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눈은 손보다 빠르다 (3)
어두운 밤의 으슥한 골목길.
이곳으로 끌려온 도귀는 이미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음양쌍괴의 협공에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끄으……. 질문만 한다고 하지 않았소.”
“너도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것이 내기의 대가였고, 그를 살려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물어보는 질문마다 모른다는 답변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조금도 없었다.
“정말로 아는 것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오? 나 같은 말단대원은 오직 지령만 받고 움직일 뿐이오.”
“그래서 네가 받은 지령이 뭐야?”
도귀가 품속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직접 확인해 보시오.”
이렇다 할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정체를 숨기고 자금을 모으라는 것뿐. 그리고 하단에는 창룡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저 자금책 중 한 명이었던가?’
중원 각지에 퍼져 있는 창룡대원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족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이 원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신상정보였다. 최소한 핵심인물들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비밀스러운 무력단체를 빠르게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까.
“이 지령은 어디서 받았어?”
“정해진 것이 없소. 언제나 처음 보는 자가 접근해와서 전해주고 갔으니까.”
눈빛을 보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에게는 더 알아낼 정보가 없을 터.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으니, 내가 너를 살려줄 이유 또한 없구나.”
유진산에게서 살기를 느낀 도귀가 다급히 한 손을 올렸다.
“잠, 잠깐 기다리시오. 한 가지가 있소.”
“……?”
“나에게 지령을 전해준 자가 말했소. 조만간 소집 명령이 있을 테니, 구역을 이탈하지 말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지난번에도 이러한 명령을 받은 후 대원 셋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소.”
“그래서?”
“당시 우리는 종남파를 도와 섬서의 극진문을 공격하였소.”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로 유진산도 기억하는 사건이었다.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창룡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계기였거늘.
사파 세력 중 위세가 높았던 극진문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었다.
당시 종남파를 도왔다던 세 명의 복면인들.
그들의 정체가 창룡대원이라는 것은 이미 과거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네 녀석이었군. 이번엔 무슨 꿍꿍이지?”
“내가 그것을 알 리가 없지 않소.”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번 물어봤던 것일 뿐.
또 다른 사파의 세력을 공격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접선책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도귀의 처분을 고민하다가 등 뒤로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멀찍이서 짝손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손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에?”
“이놈에게 금자 몇 냥만 꺼내줘.”
유설이 어깨에 메고 있던 보따리에서 손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빼내었다.
“세 개.”
얼떨결에 금자 세 냥을 받아든 도귀는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이걸 왜 제게…….”
대답은 유진산이 대신했다.
“노부가 얘기했듯이 목숨은 살려주마. 그 정도면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은 없을 테니, 단전을 폐하고 강호를 떠나거라.”
지금껏 마주쳤던 창룡대원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상대적으로는 말이다.
게다가 약속대로 아는 것을 모두 실토한 그의 자세는 높이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 적으로 다시 만날 테니.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것은 강호에서 중요한 생존법칙이었다.
“…….”
도귀는 잠시 머뭇거렸다.
단전을 폐한다면 내공을 모두 잃어 일반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간 죽을 고생을 해서 이룩한 무공을 포기하는 게 어찌 쉽겠는가.
‘빌어먹을……. 음괴만 같이 없었어도.’
양괴뿐이라면 한번 붙어보거나 도망쳤을 테지만, 음괴가 함께 있는 이상 어림도 없었다.
도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무공에 더해 목숨까지 잃을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금자 세 냥이면 여생도 어느 정도는 즐기면서 보낼 수 있을 터.
이를 악다문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배꼽 아래를 강타했다.
푸욱-!!
“크윽!”
도귀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단전의 내공이 흩어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신체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한순간에 얼굴이 십 년은 더 늙어진 듯했다.
“잘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지.”
“……이대로 떠나도 되오?”
“그럼 여기서 우리랑 계속 있을래? 어디 한적한 지방에서 하던 거나 마저 즐기면서 지내거라.”
허락을 받은 도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어깨가 축 처진 그의 뒷모습이 측은해 보였기 때문일까? 손녀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느냐.”
“……불쌍해. 우리한테 돈도 다 뺏기고, 무공도 잃었잖아.”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아까 네가 마구 때리지 않았느냐.”
“나는 그냥 할배를 도와준 거야.”
어찌 손녀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유진산의 얼굴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저 녀석에겐 더 잘된 일이다. 우리와 다른 식으로 만났으면 목숨을 잃었을 테니…….”
음양쌍괴와 만나고도 목숨을 건진 최초의 창룡대원이었다.
다른 놈들과 달리 협조하려는 노력이 보였기에 예외를 두었을 뿐, 전장에서 만났으면 어찌 살려뒀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짝손에 대한 보상이었다.
유진산이 손짓을 보내자 그가 양손을 모으고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까는 나랑 제법 호흡이 잘 맞더구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도 알아. 이건 네 몫이니 받아가. 약속한 대로 딴 돈의 일 할이다.”
