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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22화 (122/238)

122화 큰 어르신 오셨다 (1)

패도문에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이곳에는 지금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전에 없던 활기가 넘쳤다.

“네 이름이 만두라고 했지?”

“예, 설이가 지어줬어요.”

앉아서 쉬고 있던 대머리 무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배꼽을 잡았다.

“하하. 설이 요 녀석, 어쩌자고 그런 이름을 지어준 거야?”

그의 옆에는 주먹밥을 움켜쥔 아이가 히죽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저는 마음에 들어요. 원래 제 이름은 삼팔칠(三八七)이었거든요.”

“아까 보니 무공이 대단하더구나. 나도 이 문파에서는 한가락 하는 놈이지만, 꼬마와 동수를 이룰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헤헤.”

무사가 흐뭇한 미소로 옆에 앉은 아이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내 이름은 황균이다. 집사람을 만난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 빌어먹을 귀두공의 부작용 때문에 지금까지 자식이 없지. 원래대로라면 딱 너만 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아…….”

“만두야.”

황균이 이름을 지그시 부르자 만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예?”

“오늘같이 우리 집에 놀러 가지 않을래? 아내의 요리 솜씨가 기가 막히거든.”

“그,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여기서 코앞이니까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같이 하자. 내 안사람에게 미리 얘기도 해놨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예……. 저도 좋아요.”

멀리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의 얼굴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비단 황균과 만두뿐만이 아니었다.

형과 동생 사이. 삼촌과 조카 사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곳곳에서 관계가 발전하고 있었다.

의도한 바대로 분위기가 잘 흘러가고 있었다.

‘무림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즐겨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만.’

그의 발걸음은 다시 어딘가로 향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연무장에선 어제와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어?”

중심에 서 있는 낯익은 여자아이는 바로 유설이었다.

백여 명에 이르는 패도문의 무사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손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히히. 어서 들어와요. 이번에는 한 손만 쓸게요.”

유설이 들고 있던 두 자루의 목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패도문의 돌격대장인 홍기가 쾌재를 부르짖었다.

“정말 한 손만 쓰겠단 말이냐?”

“정말이에요.”

“오냐. 그럼 오늘이 우리 설이의 제삿날이 되겠구나. 얘들아, 가자!!”

홍기의 한마디에 목검을 움켜쥔 무사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돌진해 들어갔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결과는 굳이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불문사자신공을 익히고 현경(玄境)의 단계에 접어든 손녀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지는 싸움인데도 매일같이 도전자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유설의 동작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었으니까.

기이하게도 손녀에게 맞아 쓰러지는 횟수가 많은 자일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적어도 십 년 후면 이곳이 천하제일문이 되겠군.’

유진산은 확신했다.

자신이 탈출시킨 아이들은 패도문의 무사들과 맞수를 이룰 정도로 강했다. 이렇게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이 성장한다면, 한 명 한 명이 무시무시한 고수가 될 터.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었다.

‘저 순수한 아이들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더 좋으련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호현을 벗어난다면 또다시 창룡대에게 잡혀갈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생활하며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기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잠시 후 유진산이 도착한 곳은 문주의 집무실이었다.

도착하기 무섭게 앞을 지키는 무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시지요, 어르신.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수고들 많아.”

허리춤밖에 안 되는 꼬마에게 우람한 체구의 무사가 굽신거렸지만,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백규가 찻주전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때맞춰 잘 오셨소, 형님.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차가 다 준비되었으니까.”

유진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 앉던 의자에 올라탔다.

“냄새가 향긋하니 좋군.”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소. 이게 바로 백규가 직접 우려낸 산사차요.”

탕후루의 재료인 산사열매로 우려낸 차로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즐겨 먹는 음료로 유명했다.

“그건 애들이나 마시는 차가 아닌가.”

“하하. 형님이 반로환동을 한 후 입맛도 같이 어려진 걸 내 잘 알고 있소.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으니, 어서 드셔보소.”

아우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찻잔을 움켜쥐고 한 모금을 들이켜 보니 예상보다도 더 괜찮았다.

“생각보다 맛있군. 근데 자네 한쪽 눈은 왜 그 모양이 되었어?”

분명 백규의 오른쪽 눈 아래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그 누가 사도련의 총사이자, 패도문의 문주를 이렇게 때렸단 말인가.

“별거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소. 어젯밤에 조카에게 맞아서 이리된 거니까.”

백규도 이삼 일에 한 번씩은 유설과 대련장에서 투덕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실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

“저런……. 잘 좀 막지 그랬나. 그런데 어떤 소식이 있기에 날 보자고 했는가.”

백규가 미리 준비한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형님.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정보가 들어왔소.”

“창룡대원들 말인가?”

사도련은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사파는 미래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음양쌍괴가 도와준다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활을 걸었을 정도였다.

“맞소. 조사 끝에 창룡대원으로 의심되는 놈을 한 명 확인했다오.”

“고작 한 놈뿐인가?”

“너무 실망하실 것 없소. 엄청난 녀석이었으니까.”

유진산은 백규가 내민 서신을 살펴보더니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 고작 창룡대의 일개 대원이 중견문파의 문주역을 맡고 있었다고?”

“확인된 정보는 문신뿐이라 확정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정황상으로도 의심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오. 전대 문주는 십 년 전쯤 의문사하였고, 어느 순간 족보조차 없는 그 녀석이 비도문의 주인이 되어있었으니까.”

비도문(飛刀門). 위세가 드높은 중립세력으로 암기를 귀신같이 다루는 문파였다.

