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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09화 (109/238)

109화 장군님 지나가신다 (3)

“끄으으…….”

이미 눈이 까뒤집어져 흰자만 보이는 것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주의 상황이 이러한데 다른 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숨을 거둘 것만 같았다.

그들을 노려보던 유진산도 노기가 좀 풀렸는지 살며시 손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이런 못난 놈들에게 네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유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단지 이곳으로와 육성으로 고함을 한마디 내질렀을 뿐.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 우린 나가자꾸나. 여기서부턴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유진산은 손녀의 손을 붙잡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뒷일은 굳이 보지 않더라도 눈에 훤했다.

이곳을 지키는 무사들은 전멸했고, 신 제자들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한에 사무친 중년인이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터.

그를 말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할배.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 그런 모습 처음 봐.”

“그야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랬지. 그럼 우리 설이는 왜 그랬던 거야?”

“나는……. 할배가 화내니깐, 나도 막 화가 났어.”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녀가 분노했던 이유가 항아리의 내부를 봤던 것이라 짐작했지만, 시야가 가려 거기까진 못 본 모양이었다.

“그럼 그놈들에게 왜 그랬냐고 소리쳤던 건 뭐야?”

“그건 우리 할배를 왜 화나게 했냐고 물어본 거야.”

유진산은 황당한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하는 손녀의 마음이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녀석 참.”

조손은 장원 근처에서 숨겨놓은 짐을 회수하고 있었다.

유진산이 손녀의 등에 봇짐과 창을 묶어주고 있을 때였다.

“근데, 할배.”

“왜?”

“그 항아리 안에는 뭐가 들어 있었어?”

“음. 알려고 하지 말거라. 너는 모르는 게 좋아.”

어른이 감출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게 아이의 심리였다.

“궁금해, 궁금해! 빨리 말해줘.”

유설이 떼를 쓰고 나왔지만, 유진산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네가 좀 더 크면 그때 가서 얘기해주마.”

“언제는 우리 설이 다 컸다며. 안 알려주면 나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말을 마친 손녀가 슬며시 턱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키가 할아버지보다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에게 들려주기에는 내용이 조금 잔혹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뭐 도움이 되는 것도 있겠지. 강한 마음을 심어 주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세상이니까.’

대신 내용을 조금 순화해서 전달해주는 것으로 스스로 타협했다.

유진산은 나무 아래로 깔린 그늘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래, 정 원한다면 들려줄 테니 잠시 앉아 보아라.”

유설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돌변할까 재빨리 옆에 앉아 팔짱을 꼈다.

“궁금해. 빨리 말해줘~”

“할아버지가 딱 너만 할 때 삼촌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그러니까 너의 종증조부(從曾祖父)가 되시는 분이지.”

“할아버지의 삼촌?”

“그래. 네 아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셨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신기가 좀 있으셨다더구나. 할아버지를 참 예뻐했지.”

집안의 얘기를 들려주자 유설이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까르륵거렸다.

“히히. 할배가 귀여웠나 봐.”

과거를 회상하던 유진산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녀석. 잠시 뒤에도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어쨌거나 무속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사악한 술법이 존재한다고 했다.”

“술법?”

“그래. 영험함이 떨어진 무속인이 악한 마음을 먹고, 아이를 훔쳐와 나무통에 가둬두는 경우가 있다더구나.”

“어떡해…….”

“그 이후에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쫄쫄 굶기는 게다. 아주 피골이 상접하도록 말이지.”

조금 전까지 미소짓던 유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두운 곳에 혼자 갇혀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너무 무섭겠다. 배도 고프잖아…….”

“그뿐만이 아니다. 먹을 것을 줄 듯 말 듯하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는 게지. 그러다 보면 아이는 영기가 상하고, 먹을 것에 아주 강한 집착을 보이게 된다더구나. 그러다 죽기 직전에 맛있는 음식을 보여주면 집념이 생겨 그것을 잡으려 하는데, 그때…….”

“그때 뭐?”

유진산은 순간 흠칫했다.

손녀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서렸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그는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음식을 움켜쥐려는 찰나에 찔러서 죽인 후 뚜껑을 닫으면 그 상태로 염매(厭魅)가 된다더구나. 이후에는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속박되어 노예로 부려지는 게지.’

하지만 사실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음식을 실컷 먹게 해주면, 결국엔 배가 볼록 나와서 죽는다고 하더구나.”

전해지는 속설의 내용을 순화해서 말해주었지만, 유설은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용서 못 해.”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다 끝났을 테니까.”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진산이었다.

어떠한 성인군자라도 그 상황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나올 리가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끝났어.”

“그게 무슨 소리야?”

유진산은 손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나왔던 장원의 입구.

그곳에서 중년인의 무속인이 항아리를 움켜쥐고 절뚝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저 아저씨, 아무도 안 때리고 그냥 나왔어.”

유설의 감각이 그렇게 느꼈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설마 그 몹쓸 놈들을 용서해준 것인가?’

당사자인 그에게 맡겨두고 그냥 나온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그자는 정확히 자신과 유설이 쉬고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삼 장으로 가까워진 그 순간이었다.

털썩-!

