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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00화 (100/238)

100화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3)

유진산의 어깨엔 화운개의 양쪽 다리가 올려져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그의 귓가로 등 뒤에서 손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히히. 재밌어.”

뒤에서는 유설이 화운개의 어깨를 들쳐 올린 채 내달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이 재밌다는 말이야?”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백여 명의 방도들이 보는 앞에서 개방의 당주를 납치한 것이다.

당주는 장로보다 한 단계 아래의 신분으로 조직 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유설이 알 바가 아니었다.

“조금 천천히 달리자. 너무 멀어지고 있어~”

신이 난 유설과는 달리 그들을 쫓는 개방의 방도들은 죽을 맛이었다.

“저, 저놈들이 당주님을 데려갔다!”

“놓치면 안 돼!!”

타구봉을 움켜쥔 거지들은 당주를 구출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달렸다.

잡힐 듯 말 듯 좁혀지지 않는 것이 미칠 노릇이었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음양쌍괴가 일부러 속도를 조절하면서 그들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얼마 가지 않아 헉헉거리며 탈진하는 방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홍화루의 장원 입구.

거지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진 그 자리로 새로운 인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칠흑처럼 짙은 흑의를 입은 일곱 명의 검객.

그들 중 가장 중심에 있던 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문보다 더하군. 음괴의 무공이 저리도 강했다니.”

“눈 한번 끔뻑이지 않고 타구진을 부숴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게다가 당주를 일격에…….”

“뭐 덕분에 우리가 할 일은 없어졌잖아.”

음괴가 모든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자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의 정체는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온 일월문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백 명이나 되는 개방도의 모습을 보고는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음양쌍괴가 개방의 당주를 왜 납치한 것일까요?”

“나도 모르지. 듣자 하니 양괴의 간사함이 하늘에 닿아있다던데, 그 속을 내가 어찌 알아.”

“하나같이 의문투성이네요. 우리를 도와준 이유도 말입니다. 설마 흑야방이 우리 대신 다른 거래 상대로 그들을 찾은 것은 아닐지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는 없어. 악명높은 그들하고 엮여봐야 정파의 공적으로 낙인찍힐 테니.”

“그래도 음양쌍괴가 사파 무림에서는 인기가 제법 많잖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대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오죽하면 사도련주께서 그들을 포섭해보려고 사왕패까지 줬겠어?”

“그들이 사왕패까지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까?”

“틀림없어.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봤으니까. 어쨌거나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지부가 무사히 이전할 수 있도록 호위라도 도와야겠지.”

그와 음양쌍괴는 구면이었다.

유진산이 흑야방과 접선하기 위해 나룻배에서 만났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일월문의 검객들이 홍화루로 사라지자, 소란스러웠던 입구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숲속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운 누군가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끄으으으…….”

깨질 것 같은 두통.

그리고 아려오는 목 뒤의 뻐근함에 화운개는 신음을 토해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딘가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조각의 기억.

그것은 자신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던 음괴의 모습이었다.

토끼 모자를 눌러쓴 아이의 모습으로 창을 꼬나쥐고 달려오던 장면은 떠올릴수록 오싹했다.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화운개는 고통을 뒤로한 채 고개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헉!”

음양쌍괴. 그들이 자신의 바로 옆에서 모닥불을 피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정체 모를 꼬치를 하나씩 움켜쥔 모습이었다.

그때 입안 가득 무엇인가를 오물오물 씹던 유설이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일어나떠요?”

“음, 음괴…….”

자신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화운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음식을 꿀꺽 삼킨 유설은 먹다 남은 꼬치를 그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한번 먹어봐요. 맛있어요.”

공짜 음식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는 개방의 일원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무슨 맛인지 느낄 정신도 없었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먼 길 가기 전에는 많이 먹어야 한대요.”

유설의 말뜻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화운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어코 날 죽이겠다는 것이로구나.’

두려움에 질린 눈알이 천천히 움직이며 양괴를 찾았다.

그는 손바닥만 한 작은 단도를 움켜쥐고 모닥불에 달구고 있었다.

자신을 고문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불안감이 절정에 달한 그때였다.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말이야. 순순히 대답해 주진 않겠지?”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단도를 돌리는 모습이 소름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명색이 개방의 당주였다.

이렇게 굴복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한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할아버지의 신호를 받은 유설이 왼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손아귀에서 뿜어진 무형의 진기가 누워있던 화운개의 신형을 감싸며 허공으로 들쳐 올렸다.

“끄으…….”

전신이 옥죄어오는 중압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더없이 무기력했다. 마치 독사의 입속에서 죽어가는 생쥐처럼 말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엄살이구나. 일단 녀석을 내려 주거라.”

유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화운개는 유진산의 맞은편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농락하지 말고 어서 죽여.”

“입은 그렇게 움직이지만, 눈빛은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군.”

“…….”

