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큰 어르신 오셨다 (2)
“양괴.”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유진산이 기세를 발출했다.
초절정고수의 기운에 짓눌린 무사들은 몹시 긴장하며 당황했다.
“……헉.”
“음, 음양쌍괴가 왜 이곳에……?”
아무리 백화문이 명성조차 없는 시골 문파라도 엄연히 무림에 소속된 세력이었다.
그들 또한 보는 눈이 있었으며, 듣는 귀가 있었다.
적어도 섬서에서는 음양쌍괴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무사들이 공포에 질리자 유설이 할아버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할배, 왜 그래? 애먼 사람한테는 기세를 발출하면 안 된다며.”
“이래야 얘기가 빠르지. 우리가 누구라고 언제 일일이 설명하느냐.”
가는 곳마다 가장 번거로운 부분이었다. 어디에서나 조손의 첫인상은 꼬마들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방식이 다소 거칠더라도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안 돼.”
보다 못한 유설이 왼손을 슬쩍 들어 올리자, 유진산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단번에 증발해버렸다. 압도적인 경지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진 조손이 미리 입을 맞추어 약속한 상황이었다.
“…….”
겁에 질린 무사들을 향해 유설이 양손을 슬쩍 올려 보였다.
“걱정하지 마요. 해치지 않아요.”
그러나 이어진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음, 음괴?”
“잘, 잘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그저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음양쌍괴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과장이 되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 중에는 소란스러움을 듣고 나온 문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유진산이 뒷짐을 지고 문주의 옆을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뭐 이리 놀라? 따라오너라.”
문주 유광운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그를 뒤따랐다.
목적지는 황당하게도 자신이 집무를 보는 아담한 전각이었다.
* * *
유진산에게서 정체를 듣게 된 유광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부 어르신?”
“그래, 맞다. 한 십 년 만이지?”
“마지막으로 뵌 지 그쯤 된 것 같습니다. 양괴의 정체가 대부님이셨다니……. 반로환동을 하셨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 주변의 이목도 속여야 했으니, 다소 거칠게 들어온 것은 이해해줄 수 있지?”
“예, 그럼요. 그런데 음괴 님께서는 누구신지…….”
유진산이 안심시켜줬음에도, 정파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음괴에게 자꾸 신경이 쏠리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유설이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설이라고 해요.”
자신의 손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한테 깍듯했단 말인가.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예의가 발랐어? 할아버지한테는 반말이나 막 하면서 말이야.”
“히히.”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아이의 모습이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유광운을 바라보았다.
“가만있어 보자……. 내 막내아들의 늦둥이 딸이니까 따지고 보면 너랑은 십촌쯤 되겠구나.”
“그, 그럼 음괴 님께서 대부님의 손녀라고요?”
그는 정신이 혼란스러운지 횡설수설했다.
유진산의 말대로라면 음괴의 정체가 반로환동한 노고수가 아닌 진짜 아이라는 말이었으니까. 무공과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우리 가문에 무신이 태어났어.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지. 그런데 풍이는 어디 가고 네가 문주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그 순간 유광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버지께서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 아직은 정정할 나이였을 텐데, 어쩌다가?”
“…….”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그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반각이 흘렀을 때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대부님의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미치광이가 되셨다고 무림맹에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아버지는 절대 믿지 않으셨지요. 당시 저희 쪽으로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여기로 도망쳐 왔으면 같이 죽자는 것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돌려? 얘기하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는 게야?”
“…….”
어찌 된 일인지 유광운은 또다시 입을 닫았다.
상황이 이런 이상 그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유진산은 화두를 돌려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도문이라고 있지.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알고 싶은데, 정보를 좀 줬으면 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유광운은 여전히 말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유진산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또다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길 잠시 후.
“……대부님. 방금 비도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비도문. 은원이 좀 있는데, 정말 죽일 놈들이 맞는지 먼저 알아보려고. 아는 게 없으면 얘기 안 해도 되니,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말을 마친 유진산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살기(殺氣)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놈들이었습니다.”
“뭐가?”
“제 아버지를 죽인 놈들 말입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화문은 정사간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소규모의 중립세력이다. 문파라기보다는 도장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전대문주인 유섭풍은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들의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묵묵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듯한 표정. 무엇인가 분명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도문이 풍이를 죽였다고? 어째서?”
자리에서 일어난 유광운이 책장을 뒤적거리더니 서신을 하나 꺼내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묵묵히 내용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하동연합회? 중립을 표방하는 놈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강호에서 닳고 닳은 그는 단번에 눈치챘다. 비도문에서 강압적으로 만들게 한 서약서임을.