그에게 나눠준 것은 금자 열 냥이었다. 혼자서는 죽을 때까지 펑펑 쓰더라도 못 쓸 거금이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그냥 정당한 보수야. 그리고 말이다.”
“……예?”
“나이도 적지 않아 보이는데 이제는 좀 베풀면서 살아. 돈도 좋지만,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도 아니잖느냐.”
“꼭 명심하겠습니다.”
유진산은 볼일을 마쳤다는 듯 짝손에게 가보라고 손짓을 보냈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도귀와는 전혀 상반되어 있었다.
어깨를 덩실덩실하며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한몫 단단히 챙겼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흐뭇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손녀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할배. 근데 우리 이 돈으로 이제 뭐 할까?”
백규가 문파의 여유자금을 탈탈 털어줬던 자금이 일곱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뛰어난 인재들이 유입된 패도문에 자금력이 더해진다면 성장에 날개를 달게 될 터. 그들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오직 선심만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진산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나름대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손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설이는 뭘 하고 싶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해보거라. 할아버지가 다 들어주마.”
“으음~ 애들한테 맛있는 거 사다 줄까?”
아미산에서 탈출해 온 또래의 아이들을 말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손녀가 한 명 한 명 이름까지도 지어주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을 챙기려는 손녀의 따듯한 마음이 무척이나 기특했다.
은자 한두 냥이면 패도문의 모든 식구에게 먹일 간식을 사고도 남을 터였다.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잘 생각했다. 많이 사야 할 테니, 호현의 시장에서 주문하고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히히. 빨리 가자, 할배.”
* * *
패도문 내 문주의 집무실.
유설이 홀로 찾아와 어깨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탁상에 ‘툭’ 올려놓았다.
“이거 삼촌 가져다주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수북이 쌓인 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그뿐인가. 듬성듬성 뒤섞인 금자도 수십 냥이나 되어 보였다.
백규는 체면도 잊은 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설, 설아 이게 다 뭐야?”
“우리 할배가 다 땄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가 기억하는 유진산은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귀의 자금을 전부 땄다니?
백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다.
차라리 도귀를 상대로 강도짓을 했다는 게 현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가능성이 없었다. 자신이 아는 유진산은 명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성품이 아니었으니까.
“…….”
넋 놓고 돈 보따리를 응시하던 백규가 손으로 쓱 훑어보았다.
당분간은 문파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엄청난 자금이었다.
문주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식구가 많아져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도련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려던 찰나에 고민거리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웬 횡재란 말이냐. 이거 형님한테 또 한 번 큰 은혜를 입었구나.”
“좋아, 삼촌?”
백규가 큼지막한 양손으로 유설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빙빙 돌려댔다.
“당연히 좋지, 요 녀석아. 아마도 설이 네가 형님을 도왔겠지? 수고했어!”
“히히.”
칭찬을 받은 유설도 기분이 좋은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나저나 형님은 어디 갔어?”
“빡빡이 할아버지한테 붙잡혀갔어.”
패도문의 어른 중 대머리가 아닌 자는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조카가 이렇게 호칭하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백규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저런……. 아무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조금 미뤄야겠구나.”
* * *
“어, 어서 날 내려놓거라!”
유진산은 누군가의 어깨에 매달린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파계승 정혜였다.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든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믿었던 손녀마저도 바로 도망쳤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혀엉~ 오늘은 나랑 놀아줄 거지?”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정혜가 나쁜 의도로 이러는 것이 아님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일 뿐,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귀찮고 성가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나이가 아니다. 우리 손녀한테 가서 놀자고 해.”
“설이 너무 무섭다! 나 때리면 어떻게 해? 형이랑 놀래~”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내가 너랑 뭘 하고 논다는 말이냐.”
“걱정하지 마.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게!”
“내가 걱정을 왜…….”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혜가 잡아서 던진 것이다.
마치 구름을 꿰뚫을 듯 끝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아악! 지금 뭘 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무공을 익힌 자신이 낙사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의 높이라면 다칠 수도 있었다.
까마득한 지상에는 정혜가 양손을 휘젓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유진산은 기로 전신을 보호하며 충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
유진산의 신형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정확히는 정혜의 머리 위로 반장 높이였다.
그는 계속해서 양손을 휘저으며 허공에 자신을 묶어놓고 있었다.
“형, 지금부터 우리 똑같이 걷는 거야!”
허공에서 걸으라니? 미친 소리 같았지만, 유진산은 한 번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 해보았다. 거절했다간 정신줄을 놓은 파계승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그렇게 허공에서 부유 중인 유진산은 아래에 있는 정혜의 동작을 따라 발을 옮겼다. 물살을 밀고 나아가듯 느릿하면서도 기이한 걸음걸이.
그렇게 몇 번인가를 움직였을 때 유진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설마 이 신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