“나는 지금까지 자네처럼 자존심과 명예 따위를 지키느라 목숨을 내던진 자들을 많이 보았네.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고 나면 그만인 것을.”

화운개는 사문의 구호를 되새기며 각오를 다졌다.

“개방이 나 자신이고, 내가 바로 개방이다. 내 목숨은 처음부터 개방의 것이었다.”

유진산은 그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느 문파나 제자가 입문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세뇌를 시키는 것이지. 사문을 위해서라면 불나방처럼 목숨을 던질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주 깊숙한 곳까지 심어놓아도,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네.”

말을 마친 유진산은 붉게 달궈진 단도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안 그럼 후회할 테니까.”

“잠, 잠깐…….”

화운개가 다급히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양괴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잡아.”

나직한 한마디에 등 뒤에서 음괴가 양어깨를 붙잡았다.

앙증맞은 손아귀였지만, 마치 천력(天力)을 담은 부처의 손아귀처럼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눈에 띄게 흔들리는 동공.

공포에 질린 얼굴에는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살, 살려다오…….”

“고개 돌리지 말고 그대로 있어.”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은 유진산은 단도를 그의 얼굴을 향해 서서히 가져갔다.

설마 눈부터 찌르고 시작하려는 것일까?

서서히 다가오는 달궈진 단도에 그는 경악했다.

“제발…….”

유진산은 묵묵히 그의 눈 밑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에 깊게 파인 흉터와 마르지 않은 핏물.

그것은 바로 유설에게 맞은 후 넘어지면서 다친 상처였다.

“흉터는 조금 남겠지만,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감염되어 죽을 수도 있어. 네가 우리 설이처럼 만독불침의 신체가 아니라면.”

“……설마?”

화운개는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음양쌍괴가 자신을 고문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렇지 않아도 깨어날 때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단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을 뿐.

“설마는 뭔 설마야.”

유진산은 그대로 달궈진 단도로 그의 상처를 눌러 버렸다.

치지지직-!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반경 십 리까지 메아리치는 듯했다.

그 순간 유설이 미리 빻아놓았던 정체 모를 풀떼기를 그의 얼굴에 냅다 붙였다.

철썩-!

“꾹 누르고 있어요.”

화운개는 한 손으로 얼굴을 누르며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때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은 유진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겁 많고, 엄살 부리는 녀석이 어떻게 당주 자리까지 올라왔지? 방주와 팔촌쯤 되는 사이인가?”

“…….”

“표정을 보니 얼추 맞는 모양이군. 어쨌거나 우리에게 음식을 얻어먹고, 상처도 치료받았으니, 너도 무엇인가를 줘야 계산이 맞겠지.”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이런 걸 원했다고…….”

그의 말에 유진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아이의 웃음이었지만, 마치 인자한 노인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무엇을 원했는가.”

“나를 좀 보내주시오. 우리 개방은 음양쌍괴와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소?”

“음. 아까까지는 그랬지.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나. 어차피 이미 무림맹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인 것을.”

화운개는 양괴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음의 공포를 한번 맛보았던 그는 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럼 내게 바라는 것을 먼저 말해 보시오.”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게 정보뿐이 더 있겠나.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개방에 직접적인 해가 되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대신 내 질문에 거짓 없이 답한다면 이대로 보내주마.”

개방의 당주급이라면 흑야방에서도 모르는 고급 정보들이 많이 있을 터.

이번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소……?”

“구태여 죽일 녀석이라면, 우리가 뭐하러 상처를 치료해줬겠나. 게다가 나는 널 죽일 이유가 없어. 지금까지는 말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유가 생긴다는 뜻일까?

화운개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개방에 직접적인 해가 되지 않는 질문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소. 뭐든 사실대로 말해줄 테니, 그 말을 꼭 지켜주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산의 옆으로 손녀가 다가와 찰싹 붙어 앉았다. 자기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첫 번째 질문. 무림맹은 지금 우리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나.”

음양쌍괴의 정체를 묻는 것이리라.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맹활약을 펼치는 사파의 신진고수들.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그들의 정체를 말이다.

“육 년 전쯤, 화산파와 무당파를 뒤에서 이간질해 싸움을 붙인 간사한 노인이 한 명 있었소. 그자가 양괴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긴 한데, 사문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소. 그리고 음괴님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오.”

“그런데 말이야.”

“……?”

“나는 그냥 양괴고, 얘는 음괴님인가?”

“그, 그건…….”

유진산은 그냥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왼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과 달리 속내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무림맹이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화산파와 무당파에게도 원수가 되어있겠군.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애초부터 더 나빠질 관계도 없었으니.’

어디 화산파와 무당파뿐이겠는가.

종남파에 쳐들어가서 장로들을 때려잡았고, 소림사에서는 마두를 풀어주고 비급을 훔쳐 달아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이제는 개방까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야 말았다.

앞으로 정파와 어디까지 가게 될지 그도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두 번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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