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나 너무 무서워 (2)
유진산의 일평생 이토록 무섭게 생긴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동공이 없는 시뻘건 눈이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사람의 형체임은 확실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허리에 괴이한 나뭇가지를 채찍처럼 휘감은 것 정도였다.
등 뒤에서 유설이 옷깃을 붙잡으며 자지러졌다.
“할, 할배…….”
“겁먹을 필요 없다. 세상에 귀신같은 건 없어.”
유진산이 앞장서서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 순간 움켜쥔 용살창의 끝부분이 기괴한 곡성을 토해냈다.
흐으으응-!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영물이나 신수에만 반응하던 신병이기가 소리를 내다니?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유진산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은 그녀에게서 전혀 기(氣)가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산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지독한 한기(寒氣)가 전부였다.
“누구냐!? 왜 우리를 노려봐!?”
“…….”
그 순간 누더기가 된 소복을 입고 있는 여인의 목이 옆으로 돌아갔다.
목을 가로로 꺾은 채 인상을 쓰며 웃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오싹했다.
잠시 후 거리가 십여 장까지 가까워진 그때.
자신들을 노려보던 그녀가 돌연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타앗-!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위치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유설의 검지가 안갯속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에 있다가 사라졌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진산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봤지? 할아버지를 보고 도망쳤구나.”
“할배, 나 무서워…….”
유진산은 손녀와 놀아줄 때 가끔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듣고 싶어 하던 아이의 반응에, 전설에 과장까지 보태어 놀려댔었다.
그랬던 일들이 후회되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해가 뜨면 바로 빠져나갈 수 있어.”
그 한마디에 유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일 아침까지는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신이 나 잡아가면 어떡해?”
“할아버지가 있는데 우리 설이를 어떻게 잡아가?”
“히잉.”
손녀를 한 번 안아준 그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틀었다.
“할아버지가 망을 볼 테니, 너는 한숨 자고 있어. 일어나면 떠날 수 있을 게다.”
“……응.”
유설은 두 눈을 꼭 감고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진산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말과는 달리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백골마녀라 했던가?’
자신들에게 이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노인도 절정고수쯤은 되어 보였었다.
도대체 무엇이 은거 중인 무림고수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단 말인가.
의문이 가득했지만, 알 수 없는 존재 앞에서 움츠러들 수는 없었다.
‘또다시 다가오기만 해 보거라. 아주 끝장을 내주마.’
화경지체를 이룬 고수는 언제든지 자신의 수면을 조절할 수 있다.
품에 안긴 손녀는 새근새근 잠이 든 듯했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찾아오자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유진산은 우두커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계속 경계했다.
그렇게 음산함이 절정에 이를 무렵.
“……?”
유진산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이십여 장 앞의 나무 앞에서 아른거리는 붉은 눈동자. 백골마녀가 분명했다.
알 수 없는 스산함에 유설이 때맞춰 눈을 떴지만, 무서워 떠는 손녀에게 싸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할아버지가 쫓아내고 오마.”
“조심해…….”
용살창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선 유진산은 그녀를 향해 질주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백골마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며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저리 썩 꺼지지 못할까!”
경고를 보냈음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진산을 향해 마주 다가오고 있었다. 명백히 싸우겠다는 몸짓이었다.
어차피 대화는 통하지 않는 상대.
안전을 위해서라도 선공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붉은 강기를 머금은 용살창의 끝부분이 백골마녀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쏴아아앙-!!
일격에 죽일 생각으로 내지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찰나의 순간, 유진산은 백골마녀의 왼손이 유백색의 빛무리에 휩싸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창날을 후려치는 것도.
카아아앙-!!
일합을 마주한 것과 동시에 유진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싸늘한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파앙-!
피했다는 안도도 잠시. 그는 재빨리 창을 잡아당기며 사선으로 치켜세웠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
가슴이 철렁해진 그는 움켜쥔 창 자루에 다급히 진기를 주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어진 공격을 방어할 수 없을 테니까.
무엇인가 서늘한 빛살이 번뜩이는 듯싶더니, 칼날 같은 손톱이 코앞에서 창 자루를 후려치고 있었다.
콰아앙-!!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자동으로 토해져 나왔다.
“크윽!”
유진산의 두 발이 지면을 끌며 후방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그는 무려 이 장이나 끌려나간 이후에서야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이거 낭패로구나.’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칼날을 박아넣은 듯한 기괴한 손톱. 그리고 거기에 서린 음산한 기운이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덮쳐왔다.
왼발로 균형을 잡은 유진산은 이를 악물고 용살창을 솟구쳐 올렸다.
