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악당 대 악당 (3)
“빨리 쓸어버리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붉은 술이 장식된 투구와 은색 갑주.
한눈에 봐도 도호부의 위세 있는 장수인 듯했다.
“하, 하지만…….”
병사들을 통솔하던 장교가 그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비무장인 민간인들을 공격하라니. 게다가 주변에도 행인들이 몰려들어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병사들도 머뭇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난 것일까? 장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장교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철썩-!
“저놈들이 아직도 민간인들로 보이더냐! 누구든 명령을 불복하는 놈은 참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한눈에 봐도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장수였다.
그는 일반 병사들과 달리 이상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박살 난 성문과 점혈이라도 당한 듯 움직임이 없는 수문병들.
게다가 방충 교위까지 초죽음이 된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뺨을 맞은 장교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공격하라.”
상황이 이쯤 되자 병사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무기를 겨눈 병사들이 조금씩 포위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진산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장수의 면목을 살펴보고 있었다. 갑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그려져 있었다.
‘확실하군.’
목까지 타고 올라오는 창룡대의 문신.
아주 일부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유진산이 아니었다.
확인을 마친 그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 준비되었지?
석굴 안에서 자신을 신이라 칭송하며 광적인 믿음을 보내던 상인이었다.
유진산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유난히 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슬쩍 끄덕인 상인이 앞으로 나서며 힘껏 소리쳤다.
“보십시오, 여러분들! 백성들을 지켜야 할 관군이 오히려 도적과 노예상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감히 누가 관군의 면전에서 이런 도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병사들은 수치를 느꼈으며, 지켜보던 자들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장수는 눈이 뒤집힌 채 검을 뽑아 들었다.
“네 이놈!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상인도 유진산의 전음에 따라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성문을 부순 것만으로도 참형임을 어찌 모른단 말이더냐!”
상인은 양손을 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요? 무엇으로 성문을 부숴요? 손으로요?”
“…….”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장수가 대답할 말을 못 찾고 머뭇거리자 지켜보던 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때 유진산과 유설이 쓰러진 방충을 양쪽에서 붙잡고 질질 끌고 왔다.
그러자 상인이 그의 관복을 어깨 아래로 확 젖히며 소리쳤다.
“여러분들, 이 못된 놈과 저 장수도 한패입니다! 저놈의 목을 살펴보면 이자와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네, 네 이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장수는 화를 내며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도 상인은 겁을 먹지 않았다. 유진산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밖에!”
그 말을 끝으로 상인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유진산이 원하는 것은 병사들의 항명이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함이었을 뿐. 죄 없는 병사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창룡대원들만 골라서 족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병사들에게 공포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놈!”
참다못한 장수가 상인을 향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그의 진로는 유진산에 의해 가로막혔다.
작은 손바닥이 그를 향해 마주 다가가자, 장수가 양팔을 교차하여 방어했다.
쩌엉-!!
상대를 뒤로 튕겨내는 유가건곤장의 기술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장수는 황당한 상황에 몹시 분개하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유설이 그의 등 뒤에서 발목을 후려차고 있었으니까.
벼락처럼 빠른 속도는 그가 피해낼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콰당-!
다리가 걸려 넘어진 장수를 향해 유진산이 잽싸게 달려들었다.
이어서 불끈 쥐어진 주먹이 투구 속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위기를 눈치챈 장수는 체면도 잊은 채 있는 힘껏 몸을 옆으로 굴렸다.
콰앙-!!
유진산의 주먹이 모래를 푹 파고들었다. 용케도 피해낸 것이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장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꼬마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니.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무엇보다 여자아이는 위치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생각할 시간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유설이 화살처럼 날아들어 옆차기를 날리고 있었으니까.
쩌억-!!
마치 거대한 망치에 맞은 듯 갑옷이 움푹 찌그러졌다.
“크윽!”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명치에 다시 유진산의 건곤장이 틀어박혔다.
쩌엉-!
“……끄으.”
숨이 턱하고 막혀온 장수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할 음양쌍괴가 아니었다.
전면에서는 양괴의 손바닥이. 그리고 등 뒤에선 음괴의 주먹과 발차기가 연이어 날아들기 시작했다.
투콱-! 콱-!! 콰콰쾅-!!!
장수는 쓰러지지도 못한 채 앞뒤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전신이 곤죽이 될 때까지…….
털썩-!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정도로.
상인들이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입만 뻥긋대고 있었다. 마치 금붕어처럼.
“세, 세상에나.”
“……저, 저런.”
이토록 충격적인 광경을 그 누가 본 적이 있었던가.
병사들은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세가 대단한 장수가 꼬마들에게 무기력하게 제압을 당한 것이다. 정신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때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진 갑주를 유진산이 확 뜯어냈다.
부악-!
어김없이 드러난 용 문신.
문신은 나라에서 금지된 것도 아니니 누구든 그려 넣을 수 있다. 문제는 두 명의 문신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 공범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작은 것조차 명분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 도망쳤던 상인이 다시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보십시오! 이 새끼도 한패입니다!”
“…….”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것이리라.
