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좋은 형이었어 (1)
천운필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둔황의 존엄이자 도호부의 제일 고수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두 명을 더 추가해 싸우겠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당연했다. 상대가 반로환동한 무림고수일지라도.
도호를 대신해 장수 중 한 명이 격분하며 소리쳤다.
“네 이년! 누구 앞이라고 감……. 헉!”
그는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유설의 기세가 돌변했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갑자기 얼어붙은 공기는 숨을 내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빛. 그 속에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인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가장 놀란 인물은 도호 천운필인 듯했다. 패기가 넘쳤던 그의 표정이 사레 걸린 똥강아지의 얼굴이 되어있었으니까.
그때 뒤쪽에서 유진산이 두 명을 호명했다.
“진용교위 명학승! 부장 만사종! 끌어내기 전에 어서 나와 죗값을 받거라!”
노예상의 뒤를 봐준다고 했던 무관들이었다.
그들도 자신이 지목당할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장수 두 명이 순순히 걸어 나와 도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비록 삼대 일의 결투였지만,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리라.
“나 출수해도 돼?”
유설이 안달 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허락하마. 어서 끝내고 꼬치 먹으러 가야지.”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세 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방어태세를 준비했다. 품(品)자 형태를 갖춘 것을 보니 진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검 끝이 가리키는 방위를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창룡대의 진법임을.
‘용행삼격진(龍行三擊陣)이군.’
유진산도 알고 있는 진법이었다. 지옥 같은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웠으니까.
세 명의 고수가 하나가 되어 더욱 강한 한 명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진법이다.
수법이 교활하고 위력적이기에 상대하기가 까다롭지만, 어디까지나 유진산의 입장에서였다.
음괴의 기준에서 그런 것 따위는 장난에 불과할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유설의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양꼬치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타앗-!
준비 동작도 없이 유설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섬전처럼 나아가는 한줄기 빛살. 육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유설은 용행삼격진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헉!’
‘……이럴 수가.’
화들짝 놀란 세 명의 무관은 다급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들을 향해 다가가는 용화창은 어찌나 빠른지 부러질 것처럼 휘어있었다. 한 번에 후려칠 심산이리라.
쩌엉-!!!
둔탁한 폭음과 함께 세 명의 신형이 동시에 튕겨 나갔다.
“큭!”
“커헉!”
“으윽…….”
명학승과 만사종은 무려 오 장을 튕겨 날아가 볼품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필이면 그 위치가 유진산의 코앞이었다.
그리고 도호 천운필은 두 발로 지면을 끌며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주르르륵-!
용케도 버텨낸 천운필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결코 밝지 못했다. 이 순간에도 정체불명의 여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무지막지한 괴력. 그것은 마치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 같은 느낌이었다.
일평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무기력함. 하지만 쉽게 포기할 만큼 천운필은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검 끝이 쉴 새 없이 번뜩이며 강기를 파도처럼 쏟아냈다.
파파파팟-!
과연 도호부의 수장이라 할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지켜보는 유진산도 감탄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유설의 창끝이 단번에 갈라버렸으니까.
써컥-!!
갑주가 사선으로 쪼개지는 소리였다. 자칫 조금만 더 깊었으면 상체가 양단되었으리라.
간담이 서늘해진 천운필은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드러난 상체에 승천하는 용문신이 노출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밀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떠오르는 단어는 단 한 가지였다.
절대고수의 경계라 불리는 화경(化境)보다도 더 높은 존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경지인 현경(玄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확신했다.
유설의 전신을 감싼 눈부신 황금빛 휘광.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두광(頭光)을 말이다.
‘……이럴 수가.’
이를 악다문 천운필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초식을 준비했다.
검 날을 타고 오르는 맹렬한 빛무리.
곧이어 전면으로 쏘아져 나가는 초승달 모양의 강기는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했다.
쏴아아앙-!
매서운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유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용화창을 내지르고 있을 뿐.
유가살풍창 칠 초식 일광극섬(一光極閃)의 초식이었다.
한줄기 섬광이 초승달의 중심을 향해 빛의 속도로 다가갔다.
콰앙-!!!
두 쪽으로 갈라진 초승달을 비집고 창끝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대로라면 가슴이 꿰뚫릴 터. 미간을 좁힌 천운필은 사력을 다해 보법을 밟았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순간적으로 기를 폭발시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기술이었다.
파앙-!
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계산하지 못할 유설이 아니었다. 무림사에 다시 없을 천부적인 전투 감각을 지닌 아이였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이동하는 경로로 창날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유설이 용화창을 비틀어 쥐었다. 그러자 넓적한 창 면이 태양 빛에 반사되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이어 천운필의 투구를 사정없이 후려쳐버렸다.
투콱-!!
강제로 벗겨진 투구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천운필의 머리는 지면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털썩-!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매타작이었다.
용화창의 창끝이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내며, 그의 전신을 정신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퍼억-! 퍼퍽-!! 퍼퍼퍽-!!
용화창은 끝부분이 날이 없는 창이다. 하여 기를 외부로 발출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베이지 않는다. 대신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외상만 입을 뿐이다.
창끝이 흔들릴 때마다 살랑거리며 피어오르는 꽃잎들.
지켜보던 자들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무렵. 천운필은 이미 곤죽이 되어 있었다.