쩌엉-!
“큭!”
양팔에서 느껴지는 끊어질 듯한 통증.
그뿐만 아니라 발은 한 치 가량이나 땅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엄청난 위력 앞에 유진산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가 다시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유백색의 광채가 곡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콰앙-!!
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힘에 용살창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앞가슴으로 훤히 드러난 완벽한 허점.
그것을 놓칠 상대가 아니었다.
유진산에겐 이제 다가오는 손아귀를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일생일대의 위기였지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선가 무엇인가가 벼락처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람을 가르며, 빛의 속도로 다가오는 주먹 모양의 권풍.
소림사의 상승무공인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쏴아아앙-!!
눈 깜짝할 사이 권풍이 백골마녀의 옆구리를 타격했다.
쩌억-!!
유진산을 공격하려던 그녀는 일장을 미끄러지며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할배!!”
용화창을 사선으로 움켜쥔 손녀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당황한 것일까? 백골마녀는 유설을 잠시 노려보더니 후방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갔다.
발 없는 유령처럼 안갯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이했다.
“아직 도망친 것이 아니니 방심하지 말거라!”
유진산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유설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
유설은 귀신이 무서웠지만, 할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창을 들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조손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유진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개가 언제 이렇게 짙어졌지?’
급격히 짧아지는 가시거리.
분명히 일반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초절정고수인 자신의 안광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안개였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란 말인가.
“이거 큰일이로구나. 앞이 보이질 않아…….”
“나는 잘 보이니깐, 뒤에 숨어 있어.”
다행히 유설은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야가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긴장감은 점차 극에 달해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쓱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설과 백골마녀가 일합을 겨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천둥을 머금은 구름처럼 안갯속에서 번갯불이 연달아 번뜩였다.
콰앙-! 쾅-! 콰콰콰쾅-!!
둘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리라.
유진산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속으로 손녀를 응원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사방으로 광풍이 휘몰아치며, 나무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싸움은 점차 치열해졌고, 머지않아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야아악!!”
마치 까마귀의 울음소리처럼 기괴한 비명.
확실한 것은 손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진산은 한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잘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오래 가질 않았다.
찰나의 순간 무엇인가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았기 때문이다.
“……?”
휘리리릭-!
그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딘가로 사정없이 끌려가고 있음을.
복부를 휘감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괴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끄윽.”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백골마녀에게 끌려가는 그는 혼자 남겨질 손녀 걱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가…….’
* * *
“할배!!!”
유설의 고함이 귀신숲을 진동시켰다.
아무리 외쳐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고요뿐이었다.
백골마녀를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상처 입은 그녀가 할아버지를 납치해서 도망갈 줄 어찌 상상했겠는가.
혼자가 된 것을 깨달은 아이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이어 무서움으로 바뀌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이이잉…….”
이렇게 혼자 남겨진 적이 언제 있었던가.
가만히 서서 울던 유설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지만, 화경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할아버지가 놓쳤던 용살창이었다.
“할배…….”
두 자루의 창을 움켜쥔 유설은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숲속에서 어찌 할아버지를 찾아낸단 말인가.
무기력한 상황에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때 평상시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조언들이 뇌리를 맴돌았다.
『어떠한 문제라도 정신만 차리면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마음을 진정시킨 유설은 근처의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어서 유가심법(劉家心法)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안광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화경의 초인적인 시력은 일반인의 수백 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예리한 눈썰미는 곧이어 알록달록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구슬?”
주변의 색감과는 다른 이질적인 보라색의 광채.
재빨리 다가가서 그것을 주어든 유설은 자신의 팔을 걷어 올렸다.
‘우리 우정 팔찌?’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것과 동일했다.
동가장의 동구 삼촌이 헤어질 때 선물해줬던 옥구슬팔찌였다.
표정이 조금 밝아진 유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하나의 구슬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할배!”
유설은 구슬이 남긴 흔적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러나 팔찌에 구슬이 달려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유진산이 방향을 표시하던 구슬은 곧이어 다른 흔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공색감을 입힌 조개였다.
“……?”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사주었던 선물.
기어코 조개 목걸이까지 끊은 것이다.
이 모든 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백골마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창을 움켜쥔 양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씨이…….”
더는 유설의 머릿속에 두려움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강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랐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유설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감히 우리 할배를 데려가? 넌 이제 죽었어.”
쌍룡창을 불끈 움켜쥔 유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흔적을 찾아 계속 전진했다.
어느 정도 나아가자 그 뒤부터는 방향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두 자루의 신병이기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