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사파의 주역들 (1)
비살천녀대의 대주 옥련화.
여고수들로만 구성된 마교의 정예부대를 이끌었던 무서운 마두의 이름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손녀의 손에서 널브러진 채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처참하게 변한 몰골에 유진산이 놀라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죽었어?”
“아니야. 잡아서 때렸는데, 잠들었어.”
“……그냥 잠든 게 아닌 것 같은데?”
십중팔구 두들겨 맞다가 기절한 것이리라.
도대체 얼마나 맞아야 극마지체의 고수가 정신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용케도 숨은 붙어 있는 듯했다.
“죄 없는 나를 그렇게 때리더니, 똑같이 당했구만.”
혀를 끌끌 차던 유진산은 양손으로 목과 허리를 움켜쥐었다. 긴장이 풀리자 상처가 아려왔기 때문이다.
“할배, 많이 아파? 잠깐 누워봐.”
“날 눕혀서 뭐 하게? 그러지 말고 저기 보이지?”
유진산이 검지를 내뻗은 곳엔 마녀에게 감금되어 있던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으응. 왜에?”
“저 주변에 마녀가 숨겨놓은 보물이 있을지 모르니까 가서 좀 찾아봐.”
“알았어. 금방 보고 올게.”
보물은 무슨 보물이란 말인가. 단지 아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손녀가 상기된 얼굴로 쫄래쫄래 사라지자, 유진산의 두 눈에 살기가 서렸다.
그는 백골마녀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동안 연고조차 없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괴롭혔는가. 너는 용서해줄 수가 없겠구나.’
그냥 놔두고 간다면 또 다른 사람들이 해코지를 당할 터.
유진산이 결심을 굳힐 찰나였다.
굳게 감긴 그녀의 눈이 살며시 떠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유설에게 당한 부상 때문인지 몸조차 가눌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백골마녀의 입술이 조금씩 달싹이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 예뻐?”
들을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돋을 것 같은 말이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이라니.
이제는 눈치를 보면서 답할 이유가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오이 쪼가리 같은 게 뭘 자꾸 물어봐?”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경련을 일으키며 답했다.
“……못된 애늙은이.”
정말이지 기가 찬 반응이었다.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유진산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우드득-!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그녀에게서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저승에서라도 네가 해코지한 사람들에게 사죄하여 죗값을 치르거라.”
자리를 털고 일어선 유진산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두막을 쑤석거리는 손녀 근처에 부엌 같은 창고가 하나 보였다.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극마의 고수가 살던 집이었으니 귀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했다.
벌컥-!
“으윽!”
부엌문을 열자 악취가 진동했다.
내부를 살펴보니 이름조차 모를 흉물스러운 벌레가 종류별로 가득했다.
이대로 문을 닫을까 고민하던 그는 심사숙고 끝에 가마솥의 뚜껑을 한번 열어보았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짐승의 내장들과 뒤섞여 있었다.
여차하면 자신도 이것을 먹으면서 사육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너무나 오싹했다.
움켜쥔 솥뚜껑을 내던진 유진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쾅-!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허리를 움켜쥔 그는 손녀를 찾아보았다.
아이는 옆구리에 무엇인가를 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건 뭔데 챙겼어?”
자세히 보니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였다.
“이거? 내 용돈~”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제법 많은 양의 은자가 들어있었다.
그동안 백골마녀에게 죽은 자들이 지니고 있던 자금이리라.
자신도 흑야뱡의 풍호에게서 받은 여비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설이가 행운을 얻었구나. 그걸로 가는 길에 삼촌들 선물을 사가는 게 좋겠어.”
“삼촌들? 우리 호현에 가는 거야?”
“응. 가는 방향에 있으니, 지나는 길에 얼굴은 한번 봐야겠지.”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을 만난다는 소식에 유설이 방방 뛰며 좋아했다.
“좋아. 우리 선물 많이 사가자!”
그동안 집도 없이 할아버지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해왔던 아이였다.
무려 오 년의 시간을 보낸 호현은 손녀에게 있어서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좋아?”
“응. 빨리 보고 싶어.”
손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유진산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일단 출발하기 전에 정리부터 하자꾸나.”
떠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푹-! 푸욱-!
땅을 푸는 소리가 음산한 귀신숲에 메아리쳤다.
“아이고, 허리야.”
삽자루를 움켜쥔 유진산은 가만히 서서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의 시선이 은근슬쩍 손녀의 등 뒤로 향했다.
푹-! 푸푹-!! 푸푸푹-!!!
