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군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1)
다시 길을 나선 유진산과 손녀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였다.
“아가. 아까 만난 만호 아저씨 어떤 것 같아?”
“좋은 사람이야.”
유설은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처음 봤을 때는 나쁜 사람 같다며?”
그 순간 손녀의 두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그건 눈을 이렇게 무섭게 뜨고, 남의 집에 불을 질렀으니깐. 근데 잡아서 때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래. 만약 앞뒤 안 가리고 나섰으면 우리가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는 법이다.”
“할배처럼?”
“오냐. 아무리 힘이 천하장사라도 시야가 좁으면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가 없는 게지. 할아버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응. 나도 꼭 큰 사람이 될 거야.”
모처럼 손녀에게 교훈을 주었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마음도 훈훈해졌다.
산뜻한 봄바람에 실린 둘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길 한 시진.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남에서 출발하여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찰나처럼 지나간 듯했다.
경공을 멈춘 유진산이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가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둘은 인적이 드문 마을의 외곽으로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정보대로라면 이 길의 끝에 사마현의 거처가 있을 터.
“그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야?”
“할아버지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쉽지 않은 인물인 것은 분명해.”
“왜에? 싸움을 잘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우리 설이가 옆에 있는데.”
“그럼?”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유진산은 자신의 고민을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다.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였지만, 지금은 세속에서 벗어났기에 사람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다더구나. 게다가 거짓말을 혐오하고, 황소처럼 고집이 세서 사마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지.”
“……그럼 내 무공비급을 해독해주기 싫다면 어떡해?”
“할아버지도 그자와는 수 싸움으로 이길 자신은 없어. 그래도 뭐든 방법이 있겠지. 일단 부딪쳐 보자꾸나.”
어느새 눈앞에 낮은 목책으로 둘러진 한적한 초가집이 나타났다.
이름난 학자의 거처치고는 무척 검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입구에서는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앞마당을 쓸어대고 있었다.
쓰으윽-! 쓰으윽-!
절도있는 움직임. 그리고 빗자루가 나아가는 경로는 흡사 검로(劍路)처럼 예사롭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완연했다.
아마도 사마현의 호위무사이리라.
“……현인께서 지금 안에 계신지요?”
학문을 닦는 자들에게 있어서 현인(賢人)은 최고의 존칭이었다.
유진산이 예우를 갖추어 말을 건네었지만, 돌아온 것은 정적뿐이었다.
무사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빗자루만 움직여댔다.
쓰으윽-! 쓰으윽-!
시작부터 무시를 당하다니.
성질 같아선 확 잡아채고 싶었지만, 힘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간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고집이 센 사람이니만큼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테니.
유진산이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손녀가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 마당이 깨끗한데 왜 계속 쓸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그자는 낙엽 하나 없는 바닥을 끊임없이 쓸어대고 있었다.
마치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의 행동이 의아할 수밖에.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삶의 경험이 많은 유진산이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내용을 손녀에게 속삭여주었다.
“세상만사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마도 마음을 쓸고 계시는 것 같구나.”
“마음을?”
“응. 마음이 깨끗해지면 번뇌와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평행상태를 이뤄 참된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가 있는 법이지.”
유진산의 중얼거림 때문이었을까? 돌연 그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평범한 애들은 아니로구나. 어르신께서 바쁘시니 오늘은 돌아가거라.”
그의 입을 열게 한 것은 나름의 소득이었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축객령이 떨어진 이상 무작정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조손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발길을 돌렸다.
문지기를 통과하는 것조차 이리 힘겨울 줄이야.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할배, 힘내. 오늘은 바쁘다니까, 내일 다시 가면 만날 수 있어.”
“아니다. 저리 나오는 걸 보면 내일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럼 어떡해?”
유진산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답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지. 유비도 제갈량의 마음을 얻으려고, 세 번이나 찾아가 간청했다더구나. 이처럼 계속 찾아가 진정성을 보여주면, 귀찮아서라도 만나주지 않겠느냐.”
일단은 계속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른 방도도 없지 않은가.
그때 손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근데 유비가 누구야?”
“따지고 보면 우리 가문의 조상님이기도 하지. 아, 그러고 보니 굳이 할아버지가 알려줄 필요가 없겠구나.”
“으응?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지금 네 뒤에서 수염 쓰다듬고 있는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봐. 그분의 의형제니까.”
할아버지의 농담에 유설이 뒤를 쓱 돌아보았지만, 바람만이 휭 불어닥칠 뿐이었다.
“힝.”
유진산은 한참을 말없이 웃었다.
요즘 손녀를 놀려 먹는 재미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좋다. 일단 객잔에 방부터 잡자꾸나. 가서 할아버지가 의리 넘치는 촉나라 삼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정말? 재밌겠다. 빨리 가자, 할배.”
그렇게 조손은 인근 마을의 객잔에서 하루를 묵었다.
* * *
이튿날 아침.
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사마현의 거처를 방문했다.
예상대로 이날도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성과가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슬슬 조손의 인내심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삼고초려는 세 번 아니었어? 우린 벌써 여섯 번째야.”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오늘은 할아버지 혼자 다녀오마. 이번엔 결판을 내야겠어.”