백화문 외에도 열 개가 넘는 문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중립세력이란 것이었다.
“말이 연합이지, 비도문에 속한 하위 문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원하지 않았어요.”
“당연한 소리지. 상대가 사파든 어디이든 그놈들이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순간, 자동으로 모두 참전하게 되는 게다. 그것뿐만이 아니겠지?”
“……예.”
“바른대로 다 말해.”
의지할 누군가가 생겼기 때문일까? 가문의 큰 어르신이 캐묻기 시작하자, 유광운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켜보던 유설도 자기만의 생각에 잠기며 입을 꾹 다물었다.
“회비 명목으로 상납금을 뜯어가고 있어요. 돈을 내지 못하는 날에는…….”
더 듣고 있다가는 화병이 날 것만 같았다.
유진산은 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는 잠시 손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밖으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는 바로 체념했다. 순순히 나갈 리도 없었지만, 밖에 있다고 해도 초인적인 아이의 청각을 막을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 부분은 나중에 듣지. 풍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말해보거라. 네 아비가 강단이 있어서, 남에게 쉽게 굴복할 사람이 아닌 것은 나도 잘 알아. 설마 버티다가 해코지라도 당한 것이더냐?”
“……확실합니다, 대부님. 아버지께서 제안을 거절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암기에 당한 것을 보면 그놈들이 틀림이 없어요.”
“암기에 당한 줄은 어떻게 알아냈어?”
유광운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고선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아버지의 가슴에 박혀있었어요.”
작고 날카롭게 다듬어진 이것은 틀림없이 암기로 사용되는 비도(飛刀)였다.
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유진산은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숙련된 살수는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 법이지.’
자신이 아는 유섭풍을 암기로만 살해할 정도라면, 최소한 일급살수임이 분명할 터.
암기를 회수하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남겨둔 것이 확실했다. 공포심과 함께 경고를 주기 위해서.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계속되는 강압과 협박에 못 이겨 비도문이 주체하는 연합에 가입한 것이리라.
“안 되겠어.”
지켜보던 유설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유진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손녀에게 손짓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네가 뭘 안다고.”
“나도 알아. 우리 친척 할배를 죽인 나쁜 사람들이라는 거.”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손녀를 이기는 할아버지는 더 찾기 힘든 법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봐도 나쁜 놈들이 맞지?”
“응. 두들겨 맞아야 해.”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우리 손녀가 말하길, 그놈들은 좀 처맞아야 한다는구나. 앞장서거라.”
“예……?”
“비도문으로 안내하라고.”
그곳의 문주가 창룡대원이 확실하다면, 유가장을 포함해 유씨 가문을 두 번이나 건드린 셈이었다.
가문의 큰 어른으로서 비도문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유광운은 엉거주춤 문 앞을 나섰다.
벌컥-!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십여 명의 문도들만 앞마당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음양쌍괴가 문주님을 납치하고 있어.”
“어, 어떡해.”
자신들의 문주가 양괴 옆에서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감히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별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모두 여기서 기다려.”
유광운이 못을 박자 문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만 동동 굴려댔다.
* * *
백화문에서 비도문까지의 거리는 말을 타고 일식경.
경공으로 일각이면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였다.
“이곳입니다, 대부님.”
고풍스러운 장원이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드높은 담장 너머로는 최소한 오십 명이 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살펴보던 유진산은 품속에서 비도 한 자루를 꺼내었다. 살해당한 유섭풍의 몸에 틀어박혀 있던 암기이기도 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대부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 문파와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놈들입니다.”
비록 비도문이 중립을 표명하는 문파였지만, 지역에서는 위세가 드높았다. 그런 와중에도 알려진 것이 많이 없는 신비로운 세력이기도 했다.
그곳을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겠다니. 유광운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저 먼발치에서만 지켜봐.”
그가 함께 들어간다면 향후 백화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배, 나는?”
“설이 너도 여기서 기다리거라. 이놈들은 꼭 할아버지의 손으로 처리해야겠으니까.”
유설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할 때는 고집을 부려도 소용이 없음을.
하지만 손녀의 입장에서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할배, 그럼 창이라도 가져가. 여기 뭔가 느낌이 이상해. ”
유진산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이깟 놈들에게 용살창을 더럽힐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그것이 우리 가문의 법칙이니.”
일가친척이 살해당했을 때 이용되었던 암기를 사용하여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찜찜함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곳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혹시 모를 안전장치 하나쯤은 마련해야 할 터.
“아가.”
“응?”
“어디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