돌연 무릎을 꿇은 중년의 무속인이 자신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유진산과 손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또 한 번 읍을 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다짜고짜 어르신이라니? 자신이 반로환동한 노인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눈치챘군. 젊은 친구가 신기가 대단해.”

“그것도 모르면서 어찌 제가 무업(巫業)으로 밥을 빌어먹고 살겠습니까.”

유진산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그동안에는 미신이라고 치부하여 믿지 않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이 흔들리는군. 어쨌거나 왜 그냥 나오셨는가.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참 원망스러울 텐데 말이야.”

“어찌 원통하고 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나온 것입니다. 만약 제가 저들을 용서할 마음이었다면, 모두 죽였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아서 살려줬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는 대답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설을 향해 읍을 했다.

뒤에 있는 장군신이 그는 가엽게 봐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이의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다른 무속인들처럼 나쁜 영향을 받지는 않는 듯했다.

“관우 장군께서 저들이 모시던 잡신들을 언월도로 베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력을 잃고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비록 죽지는 않겠지만, 이제부터는 악귀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자네 말대로라면 이제부터 악업의 대가를 치르겠구만.”

“예. 대대손손 악귀들에게 시달릴 테니,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니 나도 속이 참 후련하군. 아이를 찾았으니, 자네도 따로 할 일이 있겠지.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보시게.”

그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머뭇거렸다.

“저 어르신. 제 이름은 만호라 합니다. 제가 사는 곳도 이 마을에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식사 한 끼 대접할 기회를 주시지요.”

“보답을 바라고 개입한 일이 아닐세. 지나가던 길에 천하에 때려죽일 놈들을 보게 되어 손봐준 것일 뿐이니까.”

“저처럼 신을 모시는 자는 은혜를 갚지 못하면 업으로 남게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은가.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도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 * *

만호의 집은 작은 신당 하나와 쓰러져가는 낡은 대청. 그리고 부엌이 전부였다.

그의 형편이 녹록지 않은 이유는 모든 재산을 팔아 무공을 익히는 데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조손은 경건한 마음으로 만호가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누군가와 중얼거리는 모습이 기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울고, 웃고 하던 그는 한 시진이 지나서야 일을 마쳤다.

이제야 모든 것을 털어버렸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엔 전에 없던 생기가 감돌았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드십시오.”

부엌 맡에 차려진 소박한 밥상에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찬은 많지 않았지만, 유설은 입맛에 맞는지 아주 맛있게 먹어댔다.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진산이 젓가락을 움켜쥘 때였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제 아이를 하늘로 잘 올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게. 어쨌거나 자네에게 있었던 일은 정말 유감이네. 이제 지난 일은 모두 털어버리시게. 아들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무속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윤회의 한 과정이고, 제 아들과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암, 그래야지.”

그때 만호가 유진산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르신 또한 저처럼 기구한 일을 겪으셨군요. 위로받아야 할 것은 제가 아닌 듯싶습니다만.”

“……음. 그것을 알아채다니, 정말 놀랄 일이군. 혹시 내 뒤에도 귀신 같은 게 보이는가?”

손녀가 옆에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사정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원통히 죽은 자식들이 곁에 있을까 하여 물어본 것이다.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원귀가 되어 어르신을 따라다녔을 테지만, 손녀분의 뒤에 계신 장군께서 그분들을 모두 천도시켜주셨습니다.”

“정말 다행이구만……. 근데 내 자네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유진산은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관우 장군이 뒤에 있다면서 왜 우리 설이는 신기가 없는 것인가. 얘는 잘 못 맞추는 것 같은데?”

만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장군님은 남의 사주나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품격과 위엄을 갖춘 분이시기에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의 몸에 들어가지 않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뭐하러 우리 손녀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단지 보호하고 계실 뿐입니다. 만약 전쟁터에 나가면 화살이 알아서 피해 갈 것입니다.”

“용한 점쟁이인 줄 알았더니 아주 어른을 가지고 노는구나.”

“하하. 믿지 않으시면, 저도 설명드릴 방도가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편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만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것은 무려 십 년 만의 일이었다.

아들을 올려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살기가 그득했던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손녀에게는 뭐가 보이는가. 분명 크게 될 것은 확실한데, 나중에 커서 뭐가 될지 궁금해서 그냥 물어보는 걸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군께서 떡하니 서 계시는데 저 따위가 어찌 감히 점을 치겠습니까. 짐작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거대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뿐입니다.”

“그럼 나는?”

만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품속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래도 어르신은 조금 보이는군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가까운 시일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히실 겁니다. 그때까지 꾹 참으셨다가 이 주머니를 열어보십시오.”

아주 가벼웠기에 내용물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관이라니? 도대체 이 속에 넣은 것이 뭔가.”

“저도 모릅니다. 점괘가 나온 대로 적어넣었을 뿐. 어쨌거나 그건…….”

무엇인가 대답하려던 만호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온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네 어딘가 좀 안 좋아 보이는군.”

“으윽……. 신경 쓰지 마십시오. 천기를 누설하면 벌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아무래도 복주머니 안에 발설해서는 안 되는 정보를 담은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이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하러 그렇게까지 우릴 도와주려 하는가.”

“어르신과 손녀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인연이었고, 은인이셨습니다.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일 테니 괘념치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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