“아니야, 나도 같이 가.”
할아버지와 손녀는 이미 이체동심(異體同心)이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둘이 힘을 합쳐 난관을 헤쳐오지 않았던가. 굳이 따라오겠다면 유진산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조손은 비장한 발걸음으로 다시 초가집을 방문했다.
“오늘은 현인께서 시간이 되시는지요?”
입구를 지키는 녀석의 반응은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어르신께서 좀 바쁘시니 오늘은 돌아가거라.”
어제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
그러나 이제는 유진산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럼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바쁘신 용무가 끝나면 말씀해주십시오.”
“…….”
마당을 쓸던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진산과 유설은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치 영겁처럼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 왜 따라왔어? 나 혼자 온다니까.
오랜 시간 미동조차 안 하는 손녀가 걱정되어 말해본 것이다.
할아버지의 전음을 받은 유설은 두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 할배 심심하잖아.
-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몰라. 힘들면 먼저 돌아가도 돼.
- 아니야. 난 이 자세로 열흘도 있을 수 있어.
이미 유설의 집중력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열흘이 아니라 무한정 버틸 수도 있을 터.
오히려 문제는 유진산이었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운기조식이라도 하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겠지만, 안전하지 못한 이곳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유설처럼 자유자재로 운기행공(運氣行功)을 조절할 수 있는 경지라면 모를까.
유진산은 무아지경에 접어든 손녀를 부럽다는 시선으로 쓱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도 최대한 버텨 보마.’
유진산은 참선하는 스님의 마음으로 바람결에 마음을 맡겼다.
다음 날이 되어도. 그리고 또 다음 날도 조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흘째 날부터는 마당을 쓸던 호위무사의 표정이 달라졌다. 자신도 버틸 수 없는 기간을 어린아이들이 넘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흘째가 되던 날.
유진산은 그자가 바짝 다가와 자신들을 살펴보는 기척을 느꼈다.
‘아직 안 죽었다, 이놈아.’
그는 자신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시시때때로 와서 확인하고 갔다.
그렇게 닷새째가 되던 날이었다.
“어르신께서 일각의 시간이 남는다고 하시는구나.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니 서두르는 게 좋아.”
열흘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고서 고작 일각 안에 용무를 끝내야 한다니.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불평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 되었다. 일어서거라, 설아.”
유진산은 우선 굳어진 몸부터 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그때 자리를 털고 일어선 손녀가 졸린 눈으로 기지개를 켰다.
“하암. 우리 들어오래?”
우주의 흐름 속에서 수양했던 탓이었을까? 유설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초췌해진 자신과는 다르게 혈색이 더욱 좋아져 있었다.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앞장섰다.
“그래, 어서 들어가자.”
끼이익-!
호위무사는 초가집의 문을 열어주고는 뒤로 물러섰다.
안에서는 한 노인이 정신없이 붓대를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의 붓대는 마치 물을 헤집고 다니는 물고기처럼 생명이 살아 넘쳤다.
타악-!
붓대를 내려놓은 사마현이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된 유진산은 흠칫했다. 그의 눈에서 절대고수의 정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인의 모습에서 어떻게 이런 풍채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얼마나 많은 배움과 깨달음이 있어야 이렇게 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유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그때 사마현이 탁상 위의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말했다.
“그래. 이 모래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는 너희에게 내 시간을 할애해주마. 무슨 연유에서 노부를 보자고 했느냐.”
유진산이 미리 준비해온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을 꺼내 건네었다.
“이 책의 해독이 가능하시겠는지요? 고대 범어입니다.”
서적을 살펴보던 사마현은 심상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장이 천축에서 훔쳐 온 절세신공이라니……. 내 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아니다만, 범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이것을 어떻게 얻었지?”
“숭산에서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는 살펴보던 비급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이것을 해독하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하나의 행동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겠지. 너희들이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그 재앙은 누가 감당해야 하지?”
유진산은 모래시계를 슬쩍 한 번 바라보았다.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저희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껏 인의(仁義)에 어긋나는 짓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순간 사마현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거짓으로 포장하려 했다면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으니, 네게 한 번의 기회를 주마.”
“……?”
어리둥절한 유진산의 앞으로 붓대와 종이 한 장이 내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 하나를 거기에 적어 보아라.”
수만 개의 한자(漢字) 중에서 한 개를 골라야 한다니.
유진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회는 오직 단 한 번뿐.
게다가 그는 한번 내뱉은 말을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곧 틀린 답을 적으면 그것으로 끝이란 얘기였다.
‘가장 중요한 한 글자라니. 그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텐데? 가치관이 자신과 같아야만 도와준단 말인가?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붓대를 움켜쥔 손목은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느새 모래시계는 절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보통 학자들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지. 그렇다면 인(人)? 음. 아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선 먼저 도리를 알아야겠지. 그렇다면 도(道)를……. 아니 그것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인 애(愛)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어.’
말을 이어가다 보니 도무지 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붓대를 꺾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손녀의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 할배, 만호 아저씨가 준 주머니 열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