구덩이 안에서 미친 듯이 땅을 파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조해서 만든 어설픈 도구 하나로 혼자서 거대한 묫자리를 파낸 것이다.
그것도 일식경도 안 돼서 해내다니…….
“역시 우리 설이는 일도 참 똑 부러지게 잘하는구나.”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칭찬에 유설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푸푸푹-!! 푸푸푸푹-!!!
무려 한 호흡에 열댓 번이나 땅을 파내는 속도는 장정 스무 명보다 빨랐다.
꽤 그럴싸한 묫자리가 순식간에 만들어져갔다.
어느 정도 알맞은 크기가 나오자 유진산이 손목을 까닥거렸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이리 오너라. 이제 이분들을 옮기자꾸나.”
“응, 할배.”
후다닥 달려온 유설은 할아버지와 함께 미리 모아놓은 유골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자리에는 청허를 눕혔으며, 주변으로 이름조차 모를 유골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전에 백규 삼촌이 하던 거 본 적 있지?”
전투가 잦았던 사파의 호현에서는 장례 의식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한 번 본 것은 잊어먹지 않는 손녀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설은 전낭에서 무려 세 냥의 은자를 꺼냈다.
“노잣돈 아끼지 말고, 저승길 편히 가세요.”
백규가 했던 대사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은자를 세 냥이나 넣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통은 엽전 몇 개가 일반적이다.
“왜 이렇게 많이 넣었어?”
유설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전낭을 쓱 올려 보였다.
“설이에게 용돈을 주신 분들이니, 은혜를 갚아야지.”
“그래, 그래. 은혜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일이지. 이제 묻어주고 우리도 길을 떠나자꾸나.”
구덩이를 팔 때처럼 흙을 덮는 작업도 손녀가 혼자 하다시피 했다.
부려먹을 의도는 없었지만, 부상 때문에 몸이 편치 않았던 탓이었다.
작업이 모두 마무리될 때쯤 때맞춰 해가 뜨기 시작했다.
드디어 숲을 빠져나갈 길이 열린 것이다.
“어서 나한테 업혀.”
“갑자기 왜?”
“할배, 다리 아프잖아.”
“…….”
자신이 절뚝거리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이런 상태로 온전히 경공을 펼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유진산은 쌍룡창을 회수하고는 아이의 등 뒤에 업혔다.
“출발해?”
“오냐. 어서 이 기분 나쁜 곳을 떠나…….”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파앙-!!
손녀가 전력 질주를 시작하자, 처음으로 맛보는 화경의 속도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한 줄기 벼락이 된 것만 같았다.
“꽉 잡아.”
“……응?”
설마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하던 유진산은 동공이 부릅떠졌다. 돌연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허공답보(虛空踏步)?’
아래를 내려다보자 유설의 작은 발이 허공을 구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뒤에 업힌 유진산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껄껄거리며 그가 흐뭇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우리 손녀가 이제 다 컸구나.”
“히히. 할배, 그거 알아?”
“뭐가?”
유설이 씩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지금 할배보다 훨씬 더 커.”
반박할 수 없었던 유진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자신의 몸도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손녀와의 키 차이는 한 치나 벌어져 있었다.
‘……고 녀석 참.’
* * *
숲을 빠져나간 이후부터 조손은 속도를 조절했다.
유진산의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곳부터는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의원을 찾아다니며 쉬엄쉬엄 이동하기를 사흘 뒤.
둘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호현의 시장에서 선물을 한 보따리 구매했다.
바닥에는 장신구 따위를 깔았으며, 위쪽에는 간식을 닥치는 대로 사서 넣었다.
어찌나 쓸어 담았는지, 사용한 은자만 무려 열 냥이 넘었다. 물론 모두 유설의 전낭에서 나온 돈이었지만.
패도문(覇刀門).
웅장한 현판 앞에서 거대한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진 아이가 소리쳤다.
“삼촌들, 나 왔어!!”
목청이 어찌나 큰지 마당에서 수련 중인 무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하나 같이 민머리에 땀으로 범벅된 다부진 상체들.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기에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유설은 모두를 기억하고 있었다.
멍한 눈빛으로 유설을 응시하던 무사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하하하하!!”
“설아, 어찌 된 거야? 우리 패도문에 입문하려고 결심한 거야?”
모자를 쓰는 것을 깜빡한 유설이었다.
“히히히. 나도 삼촌들이랑 이제 똑같아.”
