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전설의 시작 (2)
우우우웅-!
찬란한 황금빛 휘광이 유설의 전신을 감싸고 타올랐다.
유진산은 이러한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인 혜운대사와 그의 사부였던 파계승 정혜를 만났을 때였다.
그들이 펼쳤던 소림사의 최고절학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
하지만 그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의 머리 주변으로 눈부신 두광(頭光)이 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놀라운 모습은 마치 부처를 보는 듯했다.
‘저게 바로 불문사자신공(佛門獅子神功)이란 말인가?’
얼핏 보아도 소림사의 달마역근경보다 상위 차원의 절세신공으로 보였다. 느껴지는 기세와 중압감 자체가 달랐으니까.
저벅.
유설이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도혜사태도 똑같이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인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미파의 노장이었다.
누구인지조차 모를 꼬마에게 계속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건방진 게 어디서.”
외마디와 함께 그녀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검 끝에 서린 시퍼런 아지랑이가 꼿꼿이 세워지며, 유설의 미간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벼락처럼 빠른 쾌검이었다.
파앙-!!
들려온 것은 바람 소리뿐.
유설은 어느새 그녀의 오른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한 번 더 해 보라는 듯 턱을 꼿꼿이 치켜들고서.
“……?”
유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지만, 지켜보던 자들은 흠칫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유진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손녀가 보인 움직임을 볼 수조차 없었으니까.
유진산도 이토록 기이한 현상을 일평생 단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검후(劍后)?’
무림제일고수였던 검후 소소에게서 보았던 움직임이었다.
내로라하는 강호의 절대고수들에게 둘러싸여서도 여유가 넘치던 그녀의 모습을 손녀에게서 본 것이다.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도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공격을 이어갔다.
한 손으로 등을 움켜쥐고서도, 매서운 연격을 펼치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다.
파팟-! 파파파팟-!!
전면을 난자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검 끝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유설의 두 다리는 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지 상체가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내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을 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제자리에서 피하고 있는 듯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악에 받친 도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죽어!”
하지만 그녀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갈라댔다.
파팟-! 파파팟-!!
어느 순간 미친 듯이 움직이던 그녀의 검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고사리 같은 손아귀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당황한 도혜가 그것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리 힘을 줘도, 내공을 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유설이 고개를 치켜들며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제 내 차례지?”
스슥-!
찰나의 순간 도혜는 유설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녀는 당황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서도 꼬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뒤늦게서야 상대가 자신의 등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헉?’
피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자세를 낮춘 유설이 뒤에서 폭풍처럼 회전하고 있었으니까.
곧이어 곡선을 그리는 발등이 그녀의 발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쩌억-!!
“아악!”
단 한 방에 도혜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유설의 손바닥이 바닥을 쓸며 올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건곤장 칠초식 이화섭풍(移花涉風). 내공으로 상대를 튕겨내는 유가장의 기술 중 하나였다.
눈 깜짝할 사이 회오리에 휩싸인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정확히 가격했다.
쩌엉-!!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강풍에 날아가는 꽃잎처럼 도혜가 끝없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끝없이 상승하는 그녀의 신형은 마치 구름을 꿰뚫을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격정에 차올랐다. 가문의 무공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위력을 뿜어낼 줄이야.
자신이 아는 이화섭풍의 위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손녀가 지면을 박차고 도약하기 시작했다.
타앗-!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른 아이는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뒤이어진 장면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화경의 무위를 가진 소장뿐이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는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뻐억-! 쩌억-!! 퍼퍼퍼퍽-!!!
하늘에서부터 방망이질 소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였다.
콰앙-!!!
벼락이 꽂히듯 무엇인가가 급강하하여 떨어져 내렸다.
털석-!
그것의 정체는 바로 도혜사태였다.
유설이 손에 자비를 두었던 것일까? 용케도 숨은 붙어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곤죽이 된 그녀는 벌떼에 쏘이기라도 한 듯 얼굴이 퉁퉁 불어터져 있었으며, 입안에는 이빨이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숨만 헐떡일 뿐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자신의 연인이 피떡이 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소장이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한발 늦었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버티려면 처음부터 이대 일로 싸웠어야 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그때 하늘에서 유설의 신형이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사뿐히 지면을 밟는 모습은 마치 무게가 없는 깃털 같았다.
“할배. 쟤도 맞지?”
“오냐, 따지고 보면 저놈이 가장 나쁜 놈이다!”
“알았어.”
유설이 소장을 향해 다가가자, 아미파의 원로고수들과 교관들이 지원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젊은 비구니들은 감히 낄 생각도 못 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반면 훈련장에서 탈출한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조금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쯧쯧.”
