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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28화 (128/238)

128화 어디 올 테면 와봐 (3)

유진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지켜보았다.

눈앞에서는 그야말로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섬광이 쉴 새 없이 번뜩였으며, 강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쩌정-!! 쩌저저정-!!!

뒤섞인 유설과 곤륜무제의 주위로 거센 회오리가 일었다.

사정없이 뿜어지는 광풍에 유진산은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저게 바로 절대자들의 싸움이란 말인가?’

도저히 자신이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두 손에 땀을 쥐며 손녀를 응원했다.

“할 수 있다, 설아! 저놈에게 우리 가문의 위용을 보여주거라!!”

둘의 움직임이 워낙 빨랐기에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켜보는 유진산은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손녀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륜무제의 경지는 높게 잡아도 극(極)을 향해 다가가는 화경이리라. 역근경을 익힌 소림사의 파계승보다는 강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반면 유설은 불문사자신공의 제8식(第八識)인 아라야식(阿羅耶識)을 깨우쳐 현경에 도달해 있었다.

곤륜무제의 경험과 도룡검법의 위력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싸움이 길어질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제발…….’

쩌적-! 쩌저적-!!

땅이 갈라지고, 주변의 나뭇가지가 기의 폭풍에 휘말려 부러져 나갔다.

고수들끼리의 싸움일수록 승부는 금세 결판나기 마련이다. 경지에 이를 정도면 매 초식이 필살의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 시진이 지나도록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니.

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유진산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쟤가 설마?’

불현듯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짐작되는 경우가 한 가지가 있었다.

황당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을 터.

유진산은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 녀석! 장난치지 말고, 어서 끝내!!”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이 왔다.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싸움에 드디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쩌억-!!

“크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곤륜무제가 뒷걸음질 쳤다.

비틀거리는 몸짓과 창백해진 얼굴. 한눈에 보아도 몹시 지친 듯한 몰골이었다.

반면에 유설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상대의 맞은편에서 용화창을 빙빙 돌려대는 걸 보니 힘이 넘쳐나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어?”

천성적으로 무인(武人)의 피를 타고난 아이였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무예를 겨루고 희열을 느끼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설마 천하의 곤륜무제까지 봐주면서 시간을 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리 귀띔했어야지.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알았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건성건성 대답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손녀를 교육할 때가 아니었다. 지친 곤륜무제가 기력을 회복하기 전에 끝장내야 했으니까.

“갈 길이 머니까, 어서 끝내거라. 도착하면 저놈 말고도 많아.”

유설은 대답 대신 등 뒤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삼 초식 안에 끝낸다고?”

“아니, 셋을 셀 때까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곤륜무제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유설이 대꾸하기도 전에 유진산이 먼저 소리쳤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니, 어서 공격하거라!”

그 순간 손녀의 전신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갔다.

가히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움직임이었다.

타앗-!

마지막을 직감한 것일까? 곤륜무제는 반사적으로 도룡검법의 절초를 펼쳐내고 있었다.

강기로 만들어진 청룡(靑龍)이 검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유설이 움켜쥔 용화창도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내며 기염을 토해냈다.

콰아아앙-!!!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누군가의 신형이 떨어져 나갔다.

둘의 격돌은 가히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했다.

유진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수만 개의 꽃잎이 청룡의 아가리를 찢어발기는 모습뿐이었다.

“쿨럭!”

바닥에 쓰러진 곤륜무제가 한 움큼의 핏물을 게워냈다.

곤륜파의 도복은 갈가리 찢어져 거지꼴이 되어있었다. 그 와중에도 부러진 검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대단할 정도였다.

유진산이 얼른 다가가 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게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직접 싸워보면 후회할 거라고.”

“……농락하지 말고 죽여라.”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서역으로 떠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라.”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일을 마치면 바로 올 계획이다. 무림맹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곤륜무제의 시선이 푸르른 하늘을 향했다.

생의 마지막을 담는 그의 눈빛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세상이…… 종말을 피할 수가 없겠구나.”

마지막치고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자신들이 돌아와 정파를 무너트린다고 한들, 종말이란 표현하고는 맞지 않았으니까.

“무슨 의미지?”

“…….”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된다는 마냥 그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는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곤륜무제를 보내주려던 그때.

유진산의 뇌리에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손녀에게 손짓을 보냈다.

“어서 봇짐을 가져오너라.”

유설이 쫄래쫄래 달려가서 아까 내려두었던 봇짐을 들고 왔다.

“여기.”

봇짐을 뒤적거리던 그는 목각인형을 하나 꺼내 들었다.

과거 귀신숲에서 백골마녀에게 납치당했을 당시. 그녀의 오두막에서 함께 감금되어 인연을 쌓은 노인이 있었다.

자신에게 내공까지 전해준 그는 자신을 곤륜파의 청허라 소개했었다.

마침 눈앞에 곤륜파의 큰 어른이 있었으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사문에 진성이라는 제자가 있나?”

“……?”

곤륜무제는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 목각인형의 주인이 그 녀석인 것 같아서 말이다. 이름도 쓰여있고 말이야.”

