그대로 있었다.
먹든 안 먹든 배가 고프면 언제든 먹을 수 있게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마음 같아선 먹고 하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거늘. 게다가 중간에 멈추면 수련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
만두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숨도 쉬지 않고 등을 돌렸다.
다람쥐의 기척도 이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까치처럼 발끝을 세워 몇 걸음을 움직였을 때였다.
“할배, 어디 가?”
귀에 익숙한 아이의 청량한 음성.
자신 때문에 손녀가 명상에서 깨어난 것일까? 유진산은 미안했는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런! 할아버지가 방해를 했나 보구나.”
“아니야, 지금 막 끝났어. 그런데 벌써 밥 먹을 시간이야? 나 아직 배 안 고픈데.”
“벌써라니? 그렇게 열흘 동안 앉아있었다.”
“으응? 두 시진도 안 지난줄 알았는데?”
자신을 잊고 우주(宇宙) 속에서 무아지경으로 헤맨 모양이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경험해 보질 못했기에 이해할 수가 없을 뿐.
“꼼짝도 안 하길래 죽은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게다. 성과는 좀 있었어?”
“아니, 나 답답해 죽겠어. 분명 뭔가 느껴지는데, 잡으려고 하면 안 잡히는 거야.”
“잡히다니? 뭐가?”
“으음……. 어쩌면 바람도 잡고 물도 잡고. 자연의 모든 것을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을 잡는다니? 그게 웬 뜬구름 잡는 소리냐.”
유설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어찌 말로써 설명해준다는 말인가.
“근데 할배. 혹시 나 빼고 뭐 좋은 거 먹었어?”
“좋은 거라니? 설마 할아버지가 혼자서 몰래 영약이라도 먹었을까 봐?”
유설의 시선이 할아버지를 위아래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상해. 분명히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자신의 강해짐이 손녀에게도 느껴진 것일까? 유진산의 얼굴에 수줍음의 미소가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달라진 거 같아?”
“음. 좀 단단해진 느낌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유설이 단단하다고 말할 정도면, 확실히 금강불괴신공을 수련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몹시 기뻤지만 주책맞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유진산은 짐짓 헛기침을 하고는 뒷짐을 졌다.
“정확히 보았구나. 잠시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아가.”
손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며 다가왔다.
“……왜?”
“할아버지도 새로운 무공을 익혔거든. 어서 내 배를 한 대 때려봐.”
“싫어. 내가 할배를 어떻게 때려.”
유진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하는 게 아니야. 무공의 위력을 한번 시험해보려는 거니까 어서 쳐봐.”
“얼마나 세게?”
지금의 신체라면 무엇이든 다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유진산은 대답하는 와중에도 고민을 거듭했다.
“절반…… 아, 아니 삼 할(三割)의 힘만 써서 쳐봐.”
“삼 할? 안 돼, 그럼 할배 죽어.”
비록 화경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환골탈태를 경험하고 금강불괴신공을 칠성까지 익힌 상태였다.
그런 자신이 고작 삼 할의 힘에 죽는다니? 그것도 한 방에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껏 업어 키운 손녀한테 이렇게 무시를 받다니. 아이고, 노년에 이렇게 서러울 수가…….”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어쩌겠는가.
고민 끝에 유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손녀가 주먹을 어깨 뒤로 잡아당기는 그때였다.
그 순간 유진산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동안은 항상 같은 편으로 있었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뿐. 막상 마주 서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가 심장을 옥죄여오기 시작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위압. 그것은 마치 사람이 아닌 산(山)과 싸운다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 넘쳐났던 자신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어졌다.
“잠, 잠깐.”
“왜에?”
유진산은 손녀가 출수하기 전에 다급히 말했다.
“우, 우선 이 할(二割)의 위력으로 먼저 시험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