유진산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이후의 결과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죄다 몰려왔다면 모를까. 자신의 손녀는 이미 이곳의 전력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후환을 남겨 둬선 안 되겠지.’
그에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유설이 그들을 덮치고 있을 무렵. 유진산은 쓰러져 있는 도혜사태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마디를 겨우 토해냈다.
“……음괴?”
유설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다. 강호에서 이토록 가공할 무력을 지닌 여자아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무리 음괴라 한들 자신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리라. 지금 벌어진 상황이 마치 꿈만 같다는 표정이었다.
“곰 같은 할망구인 줄 알았더니,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구나. 그럼 나는 누구인 것 같으냐.”
무엇인가를 불현듯 깨달은 그녀가 유진산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양괴……. 그동안 나를 잘도 속였겠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그간 소장하고 눈이 맞아서 죄 없는 아이들을 괴롭혔으니, 이제는 죗값을 치러야지.”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통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유진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저 아이들을 빼돌리면 중원의 미래는 없어.”
도혜사태가 의미심장한 말로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지만, 더는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거북스러웠다.
“중원이고 뭐고 간에 내가 알 바 아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너희들을 무너트려 주마. 이 일과 연관된 정파의 쓰레기 같은 연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모조리 씨를 말려주겠다.”
“……잠, 잠깐.”
그녀가 무엇인가를 반론하려 했지만, 더는 들어야 할 내용이 없을 듯했다.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턱과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먼저 지옥에 가서 구경이나 해.”
우드득-!!
일을 마치고 일어서자 손녀의 싸움도 거의 정리가 되어 가는 듯했다.
아미파의 원로들과 교관들은 모두 널브러져 있었으며, 소장만이 홀로 서서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오랜만에 몸을 풀게 되었으니 그냥 쓰러트리기엔 아쉽겠지.’
이미 손녀의 성향을 훤히 꿰차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그는 유설에게 농락당하는 소장을 뒤로한 채 쓰러진 자들에게 다가갔다.
이어서 그들의 목을 한 명 한 명씩 꺾어버리기 시작했다.
* * *
상황이 모두 정리되자 남은 것은 젊은 비구니들뿐이었다.
“할배, 저 언니들은 어떻게 해?”
유설의 한마디에 여승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아미파의 장로들과 전대에 활동한 원로들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당했다. 아니, 그들이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사문의 어른들이 죽었지만, 복수보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앞섰다. 객기를 부리다가 무의미하게 죽기엔 억울한 나이들이었으니까.
“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뒷짐을 진 유진산이 근엄한 표정으로 다가가자, 유설이 왼쪽에서 호위무사처럼 따라붙었다.
“음. 그럼 너희들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 말해 보거라.”
“그, 그건…….”
원로들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죄를 저지를 틈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유진산은 젊은 여승들의 처분을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미파가 무림맹주의 사문인 것을 생각하면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저들은 자신과 손녀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았으며, 죽을만한 죄를 지은 것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눈앞에서들 사라지거라. 그리고 만에 하나 우리를 따라오려거든 목숨을 걸어야 할 게다.”
“…….”
살려는 주겠지만, 미행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였다.
겁도 없이 그 말을 어기려는 비구니는 없었다. 유설이 미행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터였으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구니들이 쏜살같이 금각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주지스님이 다가와 유진산에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어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란 것들 이미 눈치챈 듯했다.
유진산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스님께서 저희를 숨겨 주셔서 시간을 벌어 주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모두 부처님의 뜻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스님. 혹시라도 못된 비구니들이 찾아와 괴롭힐까 염려됩니다. 저희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을지요?”
“아미타불. 그저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미파에서도 같은 승려들에게는 해코지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어서 하산하십시오. 시주님들께서 이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저희가 더 난처해집니다.”
주지스님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곧이어 스님들과 작별을 고하고는 아이들과 함께 금각사를 떠났다.
하산이 시작된 후, 유진산과 손녀는 대열의 선두에 서서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 전에 보니 대단하더구나, 아가. 모든 힘을 모두 쏟아부었던 거지?”
“아니 반만 썼어. 항상 반절은 숨겨 두라며.”
고작 반절의 힘으로 아미파의 원로들을 초토화하다니. 유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잠시 놀라 있던 유진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잘했다. 이제부터는 무림맹에서 우리를 몹시 경계할 테니, 더욱 조심해야 해.”
“알았어. 할배, 근데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선두에 있던 유진산이 뒤를 쓱 돌아보았다.
훈련장에서 탈출한 삼백여 명의 아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유설을 부르러 갔던 청풍도 보였다.
이미 생각해 놓은 곳이 있다는 듯, 그가 인자한 미소로 행선지를 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