“그 아이에게 원한이 있다면, 모두 내게 풀고 가거라.”

유진산은 왠지 모르게 곤륜무제의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간 목숨을 구걸하는 무인들을 얼마나 보았던가. 마지막까지 제자를 챙기는 모습이라니.

속이 꽉 막혀 있는 자였지만, 적어도 신념과 의리는 있는 듯했다.

“이건 청허라는 자가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던 유품이다.”

“……청허?”

“그래, 곤륜파의 청허. 괴로운 삶을 살다가 안타깝게 죽은 친구였지.”

갑자기 곤륜무제의 눈빛에 살기가 이글거렸다.

“음양쌍괴 이놈들. 내 사제까지 죽였던 것이냐.”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우리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유진산은 그에게 당시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귀신숲의 백골마녀라 불렸던 그녀에게 붙잡혀 괴로운 삶을 보내야 했던 청허의 사연을 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내공을 전해주고 죽은 것까지,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해주었다.

내용을 듣게 된 곤륜무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했다.

“끄으으…….”

청허와 몹시 가까웠던 사이인 듯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몹시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명성이 드높은 곤륜파의 제일고수가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줄이야.

곤륜무제의 처분을 고민하던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에 청허가 평생을 품고 있었던 목각인형을 올려두었다.

“이것으로 곤륜파에 진 빚은 갚은 것으로 하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진산은 등을 돌렸다.

봇짐을 손녀의 등에 묶어주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옥촌으로 향했다.

“봐준 거야?”

손녀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미래에 위협이 될 만한 적은 할아버지가 단 한 번도 살려 보내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봐준 게 아니라 갚은 거란다. 은혜든 원한이든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주는 것이 우리 가문의 철칙이잖느냐.”

“응, 잘됐다. 나도 왠지 그 사람이 가여워서 살려주고 싶었어.”

유진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설이는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잊지 말고 그 마음을 항상 간직하거라.”

“히히. 알았어.”

둘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잠시 말없이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정적을 깨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장하다, 우리 손녀.”

유설의 나이 아홉 살.

드디어 무림십대고수 중 한 명을 공식적으로 쓰러트린 것이다.

* * *

가옥촌에 도착한 조손은 마을의 시장으로 향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황량한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터. 식수와 간식을 보충해야 했다.

서역으로 향하는 무역로였기 때문일까? 면적은 작았지만, 상업이 발달한 마을이었다.

구매한 물품은 양가죽에 담긴 물통 하나와 육포 따위의 간식거리 몇 개.

겨우 이 정도의 보급으로 둔황까지 간다는 것을 알면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경공을 사용할 줄 아는 무림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유진산의 판단으로 길어도 이틀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자, 어서 출발하자꾸나.”

준비를 마쳤음에도 유설이 머뭇거리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할배, 잠깐 저기 좀 봐봐. 신기하게 생겼네.”

손녀가 낙타를 탄 상인들을 부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낙타라고 한다. 사막을 횡단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이동수단이지.”

아직은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다. 처음 보는 동물이 신기할 수밖에.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유설이 아니었다.

“나도 타보고 싶어. 낙타…….”

“안돼, 저건 너무 느려.”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거절했다. 낙타를 타고 이동한다면 며칠이 걸릴지 계산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설은 이미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타고 가는데, 나는 태워주지도 않고…….”

“이거 타고 가면 엄청나게 고생할 거야.”

“괜찮아, 나는.”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거라.”

“…….”

한참이 지나도 대꾸가 없었다.

입술을 꾹 여문 채 큰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걸 보니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있겠는가.

“후회 안 할 수 있어?”

“응. 절대 안 해.”

하루만 지나도 지루하다고 난리 칠 게 눈에 훤했다.

고생길이 훤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 할아버지 말이 옳다는 것을 말이다.”

“그, 그럼 우리도 낙타 살 거야?”

“그래. 대신 한 마리만 사는 거다.”

조금만 타고 가다가 마주치는 상인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의 확답을 받은 유설은 양손을 움켜쥔 채 방방 뛰며 좋아했다.

“히히히. 우리 할배 최고야!”

이렇게나 기뻐할 줄이야. 비록 여비는 좀 낭비하겠지만, 손녀가 좋아하니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낙타 상인이 있었다. 아이 둘이 접근하자 그가 흐뭇한 미소로 쳐다보았다.

“낙타 구경하러 왔구나? 그래, 마음껏 보다 가거라.”

자세한 얘기는 낙타를 고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유진산은 예리한 눈썰미로 가장 건강한 녀석을 찾아보았다. 근육과 관절 등 건강상태를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음.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이걸 어쩐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손녀에게 간택을 받은 낙타가 한 마리 있었으니까.

“안녕, 초랭아. 나는 설이라고 해.”

옆을 돌아보니 이미 유설이 낙타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 놓고 있었다.

하필이면 골라도 가장 허약하고 마른 녀석이라니.

유진산은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이거 아무래도 둔황까지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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