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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31화 (131/238)

131화 너희 둘뿐이니 (3)

‘아니 세상에, 이런 미친놈들이…….’

지하로 연결된 석굴의 내부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깊숙한 통로를 끼고 좌우로 줄지어 늘어선 감옥들. 일 평도 안 될 좁은 공간에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웅크리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통로의 곳곳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무사들이 보였다.

자신을 데리고 온 자가 그들 중 한 명을 지목하며 물었다.

“단주님은?”

“안에 계십니다. 근데 그 아이는 뭡니까?”

“최고의 상품이 들어왔어. 그분과 거래해도 될 정도로.”

“잘 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이곳에 와계시거든요.”

“그럼 바로 가서 보고해야겠군. 이 녀석 가둬놓고 잘 감시하고 있어.”

자신을 두고 상품이라니.

노예상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게도 그것 외에는 떠오르는 정체가 없었다.

나라에서 노예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거래가 가능한 서역으로 팔아넘기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둔황에 주둔 중인 관군이 있을 텐데?’

목적지인 둔황의 안서도호부. 최소 일만이 넘을 병사들이 근처에 주둔 중인 상황이었다.

아무리 사막이라도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노예 거래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터.

도적놈들의 본거지를 털어 여비를 챙길 생각으로 잠시 들른 것이었지만, 더 큰 뭔가가 뒤에 숨어있는 듯했다.

철컹-!

감옥문 중 하나가 열리는 소리였다.

“들어가!”

유진산은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지금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녹슨 쇠창살 따위 얼마든지 내공으로 박살 낼 수가 있었으니까.

매우 작은 공간이었지만, 체구가 작았기에 앉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가부좌를 튼 그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이놈들 뒤에 또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하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을 테니까.’

노예상인들 따위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테니.

하지만 그 전에 좀 더 상황을 파악해보는 게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삶의 경험으로 유추컨대 노예상들과 안서도호부의 유착이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옆을 돌아보자 누군가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깊은 절망에 빠진 모습이었다.

- 이봐, 젊은이. 벌써 희망을 잃은 건가?

유진산의 전음을 들은 청년이 고개를 올려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옆에는 단지 꼬마 한 명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

또다시 그의 머릿속이 진동하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쩌다가 잡혀 왔어?

무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었다.

일평생 처음으로 듣는 전음은 청년에게 하늘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절망 속에 나타난 한 줄기 빛처럼.

그는 깍지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전율했다.

“……신이시여.”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육성으로 작게 속삭였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으면 아는 대로 말해봐. 이곳에서 너를 도와줄 사람은 노부밖에 없을 테니.”

그는 멍한 얼굴로 유진산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많아 봐야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하지만 두 눈에 흐르는 정기와 연륜이 넘치는 말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아이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임을.

“누, 누구십니까?”

“신이든 뭐든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어차피 얘기해도 믿지 못할 테니.”

“……그, 그럼 정말?”

유진산은 청년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중후하고 따듯한 진기가 전달되자, 그의 심신이 빠른 속도로 안정되어갔다.

“됐고, 일단 몇 가지만 좀 물어보자. 어쩌다가 잡혀 왔어?”

“……저는 장안과 둔황을 오가는 상인입니다. 얼마 전 도적들을 마주쳤는데, 결국 이곳으로 잡혀 왔습니다.”

“그래, 그동안 이곳에서 그놈들에 대해 보고 느낀 것을 말해봐.”

유진산은 그와 일다경에 걸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조각들이 조금씩 맞춰지는 듯했다.

이곳을 지키는 무사들의 수는 이삼십여 명. 그 외에도 많은 동업자가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잡아다가 팔아넘기는 도적 떼. 그리고 그런 노예들을 관리하고 서역으로 빼돌리는 노예상들. 게다가 그들과 유착관계에 있는 도호부까지.

‘그야말로 삼위일체(三位一體)로구나.’

치안을 유지해야 할 관군까지 연관되어 있다니.

지역 전체가 이렇게까지 썩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적 떼와 노예상들을 때려잡는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조직이 무너지면 다시 새로운 놈들이 나타날 테니.

이러한 연결고리의 최상위에는 안서도호부의 관료들로 위장한 창룡대원이 있을 터.

본래의 목적대로 그놈들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도호부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을 데리고 도호부로 가서 결판을 내야겠구나.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돌아가서 손녀를 데리고 와야 했다.

혼자서 일을 벌이고 둔황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잠깐 어디 좀 갔다가 오마.”

“……예?”

“금방 돌아와서 모두 구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당장은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탈출뿐.

