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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29화 (129/238)

129화 너희 둘뿐이니 (1)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

뜨거운 태양 아래로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두 명의 아이가 낙타 한 마리 위에 올라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미치겠구나.’

고삐를 움켜쥔 손녀의 뒤에서 유진산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낙타의 걸음이 너무나도 느릿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걸어서 가는 게 빠를 정도였다.

“힘내, 초랭아!”

유설이 아무리 소리쳐봐야 요지부동이었다.

굳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인가. 경공으로 달린다면 이틀도 걸리지 않을 것을.

“그러게 할아버지가 튼튼한 녀석으로 고르라고 하지 않았더냐.”

“초랭이가 제일 예뻤단 말이야.”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비실비실한 녀석을 골라 가지고.

“그냥 자유롭게 풀어주자꾸나. 얘도 우리를 태우고 가느라 얼마나 힘들겠어.”

“안 돼! 나랑 약속했잖아.”

낙타를 버리지 않고, 처음 마주치는 상인에게 넘겨주기로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상인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낙타를 헐값에 판다고 했을 때 흔들렸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막을 얕본 내가 죄인이지. 낙타를 사는 데 동의했던 과거의 나를 후려치고 싶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진산도 사막은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밑도 끝도 없이 황량할 줄이야.

둘은 낙타의 등에서 내려와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외형적으로는 비실한 것 외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단지, 축 처진 몰골로 눈만 반쯤 감고 있을 뿐.

낙타는 사람과 신체구조가 다르기에 기(氣) 치료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가 좀 아픈가 본데?”

“……초랭아, 물 마시자. 엄마가 낫게 해줄게.”

초랭의 입을 붙잡은 유설은 양가죽에 담긴 마지막 물을 전부 쏟아 넣었다.

“네가 언제 저렇게 큰 애를 낳았어?”

“내 새끼 맞아!”

유진산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손녀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그래, 그래. 내 증손자가 좀 아픈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안 아플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

이대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지켜보던 유진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안타까워하는 손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

방법은 하나뿐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일단 들어.”

“으응?”

유진산은 이미 낙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놓아주지 못하겠으면, 우리가 들고 뛰면 될 것이 아니냐.”

그 순간 침울했던 유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이어서 군말 없이 낙타의 앞부분을 들었다.

“역시 우리 할배는 천재야.”

“내가 소싯적부터 그런 소리는 많이 듣긴 했지. 자, 이제 출발하자!”

힘찬 외침과는 달리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이곳은 고비사막의 한가운데였으며, 목적지는 아직도 많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과 짐승의 위아래가 바뀌었으니 답답할 수 박에.

‘내 살다 살다 낙타를 업어주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것보단 백배는 나았다.

유진산은 낙타의 낭심부를 머리 위에 올리고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고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와아!”

앞에서 달리던 손녀가 놀라 소리치는 것을 보니 뭔가가 불안해졌다.

“아가. 뭐 때문에 그렇게 놀랐어?”

“저기 봐봐. 되게 신기하네.”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무심코 전면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자리에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 저럴 수가…….”

멀리서부터 거대한 모래 장벽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할배, 저거 뭐야?”

“모래폭풍이로구나. 저 안에 갇히면 고립될 수 있으니, 어서 돌파하자꾸나.”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목숨을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모래의 파도는 무시무시한 굉음을 토해내며 빠르게 다가왔다.

쿠쿠쿠쿠쿠-!!!

대지가 진동하며 하늘이 황색으로 물들었다.

거센 강풍에 옷자락이 쉴 새 없이 펄럭였다. 천근추(千斤錘)로 체중을 증가시켰기에 날아갈 염려는 없지만, 매우 피곤한 상황이었다.

두 눈은 도저히 뜰 수 없었으며, 호흡은 멈춘 지 오래였다.

손녀가 걱정된 유진산은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모래는 유설의 신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옷자락도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니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폭풍의 강도가 갑자기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윽, 아가! 뭐 기술 같은 거 없어? 불문사자신공이든 뭐든 아무거나 좀 써보거라.”

뒤를 휙 돌아본 유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설의 전신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찬란할 정도로 눈부신 기(氣)의 장막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물방울처럼 감싸며 모든 것을 튕겨냈다.

폭풍의 중심부였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잘했다. 이제 빨리 빠져나가자.”

조손은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모래폭풍 속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곳에 오고부터는 되는 일이 없었다.

유진산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사막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 *

고비사막에는 길이 따로 없으며, 푯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단지 해의 방향을 보고 이동할 뿐.

하지만 기후 탓에 해는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뒤에서 낙타를 머리에 인 채 쉬지 않고 반나절을 달렸을 때였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으응? 뭐가?”

“지금쯤이면 이미 도착했어야 했는데…….”

주변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만이 펼쳐져 있었다.

설마 길이라도 잃은 것일까? 아무래도 모래폭풍의 영향 때문에 방향을 잘못 잡은 듯했다.

