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렸겠다 (2)
“음, 음괴…….”
유설의 등장에 비도문의 문주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반면 유진산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났다.
자신의 허락 없이 난입한 손녀였지만, 어찌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때마침 잘 왔다. 어서 저 녀석을 쓰러트리거라.”
고개를 끄덕인 유설이 등 뒤의 봇짐을 풀러 할아버지에게 건네었다.
“뒤로 가 있어.”
졸지에 짐꾼 신세가 되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봇짐에 사선으로 묶여있는 단창으로 향했다.
“용화창은? 꺼내줄까?”
“필요 없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확실한 자신감을 보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유진산은 뒤로 물러서며 비도문의 문주를 살펴보았다.
명치 부근에 시퍼렇게 각인된 선명한 주먹 자국.
권풍만으로도 화경의 신체에 이 정도의 타격을 줄 수가 있다니. 같은 백보신권인데도 완전히 다른 위력이었다.
그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자세를 온전히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네 이놈! 그동안 못된 짓을 골라 해놓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지금부터 그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라.”
비도문의 문주는 유진산의 도발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유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남아있던 두 자루의 비도를 쏘아 보냈다.
파팟-!
회오리를 일으키며 맹렬히 다가오는 비도에는 마치 생명이 깃든 듯했다.
하지만 유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쐐에엑-!!
곧이어 두 자루의 비도가 유설의 몸을 차례로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유설의 걸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비도가 연기를 통과한 듯한 모습이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비도문의 문도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봤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오직 문주와 유진산만이 정확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 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뿐.
“어림없다!”
또다시 바닥에서 대여섯 개의 비도가 문주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유설을 향해 연이어 쏘아 보냈다.
파팟-! 파파팟-!!
날카로운 비도가 차례차례 날아들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도 예외는 없었다. 애꿎은 허공만을 갈랐을 뿐이었다.
이때서야 문주는 볼 수 있었다. 보조개를 피어 올리는 유설의 미소를.
그 모습이 소름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할배. 이 아저씨는 얼마나 맞아야 해?”
대답은 유설의 십여 장 뒤에서 들려왔다.
“아주 못된 녀석이니 백 대도 부족하겠구나. 마무리는 할아버지가 할 테니, 죽기 전까지만 때리거라.”
“알았어.”
유설이 양손을 움켜쥐자 문주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제 그의 손에 남은 비도는 고작 한 개뿐.
“잠, 잠깐.”
“못된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 그렇죠?”
눈부신 황금빛 기류가 발현되며 유설의 전신을 감쌌다. 역근경보다 상위 차원의 절세무공인 불문사자신공이 발현된 것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동그랗고 찬란하게 빛나는 두광(頭光)은 흡사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를 연상케 했다.
비도문의 문주. 아니, 지옥 같은 곳에서의 맹훈련으로 단련된 창룡대원조차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나는 음양쌍괴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움켜쥔 비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유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앙-!!
섬뜩한 도강이 지나가는 자리 아래로 유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유설의 두 주먹이 수십여 개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지금 그의 복부를 마구 후려치고 있는 듯했다.
쩌저저저적-! 쩍-!!
불과 한 호흡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주먹이 내질러진 횟수는 백 번이 넘었다.
물론 그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도들의 눈에는 유설이 잠시 그에게 접근했다가, 다시 한 발자국을 물러난 것처럼만 보였다.
그때였다.
“……끄.”
두 눈이 풀린 문주가 뒷걸음질 치더니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전신의 힘이 모두 풀린 듯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쿠웅-!
그는 몹시 억울하다는 듯 입을 뻥긋댔지만, 입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는지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눈 깜짝할 사이 벗고 있던 상체가 주먹 자국으로 뒤덮였지만, 외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속의 장기가 전부 뒤집혔는지 전신의 모공에서 핏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잽싸게 달려온 유진산이 그에게 따귀를 날렸다.
철썩-!
“이런 싸가지 없는 놈. 노부가 지금부터 네 잘못을 알려주마.”
“……?”
유진산은 일단 손녀에게 눈짓부터 보냈다.
“수고했다, 아가. 아무도 못 나가게 입구 좀 지키고 있어.”
“으응.”
대답하기 무섭게 유설은 어느새 비도문의 정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움직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우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덤빈 녀석들은 모두 죽였지만, 아직도 수십 명의 문도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중립을 표명한 문파로서 다른 약소세력들을 핍박하고, 흡수하고,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더냐!?”
문도들의 모습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여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때 그들 중 항렬이 가장 높아 보이는 자가 답했다.
“저,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가?”
이번에는 다른 자들이 답했다.
“모, 모두 문주님이 계획하신 겁니다.”
“저희는 명령에만 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문도들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주를 팔아먹고 있다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평생 수많은 세력을 만나봤지만, 이런 문파는 본 적이 없었다.
평소 문주의 행적이 얼마나 쓰레기 같았으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혀를 끌끌 차던 유진산이 그들을 꾸짖었다.
“부당한 명령이라면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그런다고 어찌 죄가 정당화된다는 말이더냐! 냉큼 무릎을 꿇지 못할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양괴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것을.