“오냐! 자고로 무인이라면 패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패기하면 대머리 아니냐!”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패도문의 은인이기에 앞서 모두에게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유설을 둘러싼 패도문의 무사들은 귀를 잡아당기며, 머리를 쓰다듬고 난리가 났다.
“근데 이 보따리는 뭐야? 이 무거운 걸 어찌 들고 왔어?”
유설이 보따리를 풀며 배시시 웃었다.
“흐히힛. 이건 삼촌들 선물이야.”
“역시 우리 설이가 최고라니까!”
뒤에서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던 유진산은 다시 어딘가를 응시했다.
문주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양쪽 허리에 쌍도를 찬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 전신의 근육이 살아 숨 쉬듯 꿈틀거리는 모습은 다른 무사들의 신체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파의 성지 중 하나인 호현의 지배자이자 패도문의 문주인 백규였다.
잠시 후 그가 다가오자 무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기립했다.
“백규 삼촌!”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어린아이 같은 미소로 유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어이쿠, 우리 설이 왜 이렇게 무거워졌어?”
“나 안 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매일 보고 싶었지!”
아이를 왼쪽 가슴으로 안아 든 백규는 유진산을 향해 다가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전하시오, 형님. 도대체 어찌 된 거요? 설이는 이렇게나 컸는데.”
“내가 입이 좀 짧아서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뭔가 좀 달라졌구만.”
유진산은 백규를 처음 본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극에 이른 초절정고수였던 그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음을.
달라진 그의 기세는 이제 자신이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드디어 막혀 있던 벽을 뚫고 화경의 경지에 접어든 것이다.
백규는 씩 웃으며 오른손을 안쪽으로 내뻗었다.
“사실 나도 여러 일이 좀 있었수.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형님. 할 얘기가 많으니까.”
“그리하지.”
백규는 유설을 바닥에 쓱 내려주고는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조카는 여기서 잠시 놀고 있어.”
“응, 삼촌. 이따가 나랑 대련하고 놀자.”
과거 하루에 몇 번씩 자신에게 대련하자고 찾아와 괴롭혀대던 아이였다.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때마다 좌절을 맞보며 곤욕을 치렀던 백규였었다.
자신도 이제는 동일한 경지에 접어들었지만, 같은 화경이라도 높낮이가 있는 법.
백규는 벌써부터 골이 아픈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굳이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예전의 서러움을 갚아줄 테니까, 거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삼촌~”
아이를 뒤로한 유진산과 백규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천천히 걸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기 무섭게 백규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음양쌍괴가 소림사에 쳐들어가서 뒤집어엎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애들이 어찌나 좋아했는지 모르오.”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는 법이지. 사실은 겨우 도망쳐 나왔어.”
“하하하! 어쨌거나 참으로 대단하오. 지금껏 소림사에 난장을 피우고도 무사한 사람은 형님과 설이가 유일하지 않소.”
유진산은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어. 다신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더 강해져야겠지.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규가 놀라는 시늉으로 답했다.
“역시 형님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오. 사실 이곳에 손님들이 좀 와있소.”
“손님이라니?”
“형님도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을 거요. 흑묘파의 문주와 그의 부하들이니까.”
무림맹의 사파 말살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손녀와 함께 도움을 청하러 갔던 살수 집단이었다.
그들은 당시 호현을 공격하려던 화산파의 발목을 묶어둘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다.
백상이라는 전설적인 살수가 문주였으며, 유난히 날카로웠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했다.
“그들이 왜 이곳에 있어?”
“맞고도 가만히 있으면 사파가 아니지 않소. 정파 놈들이 먼저 시작했으니, 우리도 무림맹의 섬서분타에 한 방 먹여줄 생각이오.”
정사 간의 싸움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는 유진산이었지만, 내막은 궁금했다.
“흑묘파는 중립을 지킨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일로 사파로 돌아섰나 보군. 하지만 호현과 흑묘파의 전력만으로 섬서분타를 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호현과 흑묘파가 힘을 합친다면 굉장한 전력임에는 틀림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림맹의 일개분타를 공격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의 작전 실패로 정파의 힘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힘은 사파를 누를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까.
“우리만으로 공격한다는 소리는 안 했소. 곧 있으면 이곳에 사도련주께서 도착하실 거요.”
“그분이 직접 오신다고?”
그녀에 대해서는 백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영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시무시한 사파의 지존.
그리고 그녀가 현 무림맹주인 화령사태와 악연이 있다는 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다.
“도와달라는 부탁은 안 할 테니, 얼굴이라도 같이 한번 보시지요. 련주께서도 형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