“괜찮아, 할배. 빨리 다시 찾아보자.”

“그래. 근방 어딘가에 있을 테니 좀 둘러보자꾸나.”

어차피 찾는 것은 시간상의 문제일 터.

유진산은 손녀가 이끄는 방향에 몸을 맡긴 채 사막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경공으로 달리길 두 시진.

점차 체력이 고갈되고, 새벽녘이 밝아올 무렵. 드디어 유설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할배, 저쪽에 호수가 있어!”

사막에는 가끔 샘이 솟고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이 있다.

운 좋게 그곳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유설은 물 한 방울 없이도 한 달 이상을 버틸 수 있는 경지였지만, 유진산은 달랐다.

심신은 지치고 목은 타들어 간 지 오래였다.

낙타를 업고 온종일 사막을 경공으로 뛰어다녔으니 지칠 수밖에.

“마침 잘 됐다. 어서 가서 좀 쉬자.”

호수 주변으로 유목민들의 천막집 몇 채와 말 목장이 보였다.

새벽녘이라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둔황으로 가는 길은 차차 물어보면 될 터.

지금은 메마른 목부터 축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낙타를 내려놓은 둘은 호수를 향해 후다닥 달렸다.

타앗-!

삼 장 높이까지 떠오른 조손은 동시에 물속으로 입수했다.

풍덩-!

거센 물보라와 함께 시원함이 뼛속까지 전해져 왔다.

수달처럼 팔딱거리는 둘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할배, 나 잘했어?”

“우리 설이 아주 장하다. 이런 곳을 찾아내다니, 정말 큰일을 했어.”

“히히히.”

둘은 물장구를 치고 물을 뿌려대고 놀았다.

그리고 다시 양가죽 통에 물을 담아와 낙타에게 먹이고 있을 때였다.

새벽의 인기척 때문이었을까? 수십여 명의 유목민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너, 너희들 여기 어떻게 왔어?”

“어른들은? 설마 둘뿐이야?”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 둘이 사막의 오지까지 찾아왔으니.

할아버지의 전음을 받은 유설이 시키는 대로 대꾸했다.

“우리는 둔황에 있는 친척을 찾으러 가고 있어요.”

“둔황이라고? 여기서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곳인데.”

아무래도 방향을 단단히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

조손은 그간의 사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때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숨을 헐떡이는 낙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놀랍구나. 이 상태로 주인들을 이곳까지 데려오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유설이 다가가 낙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초랭이예요.”

“그래, 내 평생 이토록 훌륭한 낙타는 처음 보는구나. 마지막까지 주인들을 위해 기력을 쏟았으니, 한낱 짐승의 목숨이라도 어찌 숭고하지 않겠느냐.”

“여기에 맡기면 아프지 않게 돌봐줄 수 있어요?”

“그래, 그래. 초랭이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먼 길 와서 배고프고 지쳤을 텐데, 일단 이쪽으로들 따라오너라.”

눈앞의 노인이 이곳의 족장인 듯했다.

그가 앞장서서 조손의 등을 감싸며 한 천막집으로 인도했다.

유진산은 묵묵히 내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곳인 듯 길게 놓인 탁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뼛조각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천막의 귀퉁이였다. 병장기 몇 개가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산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족장이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허허. 무서워할 것 없다. 저것은 사막의 도적놈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는 도구일 뿐이니.”

“……알겠습니다.”

노인의 뒤에선 두 명의 장한이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유진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체보다 유난히 발달한 상체. 그리고 손아귀에 보이는 굳은살의 위치는 베기가 아닌 찌르기를 통해 생겨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전문적으로 기마 무예를 익힌 자들인가? 확실히 단순한 유목민은 아니로군.’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안중에 둘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체구가 비대한 중년의 여성이 접시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유설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예쁘게 생겼구나. 많이들 먹고, 부족하면 더 얘기하거라.”

“잘 먹겠습니다.”

마른고기와 우유. 그리고 과일 몇 가지였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며칠을 굶은 이들에겐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할아버지는 안 드세요?”

유설의 물음에도 족장은 미소만 머금은 채 고개만 연신 끄덕거렸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장한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자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우선 자고,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꾸나.”

유진산은 오늘 이곳에서 묵는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저들의 반응이 좀 황당했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뭐, 하루 정도 쉬다가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지 않아도 낙타를 업고 생고생을 했던 터라 휴식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날이 밝으면 둔황으로 가는 방향을 물어보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유진산과 손녀는 어딘가로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둘이 떠난 후에도 노인은 자리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가는 모습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길 잠시 후.

장한 한 명이 다가와 노인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횡재했습니다, 두목. 어떻게 처리할까요?”

“음……. 동생은 근골을 보니 아주 물건이더구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용화단에 데려가서 잘 흥정해봐.”

“여자아이는요?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최고의 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아이는 그냥 놔두거라.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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