문주도 버린 마당에 문파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버릴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도들이 모두 한쪽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어이가 없게도 유설이 있는 입구 쪽이었다. 아무래도 손녀가 자신보다 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겁에 질린 조무래기들에겐 더는 볼일이 없었다. 생각 같아선 한 놈도 살려두고 싶지 않았지만, 손녀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최대한 살생을 자제하는 유진산이었다.
하지만 문주 녀석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유가장의 원수인 창룡대의 일원이었으며, 일가친척이 운영하는 백화문을 핍박한 진짜 흉수였으니까.
“부하들도 너를 문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하긴, 원래 네 자리도 아니었지.”
“……?”
“이곳의 전대 문주가 십 년 전에 의문사했다는 내용을 알고 있다. 그 또한 네놈의 짓이겠지?”
“그건…….”
이제야 겨우 목소리가 나오는 듯했지만, 입을 움직이는 것조차 몹시 힘에 겨워 보였다.
“너희 창룡대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관심 없다. 어차피 찾아가서 모두 죽여놓을 거니까.”
“……도대체 음양쌍괴가 왜 우리를 적대시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두시오.”
“노부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느냐.”
“나의 개인적인 일탈은 인정하오. 하지만…… 창룡대는 모두의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오.”
그야말로 기가 찰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유진산이 다시 한번 그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아무런 죄 없는 가문을 몰살시킨 것도 공익이란 말이더냐!”
그는 양괴가 유가장의 가주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들의 더러운 짓을 감추기 위해, 살인멸구한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언젠가는…… 지금의 일을 반드시 후회할 것이오.”
더는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을 듯했다.
다른 대원들의 위치를 묻고 싶었지만 부질없을 일이었다.
지독한 훈련을 받아온 창룡대원이 고문이나 협박 따위에 굴복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가, 잠시 다른 데 좀 보고 있거라.”
그의 나직한 한마디에 유설이 고개를 휙 돌렸다.
굳이 손녀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다음 생에는 네가 괴롭힌 자들에게 사죄하는 삶을 살아가거라.”
* * *
“대부 어르신!”
유광운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내려와.”
담장 너머가 궁금했기에 높은 곳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면에 내려선 그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뭘. 이거나 받아.”
유진산이 비도문에서 들고나온 주머니를 그에게 휙 던졌다.
묵직한 것을 보니 은자가 들어있는 듯했다.
“이건 뭡니까?”
“뭐긴, 돈이지. 그동안 저곳에 얼마나 많은 돈을 상납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게다.”
“이, 이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혹시라도 모를 비도문의 보복이 두려운 것이리라.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그놈들이 어찌 알겠어. 어쨌거나 걱정할 것 없다. 앞으로 비도문은 십 년 동안 봉문(封門)하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어기고 무림에 기어 나온다면 그땐 아주 끝장을 내주마.”
봉문은 문파가 모든 대외활동을 중지하고 근신에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이 기간은 무림에 공식적으로 포고되어 문도들의 강호 출입 자체가 금지된다.
“고맙습니다, 대부님. 아버지께서도 살아계셔서 이 기쁨을 함께했다면 좋았을 텐데…….”
“풍이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그럼 너도 어서 가보거라. 문도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
“이대로 그냥 떠나시게요? 저희 백화문으로 가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요.”
“지금은 우리랑 엮여서 좋을 게 없어. 모든 게 다 정리되면 그때 한번 들르마.”
“대부님…….”
짧은 재회였지만, 다시 이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유설이 양손을 모으고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먼 곳에서나마 유설의 신위를 어렴풋이 보았기 때문일까? 유광운의 입에선 도저히 반말이 나오질 않았다.
“음, 음괴 님도 조심히 가십시오.”
* * *
패도문에 복귀한 유진산은 바로 백규를 찾아갔다.
비도문을 손쉽게 박살 냈다는 소식에 그가 펄쩍 뛰며 기뻐했다.
“하하! 역시, 형님이 해낼 줄 알았다오. 정말 혼자서 다 처리하신 거요?”
“뭐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지. 우리 설이는 한 명밖에 못 잡았으니까.”
“이 아우가 형님을 과소평가했으니, 진심으로 사죄하겠소.”
백규가 일어서려 하자, 유진산은 오른손을 내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다른 놈들에 대한 정보는 좀 알아봤겠지?”
“어떻게 아셨소? 정말 눈치가 귀신이오.”
“아우의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어서 내놓으시게.”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또 잡으러 가시려고요?”
“한두 놈도 아닌데 갈 길이 멀어. 빨리 그놈들을 쳐내야 진정한 원수를 잡으러 갈 것이 아닌가.”
최종 목표인 무림맹주를 잡으려면, 먼저 창룡대를 무너트려 그녀의 손발을 잘라내야만 했다.
그때 백규가 미리 준비해놓은 서신을 내밀었다.
“이번에 확인된 놈들은 일단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정말 보통 녀석들이 아니었으니.”
“놈들이라니? 한 명이 아니란 말인가?”
“다섯 놈이 한 곳에 있었소. 문제는 정체가…….”
서신을 읽어보던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