유진산도 그들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명성도 대단했지만, 유가장이 자리했던 진양현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창룡대원들도 곳곳에서 정체를 숨긴 채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할 사안이었다.

“이미 정파의 천하인 마당에 중립세력까지 손을 뻗치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이거 파고들수록 우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소.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금 귀찮아졌을 뿐, 달라질 것은 없네. 결국엔 놈들이 가진 전부를 무너트려 줄 거니까.”

가문의 최고 어른이자 가주로서, 식솔들의 시신 앞에서 한 약속이었다.

싸늘하게 죽은 자식새끼들을 묻어주지도 못하고 도망쳐야 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상대가 하늘이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형님의 의지가 그렇다면 우리도 힘껏 맞서보겠소.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나흘 뒤 사혈문과 함께 비도문을 기습할 생각이오.”

사혈문은 호현에서 패도문 다음가는 사파 세력이었다. 아무리 비도문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두 문파의 협공을 버텨낼 재간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를 만류했다.

“그놈들은 양보할 수 없으니, 아우는 자리를 지키시게. 그리고 호현의 전력은 움직여선 안 돼.”

정사전쟁이 격해지는 상황에서 아미산의 아이들까지 빼돌렸으니, 무림맹에서 호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터.

사도련에서도 대비 차원에서 이곳으로 정예를 집결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패도문의 전력을 외부로 빼는 것은 몹시 위험했다.

“정말 괜찮겠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보통 놈들이 아니니, 조심하시오. 설이는 전혀 걱정이 안 되지만…….”

“나도 그렇게 약하지는 않아.”

단지 손녀가 너무 강해서 비교되어 보일 뿐. 유진산의 무공 수준도 쉽사리 맞수를 만나기 힘든 수준이었다.

적어도 화경의 무위를 지닌 절대고수가 아닌 이상 일대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시라도 도움받을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소. 우리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리하지. 아무튼, 다른 놈들의 소재도 계속 조사해주시게.”

지금까지 만난 창룡대원은 아미산에 있었던 소장이 유일했다.

드러나는 정황으로 보면 한 명 한 명이 만만한 상대가 아닐 터.

그들을 먼저 무너트리지 않는다면, 최종 목표인 무림맹주를 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 * *

떠날 채비를 마친 유진산은 손녀의 등에 봇짐을 동그랗게 말아서 매어주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봐. 거의 끝났어.”

이어서 보자기로 감싼 두 자루의 단창을 비스듬히 묶고 있을 때였다.

“할배.”

“응, 왜?”

“왜 짐은 항상 내 등에 묶어?”

언제나 봇짐은 유설의 차지였다.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할아버지가 요즘 허리가 안 좋아. 그리고 우리 설이가 키도 더 크잖아. 나는 다리가 짧아서 창을 매달면 바닥에 끌리거든.”

“아…….”

유설은 이해했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유진산이 웃음을 참으며 재빨리 화두를 돌렸다.

“자. 다 되었으니, 어서 출발하자꾸나.”

“응! 근데 우리 어디가?”

“나쁜 놈들을 잡으러 가는 게다.”

“누구?”

“나중에 네가 더 크면 알려주마. 왜 그놈들을 잡았는지 말이다.”

차마 손녀에게 부모를 죽인 원수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러나 유설이 누구인가.

“궁금해, 궁금해~ 이미 할배보다 내가 더 크잖아.”

난처해진 유진산은 대충 돌려서 얼버무렸다.

“음……. 손속에 인정이 없는 무자비한 녀석들이지. 네가 갓난아기일 때 할아버지도 그놈들한테 당할 뻔했다.”

“할배도?”

“그래. 자세한 얘기는 지금 해줄 수 없지만, 자칫하면 우리 둘 다 죽을 뻔했어.”

가문의 생존자는 고작 단둘이었다.

유진산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 밤잠을 설쳐대는 날이 많았다.

“그랬다고? 나한테 혼 좀 나봐야겠네.”

갑자기 양팔을 올려붙이는 유설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피식 웃고는 손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어서 가서 한번 확인해보자꾸나. 과연 어떤 놈들인지 말이다.”

목적지인 비도문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정사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는 중립세력이었지만, 그것은 위장일 뿐이었다. 사도련의 정보대로라면 말이다.

* * *

경공으로 내달리길 한 시진.

마양현에 도착한 둘은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목표물인 비도문이 이곳에 있었지만, 무턱대고 들이닥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그들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아볼 참이었다.

“가만있어 보자…….”

두리번거리던 유진산은 기억을 더듬거리며 어딘가를 찾기 시작했다.

“비도문이 여기에 있어?”

“아니다. 이곳엔 백화문이라는 작은 문파가 하나 있지.”

“으응? 백화문?”

유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뜬금없이 웬 백화문이란 말인가.

“가보면 알게 될 게다.”

도착한 곳에는 패도문의 일 할 정도 되는 크기의 문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판에 있는 글씨를 보고 유설이 검지를 내뻗었다.

“백화문이다!”

“그래. 이곳의 문주가 우리의 먼 친척뻘 되는 녀석이지.”

“나도 친척이 있었어?”

“어디 한둘이겠느냐. 우리 설이 입장에서 따지면, 증조할아버지의 팔촌 형님의 증손자이니까 아주 가까운 관계로구나.”

“와아…….”

유씨 가문의 항렬로 보면 유진산이 현재 가장 큰 어른인 셈이었다.

오다가다 유가장에 방문하던 먼 친척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곳의 문주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럼 어서 들어가자꾸나.”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뒷짐을 지고 앞장섰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앞마당에서 있던 순박한 무사들이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희들은 누구야?”

“꼬마들이 여긴 왜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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