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미산의 아이들 (1)
손녀가 폐관수련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유진산은 홀로 미뤄뒀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원강대사가 남겼던 마지막 한마디.
아미산에서 길러지고 있을 다음 기수의 창룡대원들을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마침 사마현의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여기도 아닌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 어딘가.
유진산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며칠째 아미산을 헤집고 다녔음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정상으로 향하는 금정봉의 주변뿐.
아미파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은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이걸 어찌한다.’
유진산의 시선이 아미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구름을 뚫고 치솟은 산봉우리는 높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장엄했다.
고민하던 그는 결심을 굳히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미파에 잠입할 것도 아니고, 주변만 조사하는 정도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출입을 불허한다는 푯말이 곳곳에 보였지만, 신경 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기척을 죽이고 전진하길 일식경.
그의 감각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여승들을 감지했다.
아미파의 어린 제자들로, 제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수준들이었다.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타앗-!
지면을 박차고 유진산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곧이어 나무숲 위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쭉쭉 늘어져 갔다.
그가 남기는 것은 새 한 마리가 지나가는 정도의 작은 기척뿐.
역시나 그녀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은밀히 길목을 돌파한 그는 금정봉의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길가에서 벗어나자 더는 비구니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을 헤집고 다니고 있을 때였다.
‘도대체 그 어린 것들을 어디에 숨겨 놓은 거지?’
비구니들만 가득한 아미파의 내부는 확실히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터.
아무리 수색해도 성과가 없자 유진산의 마음도 답답해져 갔다.
설마 원강대사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삶을 체념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슬슬 철수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스슥-!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유진산의 귀가 쫑긋했다.
허리를 곧추세운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길 잠시 후.
“……?”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무숲을 비집고 누군가가 정신없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쫓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손녀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나무 위를 타고 넘으며 아이를 뒤쫓았다.
여승들만 가득한 아미산의 정상 부근에서 남자아이라니. 그렇다면 자신이 찾는 장소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을 터였다.
그때 귓가로 어렴풋이 작은 신음을 들을 수가 있었다.
“으윽.”
옆구리를 움켜쥔 아이의 작은 손아귀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유진산은 안광에 내력을 집중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일류고수의 움직임을 낼 정도로 자질이 굉장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너덜너덜해진 흑의 속에 언뜻 보이는 피부였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듯 온몸에 깊은 상처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어떤 쳐 죽일 놈들이 저 어린것을…….’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칫했으면 자신의 손녀도 저 아이처럼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느 순간 유진산의 고개가 뒤쪽을 향했다.
아이의 후미에서 검은빛 하나가 쏜살같이 따라붙는 모습이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경공은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타타탓-!
둘의 간격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아이도 그것을 느꼈는지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도주극은 예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눈앞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절벽에 가로막힌 소년의 등 뒤로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천천히 다가갔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아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살, 살려주세요, 교관님.”
“도망친 놈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 텐데? 너는 창룡대의 수치다.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제발…….”
아이가 사정하는 대도 흑의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유진산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 하늘에서 매 한 마리가 흑의인을 향해 내리꽂혔다.
파아앙-!!
급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흑의인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의 반응속도에 유진산은 내심 놀랐다. 비록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기습을 피해 내다니.
상대를 얕보고 힘을 조절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도망쳐 나온 놈이 또 있었단 말인가?”
“……?”
무슨 대꾸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진산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의 뒷말이 이어졌다.
“너처럼 힘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 몇 명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번호를 말해라.”
유진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옆에 있는 소년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이의 옷에는 일삼칠(一三七)이라는 번호가 자수되어 있었다.
그리고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니 상태가 위급해 보였다.
“아가, 많이 아픈 듯 보이는구나. 여긴 할아버지한테 맡기고, 물러나서 상처부터 돌보거라.”
옆구리를 움켜쥔 아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신보다 키도 조그만 녀석이 자신에게 아가라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갑자기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서러운 울음.
유진산은 아이의 반응에서 단번에 눈치챘다. 지금껏 이렇게 따듯한 말을 처음 들어보는 것이리라.
아이의 앞을 가로막은 그는 용살창을 내뻗으며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목을 휘감고 있는 용 문신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서늘한 한마디에 흑의인도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제야 훈련장에서 탈출한 아이가 아닌 것을 직감한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그 순간 유진산의 두 눈에 전에 없던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뿌드득-!