그때 상인이 포박된 인물 중에서 노예상의 단주를 지목했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너희들의 뒤를 봐주는 자가 또 누가 있느냐!”
단주는 대답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옆에서 무서운 눈짓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진용교위 명학승과 부장 만사종. 그리고 도호 천운필……. 모두 그놈들이 시킨 일입니다. 저희는 정말 억울합니다.”
단주는 자신이 살고자 한술 더 떠서 거짓을 고하고 있었다.
그의 대답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을까? 지켜보던 일반인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유진산의 전음을 받은 상인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자, 그럼 이 쓰레기들을 심판하러 도호부로 쳐들어갑시다!”
민간인들이 관원을 심판하겠다니. 이토록 황당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곳의 책임자인 도호는 품계가 높은 고위관료였다.
그런데도 선두에 있는 음양쌍괴의 걸음은 조금의 거침도 없었다.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뒷걸음질하며 길을 터주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경하기 위해 뒤를 따르는 인파만 점점 늘어나고 있을 뿐.
“할배, 도호부는 어디에 있어?”
“아마도 서역으로 향하는 서문 근처에 있을 게다. 근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을 듯하구나.”
지금쯤이면 그곳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터. 짐작대로라면 알아서 마중을 나올 게 분명했다.
“우리, 끝나고 저거 사 먹을래?”
유진산은 손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매콤한 양념이 가미된 꼬치를 파는 노점이었다.
적에게 포위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먹을거리를 고민하다니. 여유가 넘치는 손녀의 모습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 양꼬치뿐이겠느냐.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설이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봐야지.”
“히히.”
유설은 신이 나는지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양손을 어깨 뒤로 내뻗었다. 봇짐에서 두 자루의 단창을 뽑기 위해서였다.
“창은 왜?”
손녀가 불문사자신공을 터득한 이후로 무기를 사용한 적은 곤륜무제를 상대했을 때뿐이었다. 이곳의 창룡대원들이 그자보다 강할 리는 없을 터.
상대와 마주치기도 전에 전의를 불태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배고프니깐 빨리 끝내야겠어.”
어서 빨리 양꼬치를 먹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용살창을 받아든 유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
유진산과 손녀의 뒤를 따르는 인파는 어느새 천 명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절반은 관군이었으며, 나머지는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민간인들이었다.
잠시 후 예상대로 맞은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춘 유진산은 등 뒤로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함께 온 자들이 두 명의 관원을 앞에다가 꿇어 앉혔다.
처참한 몰골로 상의가 벗겨진 그들은 교위 방충과 동쪽 수비군의 장수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체를 숨기고 있던 창룡대원들이었다.
“……큭큭.”
방충의 웃음소리였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유진산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며 물었다.
“뭐가 웃기지?”
“너희들은 잘 모른다. 도호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를.”
그동안의 경험상 창룡대 내에서도 대원들 간의 실력 차는 매우 큰 편이었다. 강한 놈은 자신도 해내지 못한 화경의 벽을 뚫었을 정도로.
이미 조무래기들보다는 도호가 가장 강하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강하든지 그것은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잘 모르고 있구나. 음괴의 무서움을 말이다.”
이미 유설은 상대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다가오는 무리의 선두는 화려한 은빛 갑주를 걸친 장군이었다. 안서도호부의 수장인 도호 천운필이이라.
그의 좌우로 몇몇 장수들과 병사들이 보였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하나 같이 무공을 수련한 정예가 확실한 듯했다.
잠시 후 그들은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진산이 방충의 목에 용살창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네 이놈! 감히 관원의 목에 무기를 겨누고도 무사할 성싶더냐!”
그야말로 위엄이 넘치는 고함이었다.
만인을 압도할 기세(氣勢). 유진산은 고함만으로 도호의 무공을 어느 정도 직감했다. 결단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지금껏 이러한 느낌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화경을 이룬 절대고수였다.
“자신이 있으면 와서 데려가 봐.”
천운필은 맹수 같은 눈빛으로 유진산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가 결코 일반적인 아이가 아님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무림인이로구나. 관과 무림은 상호 불간섭이 원칙이거늘, 어찌하여 이곳에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우린 무림인들을 잡으러 온 것인데 말이야.”
의미심장한 유진산의 한마디에 천운필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을 직감한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창룡대원 둘이 상의가 벗겨진 채 무릎을 꿇고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
“원하는 게 무엇이지?”
“결투.”
오히려 천운필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다. 지금의 위기를 단번에 타개할 기회였으니.
도호부의 수장답게 그의 기개는 대단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직접 앞으로 나설 정도로.
“수락하지. 누구든 내 앞으로 나오너라. 단, 곱게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검을 뽑아 든 그는 돌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여자아이가 목 뒤에 단창을 걸치고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처럼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마 반로환동에 반박귀진까지 이룬 고수란 말인가?’
애석하게도 변방의 둔황에는 음양쌍괴에 대한 소문이 당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상대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가득할 수밖에.
천운필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유설이 그를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서 내밀어 보였다.
“무슨 뜻이지?”
대답은 유진산이 대신했다.
“뭐긴, 삼대 일로 싸워준다는 얘기지. 우리가 두 명을 더 지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