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장군님 지나가신다 (1)
그래도 명색이 가주인데 애들 노는 연무장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연무장의 모퉁이에 서서 대련이 끝나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패도문의 무사들이었지만, 그들도 손녀와 싸우면서 얻는 것이 많았는지 즐기는 모습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유설과 무사들이 서로 마주 보고 포권했다.
“삼촌들, 수고했어요.”
“우리 설이가 못 본 사이 더 강해졌어.”
“도대체 뭘 먹길래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거야?”
유설은 무사들과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할배는 왜 안 올라왔어? 재밌는데.”
“내가 이 나이에 저 아이들이랑 같이 뒹굴 수는 없지 않느냐. 이제 몸이 좀 풀렸어?”
“아직 부족해. 백규 삼촌 어디 갔어.”
유진산은 용살창과 함께 뒷짐을 진 채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손님들 때문에 지금 삼촌이 좀 바쁘니까, 우리도 어서 길을 떠나자꾸나.”
“벌써?”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길을 떠난단 말인가.
아이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머지않아 이곳 섬서는 정사전쟁의 격전지가 될 터.
자신들의 목적은 가문의 은원을 푸는 것일 뿐, 서로의 이념을 위해 싸우는 정사전쟁에는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을 해독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을 마치면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유설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얘기할 때는 떼를 써도 소용이 없음을.
“……응. 잠깐 맹 이모 좀 보고와도 돼?”
백규의 아내인 맹련화였다. 그녀는 유설을 특히나 예뻐했으며, 글씨를 알려주기도 했었다.
“그래, 그러려무나.”
* * *
패도문은 지나가는 길에 잠시 얼굴이나 보고 가자는 목적이었다.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마친 조손은 봇짐을 하나씩 메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하루를 달려 섬서의 남부에 도착해서는 다시 수상비로 한수(漢水)를 건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곳은 사천성의 망공산(望空山)이었다.
둘은 잠시 쉬어갈 겸 경공을 멈추고는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할배, 이 산은 느낌이 이상해.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
“호오. 그걸 느낀단 말이더냐. 비록 이곳이 이름난 명산은 아니지만, 먼 옛날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었다더구나.”
“정말?”
“그럼! 언제 할아비가 네게 거짓말한 적이 있더냐. 일반인들은 잘 찾지 않지만, 무속인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이 없는 산이야.”
“와아. 그럼 여기에는 산신(山神)도 있어?”
“있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영기가 가득하겠느냐. 그런데 산신은 왜 궁금해?”
유설이 보자기에 쌓인 용화창을 쓱 쓰다듬으며 물었다.
“산신은 싸움 잘해?”
유진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말을 조심해야 해. 산신이 노하면 우리 같은 인간은 손짓 한 번에 급살 맞아 죽는다더구나.”
할아버지의 농담에 유설이 입을 탁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에게 이러한 지식이 있는 것은 과거 집안의 어른 중에 무속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신에 대해 조금도 믿지 않았었다.
두런두런 농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신복(神服)을 입은 할머니 한 명이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속인이 영산에서 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때 자신들과 눈이 마주친 그녀의 발걸음이 돌연 정지했다. 아니, 오히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미간을 좁히며 손녀를 꾸짖었다.
“할아버지가 일반인에게는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응?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이 녀석이 그래도!? 화경의 기세를 일반인이 받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계속되는 꾸짖음에 유설이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럼 저 사람이 왜 널 보고 뒷걸음질을 쳐?”
그때였다. 뒷걸음질 치던 무속인이 돌연 무릎을 확 꿇는 것이 아닌가.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할아버지한테 정말 혼나기 전에 어서 멈추거라.”
유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힝.”
이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유진산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손녀는 전신의 기(氣)를 완벽히 갈무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돌연 무속인이 머리를 바닥에 가져다 댄 채 양손을 모았다.
“아이고, 장군님. 미천한 몸이 귀하신 분을 뵙나이다.”
“……?”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한테 무슨 연유로 이러시는 겁니까?”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요, 할머니. 우리는 좋은 사람이에요.”
유설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손녀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산신께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시기에 영문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이렇게나 큰 신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이해 못 할 중얼거림에 유진산이 재차 물었다.
“큰 신이라니요?”
그녀는 유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아이야. 지금 네 뒤에 언월도를 움켜쥔 장군께서 수염을 쓰다듬고 계시는구나. 내 평생 이토록 큰 신은 뵌 적이 없었다. 인간에게 오실 분이 아니신데 어찌하여…….”
“내 뒤에요?”
어리둥절한 유설이 자신의 등 뒤를 쓱 훑어보았다.
무엇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무속인의 눈에는 보인다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인 할머니는 자리를 피하고 싶은지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아무튼 나는 먼저 내려가야겠구나. 여기 조금 더 있다간 눌려서 죽을 것 같으니.”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조금 전 손녀를 오해했던 유진산이 미안한 마음에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세 살 때 말이다. 호현의 대장간에서 청룡언월도의 모조품을 움켜쥐고 난동을 피웠지. 아마도 관우 장군이 우리 설이를 보살펴주는 모양이로구나.”