창을 움켜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네놈들의 손에 멸문당한 유가장의 가주가 바로 나다.”
“……?”
더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그는 용살창을 꼬나쥔 채 다짜고짜 그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그간 손녀의 무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유진산의 무공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땅을 차고 오르며 그의 가랑이를 양단할 듯 다가갔다.
흑의인의 검날도 다급히 하단으로 움직이며 검기를 뿜어냈다.
쩌엉-!!
일합을 마주함과 동시에 흑의인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압도적인 내공 차이.
거기에 무공의 수준에서도 차이가 완연했다.
미리 격돌의 결과를 예측했던 유진산은 상대에게 쏜살같이 달라붙었다.
전투가 길어지면 또 다른 적이 합류할 수도 있을 터. 속전속결로 끝내야만 했다.
타앗-!
지면을 박찬 그의 신형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고 있는 듯했다.
유가살풍창 구 초식 맹룡승천세(猛龍昇天勢).
유설이 펼칠 때의 위력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쩍 하고 벌어진 용의 아가리가 흑의인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써컥-!!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유진산의 공격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움켜쥔 창끝이 회전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유가살풍창 사 초식 추혼일섬(追魂一閃).
푸우욱-!!
밝은 빛이 번뜩이는 순간, 용살창의 자루가 흑의인의 몸을 반이나 관통해 있었다.
이후 유진산의 왼쪽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쩌억-!!
창에서 떨어져 나간 그는 이 장 밖에서 볼품없이 뒹굴었다.
이미 숨이 끊겼는지 비명조차 없었다.
전투를 마무리한 유진산은 재빨리 등 뒤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야, 어서 눈을 떠 보거라.”
부상 때문일까? 조금 전보다 상세가 더 안 좋아 보였다.
유진산은 단번에 직감했다.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옆구리의 상처를 보니 신의 화타가 오더라도 살릴 수가 없어 보였다.
몸속에 진기를 넣어 주자 아이의 정신이 잠시나마 돌아왔다.
“……너무 무서워요.”
“걱정하지 말거라. 할아버지가 처리했으니, 어서 내려가자꾸나.”
아이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친구들이 남아 있어요.”
“어디인지 얘기해 주거라. 내 힘이 닿는 대로 구해주마.”
아이의 검지가 부들부들 떨리며 어딘가의 방향을 가리켰다.
“폭포……. 그리고…… 동굴…….”
그것을 끝으로 아이의 손이 턱하고 떨어져 내렸다.
기어코 숨이 끊어진 것이다.
“후…….”
안타까운 상황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왠지 모를 분노에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메어왔다.
그는 흑의인의 시신을 절벽 아래로 집어던진 이후, 아이를 업고 달렸다.
* * *
유진산의 모습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가슴에 각인된 일삼칠의 숫자.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한 것이다.
그의 앞에는 아담한 봉분 하나가 볼록 솟아 있었다.
손녀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름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왠지 묻어줘야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편히 쉬거라. 지옥 같은 세상이었겠지만, 그래도 안고 떠날 수 있는 좋은 추억 하나쯤은 있었기를…….’
유진산은 씁쓸한 미소로 봉분 위에 꽃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이어서 발걸음을 돌리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짓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선 아이가 말한 장소부터 확인해 봐야 할 터.
‘폭포와 동굴이라.’
단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방향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머지않아 그는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작은 계곡을 찾아낼 수 있었다.
폭포 안쪽을 살펴보자 어딘가로 이어진 동굴이 보였다
근처에 용살창을 잘 숨겨 놓고는 은밀히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듯했다.
밖으로 빠져나오자 거대한 분지가 나타났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구성된 훈련장.
그곳에서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두 패로 나뉜 아이들이 진검을 움켜쥔 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오백여 명쯤은 되어 보이는 규모였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처절한 모습에 유진산은 할 말을 잃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싸워라! 손속에 자비를 두는 녀석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냉큼 달려가 교관들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전력이 파악되지 않았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전체 인원에서 일할 정도가 쓰러지자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정지하는 움직임.
아이들은 훈련된 군인들처럼 대열을 맞춰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투가 벌어졌던 그 자리에는 오십여 구의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끌려 왔었단 말인가.
원강대사의 말대로라면 끝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아이들만이 창룡대원이 될 터.
잔혹한 훈련방식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파의 이름으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니.’
유진산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은밀히 자리를 이동했다.
아이들과 합류하여 가까이서 알아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