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군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2)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붓대를 내려놓은 유진산은 잠시 등을 돌렸다.
사마현의 시야를 가린 채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복주머니였다.
안에는 두 개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룰 성(成)과 말씀 언(言)이라니.’
만호가 천기를 누설해 가면서까지 적어줬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에 어떤 걸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래시계는 이미 절반도 남지 않았으며, 그럴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둘 중 하나를 찍는다면 확률은 절반.
그의 고민이 절정에 이를 때였다.
- 나는 뭔지 알 것 같아.
유설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붓대를 집어 손녀에게 건네주었다.
틀리더라도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래,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니 네가 한번 골라보거라.
어차피 정답은 사마현만이 알고 있을 터.
이제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붓대를 움켜쥔 손녀가 종이에 글자 하나를 천천히 새겨 넣었다.
‘이룰 성(成)?’
그 순간 지켜보던 사마현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뭔가 의미가 있는 글씨인 것은 맞는 모양이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것으로 결정하였으면, 붓을 내려놓거라.”
“아직 다 안 썼어요.”
유설은 붓대를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이룰 성(成) 앞에 문자를 하나 더 새겨넣고 있었다.
스윽-! 스으윽-!
그것은 바로 말씀 언(言)이었다.
두 개가 합쳐지자 정성 성(誠)이라는 문자가 완성되었다.
그 순간 유진산의 얼굴이 밝아지며 손뼉을 ‘탁’ 부딪쳤다.
‘정성 성이라. 이것은 말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정성스러움에서 생성된 뜻이다.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마현에게 있어서는 참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구나.’
그는 일평생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해 본 적이 없는 성품으로 유명했다.
사마현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본디 사람이라면 거짓이 없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이지. 그래서 내 너희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사람이 되지 못한 자들이 절세신공을 익히도록 도와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말뜻은 시험에 통과했다는 의미였다.
유설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무공비급을 해독해 줄 거예요?”
“그래, 처음 약속한 대로 너희들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 말이다. 하지만 모래시계가 끝날 때까지 어느 정도나 가능할지는 모르겠구나.”
그 말은 모래시계가 끝난다면 번역을 멈추겠다는 의미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가 약속한 시간은 모래가 모두 떨어지기 전까지였으니.
또다시 자신들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벌써 이곳에서 열흘 이상을 허비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급해진 유진산은 슬쩍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남아 있는 모래의 양은 고작 손톱만큼도 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그 순간 유진산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설마?’
자세히 살펴보니 모래가 정지하여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모래가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는 것이 아닌가.
옆을 바라보니 유설이 한 손을 살며시 내뻗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자신은 흉내도 내지 못할 기술이었다.
“이제 시간은 충분해요, 할아버지.”
말을 마친 유설은 내공으로 모래시계의 통로를 녹여서 막아버렸다. 더는 모래가 떨어지지 못하도록.
“…….”
사마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때 유진산이 손녀에게 잘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이후 다시 사마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일평생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번복한 적도 없다고 말이지요.”
그 말뜻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할 사마현이 아니었다.
모래시계의 시간이 끝날 때까진 시간을 할애하여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설이 저렇게 모래를 틀어막을 줄은 그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사마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껄껄 웃음을 토해냈다.
“허허,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구만. 그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서도, 몇 날 며칠을 앉아서 기다리기만 했단 말인가? 지혜가 있고, 인의가 있고, 겸손이 있으니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겠구나.”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더는 시험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마현은 다시 비급을 건네받아 본격적으로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불문사자신공이라…….”
* * *
유진산과 손녀는 사마현의 초가집에서 함께 지냈다.
그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곁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할 일이었다. 귀중한 비급을 맡긴 채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으니까.
유진산은 텃밭의 일을 도왔고, 유설은 안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내 무예를 익히는 사람은 아니다만, 해독할수록 정말 큰 힘이 느껴지는 비급이로구나.”
“무슨 힘이요?”
“여기엔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 쓰여있다. 여러 제약조건이 있지만, 익힐 수만 있다면 세상을 움직일 힘을 얻게 되겠지.”
“와아…….”
유설은 입까지 벌리고 좋아했지만, 사마현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시질 않았다.
“이대로 네게 이걸 해독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구나.”
“왜요?”
“혹시라도 네가 악한 마음을 먹고 세상을 피로 물들인다면? 너는 이 무공을 익혀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
유설이 진지한 얼굴로 밤톨 같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 할배를 지켜주고, 세상에 정의를 보여줄 거예요.”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사마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폭소를 터트렸을 것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유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얼굴. 그리고 맑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사심과 거짓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사마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꿈에서 작은 별 하나가 달빛의 기운을 받아 눈부시도록 빛나는 것을 보았다. 현장법사의 안배가 내게 닿은 것은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운명인 듯하구나.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그렇지 않아도 내심 불안했었던 아이였다.
고민거리가 해결된 유설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허허. 그럼 지금까지 해독한 내용을 같이 살펴보자꾸나.”
“네.”