“…….”
유설은 삐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오해해서 미안해.”
“흥.”
손녀의 마음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풀릴 때까지 놔둬야 했다. 본인이 기분을 풀고 스스로 말을 걸어올 때까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조손은 말없이 걸었다.
그러길 잠시 후.
전방에서 또 다른 무속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자 또한 여지없이 유설을 보자마자 어김없이 오체투지했다.
“아이고, 살펴 주십시오, 장군님…….”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영산인 만큼 무속인들은 너무나도 많았고, 마주치는 자마다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이라도 치를 것 같았기에 유진산이 손녀에게 제안했다.
- 이거 안 되겠구나.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
- 흥. 그러든지.
조손은 말없이 인적이 드문 숲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잠시 나아가던 중 유설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할배, 잠깐만.”
드디어 토라졌던 마음이 풀린 것일까? 유진산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냐, 조금 쉬었다 갈까?”
“아니. 저기 좀 봐봐.”
아이의 검지는 오십여 장 거리의 어느 바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앞에는 제사상을 차려놓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신께 기도하는 무사처럼 양손에 진검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먼 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진득한 살기(殺氣)까지.
‘무슨 일이기에 무속인이 저렇게 강한 살기를 품은 거지?’
그때 숨어서 그를 살펴보던 유설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는 무공을 익혔어. 조금.”
손녀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면 일류고수쯤은 된다는 얘기였다.
흥미가 생긴 유진산도 안광에 내력을 집중해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복에 비친 넓은 등 근육과 양손에 박힌 굳은살.
그리고 급하게 무공을 수련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무예를 익히는 것과 신을 섬기는 일은 엄연히 길이 다르거늘, 무슨 영문이기에…….’
곧이어 그가 몸을 일으키자 유진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살의가 가득한 눈빛.
칼날처럼 날카롭게 선 표정에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때 유설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아저씨가 지금 나쁜 짓을 하려는 것 같아. 우리가 쫓아가서 살펴보자.”
“갈 길이 먼데, 일일이 남의 일에 참견할 시간이 없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손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진정한 무인은 협의(俠義)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쪼그만 게 뭘 안다고 협의를 들먹인단 말인가.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토라진 손녀의 마음을 다독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대신 아까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거다.”
“알았어.”
의기투합한 유진산과 손녀는 기척을 숨긴 채 멀찍이 그자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갈 수가 없었다. 유설이 십 장 이내로 접근하면, 무속인들이 경련을 일으켰으니까.
검을 움켜쥔 그는 산속을 헤집고 나아가 인근 마을로 향했다.
곧이어 그의 걸음이 향한 곳에는 으리으리한 장원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입구 밖으로 점괘를 보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니, 무업(巫業)을 하는 집안인 듯했다.
“저기는 엄청 부잣집인가 봐.”
“호위무사들까지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긴, 저리도 사람들이 몰려드니 돈이 벌리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만큼 용하다는 것일 테고.”
어쨌거나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살의를 품은 무속인은 장원 근처의 언덕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높게 치솟은 어느 나무 위에서 음양쌍괴가 지켜보았다.
“지금 잡을까?”
“잡기는 뭘 잡느냐. 저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고?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꾸나.”
뭔가 석연치 않아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앞의 무속인이 내부의 호위무사들을 홀로 당해낼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곧이어 날이 어두워지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자 그가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불을 지르려나 봐.”
“음……. 일단은 계속 지켜보는 게 좋겠구나.”
횃불에 불을 붙인 그자는 담장 너머의 헛간으로 보이는 곳에 냉큼 던져 버렸다.
화르르륵-!!
짚단에 불이 붙고 강한 불길이 타오르자 내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불이야! 불이야!!”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무사는 장원의 반대편으로 전력 질주했다.
그러고는 한적해 보이는 담벼락을 도약해 뛰어 넘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산이 손녀를 슬쩍 응시했다.
“아가, 저게 바로 성동격서라는 계책이다.”
“나도 알아.”
유진산의 두 눈에 감탄이 떠올랐다. 이것은 자신이 알려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어?”
“다 알지. 왼쪽 뺨을 때리는 척하면서 오른쪽 뺨을 치는 거잖아.”
패도문의 누군가가 어설프게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는 손녀가 기특한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어쨌거나 의미만 상통하면 되는 일이지. 우리 설이는 저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담벼락을 넘은 그는 신당(神堂)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이 목표인 듯했다.
“나쁜 사람? 남의 집에 불을 지르고 담을 넘었잖아.”
“흠. 아직까지는 내 눈에도 그리 보이는구나.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기 전까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왜에?”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거든. 방법의 옳고 그름은 있겠지만, 선악의 구분은 아주 복잡하단다.”
“그럼 저 아저씨가 착한 사람이라는 거야?”
유진산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할아버지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단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전에는 전후 사정을 확실히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원에서 악에 받친 누군가의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이 짐승 같은 새끼들, 내 오늘 기필코 다 죽여 버리겠다!!”
검을 들고 무단으로 침입한 중년의 무속인이었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기어코 행적이 발각된 것이리라.
유진산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어설퍼 보이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