“……끄으.”
대짜로 뻗은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지 못했다. 숨만 겨우 헐떡거리는 게 전부였다.
또 다른 창룡대원인 명학승과 만사종은 진작에 죽어있었다. 그리고 교위 방충과 그와 함께 잡혀 온 장수까지.
유진산은 애초부터 이들을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기회가 오자마자 넷을 모두 처단한 것이다.
남은 것은 이제 도호 천운필 한 명뿐. 이놈은 죽이기 전에 심문해볼 필요가 있었다.
“수고했다, 아가. 잠깐 물러나 있어.”
고개를 끄덕인 유설은 창끝을 사선으로 늘어트린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걸었다. 아무도 할아버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유설과 거리가 가까워진 병사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히익!”
“헉!”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
상관들이 당했음에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수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음을.
게다가 명분까지도 없었다. 조금 전부터 둔황의 주민들이 주검이 된 관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천운필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 왜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이냐.”
유진산은 손녀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후 주변으로 기막(氣膜)을 펼쳤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저 아이의 부모가 네놈들의 손에 죽었다. 아무런 죄 없는 내 자식들이 한자리에서 모두 난도질을 당했다는 말이다.”
아직 손녀에게는 이 사실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순수함을 남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알게 된다면 마음이 흑화(黑火)하여 폭주할 우려가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천운필은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쪼그만 두 아이가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라니? 더군다나 여자아이가 좀 더 크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는지 그딴 건 관심 없다. 곱게 죽고 싶다면 창룡대와 연관된 놈들을 아는 대로 고하거라.”
“…….”
그는 입을 꾹 닫고 있을 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도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일까? 다른 질문을 몇 가지 더 건네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더는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한 놈씩 찾아내 모조리 목을 비틀어 줄 테니까.”
천운필의 턱과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자 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 잠깐.”
그 순간 유진산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죽여선 안 돼.”
“이유는?”
“나는 이곳에 남아 서역을 감시해야 한다. 이대로 놈들이 쳐들어오면…… 중원은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진산도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소림사의 참회동에서 만난 노승에게서.
아주 오래전 천축이라는 새외무림을 평정했다는 일천교. 그들로부터 중원을 수호하는 것이 창룡대의 목적임을 말이다.
노승의 말이 사실인 듯했지만, 유진산의 입장에서는 둘 다 오십보백보였다.
“일천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인가 보군. 헌데 노부가 왜 그것을 신경 써야 하지?”
천운필은 유진산이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침공을 대비해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오직 창룡대만이 중원을 지킬 수 있어.”
“그래, 아주 준비를 잘해왔더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야. 아이들을 납치하고, 그것을 흑도세력의 짓으로 꾸미기 위해 멀쩡한 자들을 살해했지. 여기서는 더러운 짓으로 자금을 모으고 있었고. 또 뭐가 있지?”
“모두…… 대의를 위한 일이다.”
그 순간 유진산의 두 눈에 서늘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대의라……. 그게 뭐든 어디 한번 계속해 보거라. 우리는 너희 창룡대로부터 중원을 지킬 테니까. 그것이 우리 음양쌍괴의 대의다.”
창룡대를 궤멸시키겠다는 의지표현에 천운필이 절규했다.
“……안, 안 된다.”
“천하의 악인들도 스스로는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는 법이지. 노부는 너희들과 일천교 중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모르겠구나.”
그가 무어라 계속 소리치려 했지만, 더는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양손을 힘껏 비틀어버렸다.
우드득-!
* * *
둔황의 노점 거리.
야외의 작은 탁상에 조손이 마주 앉아 양꼬치를 먹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병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저 지켜만 볼 뿐이었다. 포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끌려간 자들은 만만한 도적들과 노예상인들이 전부였다.
몇 명만 없애버렸을 뿐이거늘 드디어 도호부가 제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비록 병사들이 상관들을 잃었지만, 그 자리는 곧 다른 인재들로 대체될 터. 적어도 이전과 같은 더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많이 먹거라. 먼 길을 가기 전에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워둬야 해.”
이미 유설의 입안에는 고기가 가득했다.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냠. 꼬소하이 마이떠.”
처음 먹어보는 양고기가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물이 담긴 대나무잔을 건네었다.
“자, 물도 마시고. 체하니깐 천천히 먹어.”
“으응.”
물을 꿀꺽꿀꺽 삼키던 유설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쳐다보니 불편해? 다른 데 가서 먹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사라졌어. 빡빡이 할아버지 말이야. 분명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 말하는 거야?”
“보물 찾아다니면서 웃는 할아버지 있잖아.”
그 순간 유진산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손녀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문사자신공을 찾아 숭산을 떠돌던 미친 파계승 정혜.
소림사 출신의 절대고수인 그가 기어코 사막을 넘어 둔황까지 쫓아온 모양이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언제부터 있었어?”
“할배가 안 물어봤잖아. 아까 나 싸울 때부터 쳐다보고 있었어.”
앞뒤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 줄을 놓은 그가 숨어서만 지켜보고 있다니. 아마도 손녀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자는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고수였다. 무림의 십대고수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그런 고수를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든 만나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가만있어 보자.’
유진산은 그를 어떻게 유인하면 좋을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