이곳의 무사들은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유진산은 그렇게 확신했다. 지금까지는…….

쇠창살을 박살내려던 그때, 먼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직접 보고 판단하지. 자네 말대로라면 큰상이 있을 것이네.”

“예,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조금씩 다가오는 인기척은 분명 세 명이었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두 명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러한 석굴에서조차 기척을 갈무리하고 있을 정도라니.

그렇다면 셋 중 한 명은 만만치 않은 고수일 터.

‘도호부에서 온 녀석인가 보군.’

잠시 후 세 명이 유진산이 갇혀 있는 감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경장 차림의 무사 가운데에 고위 관료의 모습이 보였다.

주작이 수놓아진 푸른 장포. 그리고 절제된 몸짓은 한눈에 보아도 굉장한 고수였다.

그의 모습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얼굴이 굳어졌다.

‘……창룡대?’

관복의 옷깃 안으로 보이는 문신의 일부분.

드러난 부분은 극히 일부였지만, 그 그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유진산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겨우 억눌렀다.

“바로 저놈입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로군. 어서 문을 열어보거라.”

유진산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껏 창룡대원 중에 만만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에도 그의 조력자들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자신이 무공을 숨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한가지 다행이라면 비도문의 문주로 위장했던 놈보다는 약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화경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한 상대일 터.

하지만 무턱대고 싸우는 것도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굳이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철컥-!

문이 열리자마자 관료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유진산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근골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함이리라.

몸을 더듬던 관료는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라고 하지 않았…….”

그는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의 손바닥이 방심하고 있던 그의 앞가슴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유가건곤장 삼 초식 비연탄격(飛演彈擊). 찰나의 순간 손바닥에서 기를 폭발시켜 상대를 멀리 튕겨내는 기술이었다.

쩌엉-!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 관료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신형이 반대편의 벽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콰앙-!!!

벽면이 움푹 파이며 자욱한 먼지가 퍼져나갔다.

“크윽!”

기습은 성공했지만, 유진산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상대에게 생각한 것만큼의 충격을 주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호신강기를 뿜어내다니?’

예상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창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유진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타타탓-!

“너,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등 뒤에서 노예상들의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자세를 가다듬은 창룡대원이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殺氣). 그는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석굴 밖으로 빠져나온 유진산은 손녀가 있는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말을 타고 올 때는 반 시진이 걸렸지만,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다면 일식경도 안 걸릴 거리였다.

“네 이놈!!”

등 뒤에서 고함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잡힌다면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다리가 짧았기 때문일까? 신체적인 불리함 때문인지 간격은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힐 터.

호흡을 가다듬은 유진산은 경공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양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그 모습은 백학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리도 만만해 보이더냐!?”

명색이 무가(武家)의 가주였다.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

그 순간 쫓아오던 창룡대원이 오른손을 사선으로 치켜세웠다.

“이놈!!”

강력한 기(氣)의 흐름. 그리고 붉은 강기에 휩싸인 손아귀를 보니 막상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산도 지지 않고 양손에서 장력을 내뿜어 그와 일장을 교환했다.

콰아아앙-!!!

기의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의 모래가 폭풍을 일으켰다.

그 안에서 둘의 신형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충격의 반발력 때문이었다.

“크윽!”

유진산은 그대로 등을 돌려 계속해서 내달렸다.

양팔에서 전해져오는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부상은 없었지만, 지금도 뻐근함이 계속 느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녀석.’

조금 전의 격돌은 거리를 다시 벌리기 위함이었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상대도 충격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잡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굽히지 않은 듯했다.

“넌 오늘 죽었다.”

“그래? 근데 네놈은 잠시 후면 죽을걸?”

“……?”

거리는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이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먼 곳으로 기다리던 장소가 나타났다.

이국적인 나무들 사이로 드러난 깨끗하고 맑은 사막의 호수.

그 안에서 여자아이 한 명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부러진 통나무 하나를 껴안고 파닥거리는 모습이 아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가, 할아버지 왔다!!”

이미 지켜보고 있던 유설이 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빨리 들어와, 재밌어!”

호숫가를 향해 달리던 유진산이 땅을 박차고 높게 날아올랐다. 그의 뒤를 따르던 창룡대원도 망설임 없이 뒤따라 도약했다.

탓-! 타앗-!

하늘을 꿰뚫을 듯 나란히 치솟은 둘은 곧이어 기이한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호숫가의 주변 구석진 곳. 얼굴이 퉁퉁 불어터진 수십 명이 일렬로 꿇어앉은 모습을 말이다.

그 순간 창룡대원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었다. 비상하던 자신의 신형이 이미 호수로 내려서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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