사마현은 번역을 끝낸 종이들을 펼쳐 보이며,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사람은 본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다섯 가지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지.”
“오감 말이에요?”
“그래, 잘 아는구나. 이것에 통달한 자는 마음의 감각인 의식(意識)이 열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하는 이 경지를 무림에서는…….”
“화경!”
사마현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너는 이미 여기까지는 도달한 듯하구나. 제6식(第六識)이 의식이라면, 제7식(第七識)의 감각은 말나식(末那識)이라는구나. 이 단계가 되면 우주 속에서 자아의 정신 의식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보지 않아도 볼 수가 있고, 듣지 않아도 들을 수가 있지.”
“그럼 먹지 않아도, 맛을 느낄 수 있어요?”
“음.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이 비급에서는 그렇다는구나. 요약하자면 화경의 극(極)을 이룬 경지이지.”
“그럼 다음 단계도 있어요?”
사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최종 단계인 제8식(第八識)은 말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잠재의식인 아라야식(阿羅耶識)이다. 이 감각이 열리면 삼라만상의 근본에 통달하여, 인간의 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경지인 현경(玄境)에 이르는 게지.”
“현경이요?”
“그래. 이 불문사자신공에는 제8식에 이르는 구결과 수련법이 적혀 있구나. 네가 이 무공을 익힐 수만 있다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다는 얘기지.”
“……와아. 근데 그다음은 없어요?”
사마현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가장 밑에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비록 이론상이지만 불문사자신공의 화후가 극에 달하면, 희박한 확률로 제9식인 여래식(如來識)의 감각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는구나. 스스로가 곧 부처가 되는 경지이지.”
“빨리 수련해서 나도 부처가 되고 싶어요.”
사마현은 인자한 미소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지금부터 할아버지가 도와주마. 내가 비록 무림고수는 아니지만, 구결을 쉽게 풀어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게다. 목표는 제8식인 아라야식, 즉 현경이다.”
* * *
사마현의 거처에 머무른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유설은 그의 곁에 붙어서 비급의 구결을 이해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해도가 높을수록 수련의 기간이 비약적으로 짧아질 테니.
그리고 유진산은 오늘도 텃밭에서 나물을 캐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의 팔자는 변하지를 않는구나. 노인을 이리도 부려먹다니.”
지내는 동안 굳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모든 사연을 사실대로 말해주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르신, 그것 좀 던져 주십시오!”
무뚝뚝했던 사마현의 호위무사가 지붕 위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동안 미뤄 놓았던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리라.
유진산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망치를 휙 집어 던졌다.
“옜다!”
휘리릭-!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망치는 정확히 그의 손아귀에 안착했다.
터업-!
유진산은 시선도 주지 않고, 다시 나물을 캐는 일에 집중했다.
“내 새끼 먹일 거만 아니었으면, 확 다 파헤쳐버리는 건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밭일을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입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손에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손녀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곳에서 신세를 지는 동안 누군가는 일을 도와주어야만 했다.
밭일을 마친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나물과 채소를 능숙하게 씻어댔다.
“최고의 맛은 자연에서부터 오는 법이지. 오늘은 특별히 우리 가문의 비법을 사용할 테니, 기가 막힐 게다.”
부엌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유진산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름과 향신료에 나물을 볶고, 두부를 졸이다 보니 음식들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준비가 마무리되자 그는 밥상을 들고 마루로 나갔다.
향긋한 냄새에 지붕을 손보고 있던 중년인이 극찬을 보냈다.
“대단하십니다, 어르신. 냄새가 아주 좋습니다.”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어서들 모셔오너라.”
잠시 후 머리를 맞대고 앉은 넷은 여느 때처럼 젓가락을 들었다.
사마현은 평상시와 다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려. 이렇게 농익은 손길에서 나오는 깊은 요리를 맛보는 것도.”
“……설마 비급의 해독이 끝난 것입니까?”
눈치 빠른 유진산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확신했다.
대답은 옆에 있던 유설이 대신했다.
“응, 다 끝났대. 이제부터 불문사자신공을 익힐 수 있어.”
유진산은 사마현을 향해 연신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나는 단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어쩌면 내가 이날을 위해 학문을 닦아온 건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절세신공만 익힌다면 이제 손녀가 무림의 지존 자리를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서러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속세를 떠난 노인이 필요한 게 뭐가 있겠소. 그보다 수련할 장소는 생각해 두시었는지요?”
“장소라면…….”
사마현이 천천히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며 답했다.
“불문사자신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곳에서 무아지경에 빠져들어야 하지요. 마침 이 뒷산에 적당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폐관수련을 할 만한 장소를 찾기가 어찌 쉽겠는가.
하지만 잠시 손녀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기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구결을 통한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기에 예측할 수 없습니다. 고작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수도 있지요.”
유진산은 잠시 손녀와 두 눈을 마주쳤다.
천성적으로 수양을 통해 강해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아이였다.
이미 각오를 마친 듯 유설의 두 눈에선 깊은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할배. 나 금방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