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2)
흑야방 남부지부 총 책임자 은화린.
그녀는 조직 내에서 가장 아끼는 인재로 최단기간 내에 핵심 간부가 될 정도로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냉철한 성격을 가진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석에서 사태를 지켜보는 얼굴에는 심란함이 가득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단순히 술이나 마시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음양쌍괴가 흑야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곳에서 오직 그녀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여기서 행패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조직에서도 모든 정보를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는 최고의 귀빈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안면이 있는 자신까지 모르는 척하다니.
‘뭔가 속내가 있는 게 분명한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은화린의 의문이 절정에 치달을 무렵.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나타나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죽립 아래로 부드러운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검객은 그녀의 호위무사였다.
“큰일 났습니다, 지부장님.”
“지금 이 상황보다 더 큰일이 뭐가 있어?”
“아무래도 저희의 정체가 탄로 난 것 같습니다. 개방도들이 잔뜩 몰려왔어요.”
음양쌍괴의 행패에 이어서 개방의 습격까지. 그야말로 최악의 날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서린 표정은 무서움이 아닌 의아함이었다.
“몇 명이나?”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음양쌍괴가 있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럼 저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면 우린 끝장이겠군.”
“아마도…….”
은화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음양쌍괴는 홍화루의 정문을 틀어막고 앉아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이곳을 공격하려면 자신들을 통과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단비야.”
은화린이 호위무사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자,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 언니.”
“절정고수의 눈으로 보기엔 어때? 양괴에게 당한 우리 애들 말이야.”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 하나같이 멀쩡해 보이다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는데, 힘을 빼고 때리는 시늉만 했던 것 같아요.”
무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복부를 정통으로 맞았던 포주까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우두커니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게다가 음괴가 무너트린 작은 전각도 사용하지 않는 낡은 창고에 불과했다.
“그렇게나 소란을 피웠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입은 피해는 없어. 단순히 운이 좋아서일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의 호위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맞아,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아. 무림맹에 원한을 산 그들이 대놓고 우릴 도와줄 수는 없으니까.”
경쟁상대인 개방만 상대하기도 벅찬 흑야방이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정파의 거대 문파들이 음양쌍괴와 묶어서 공적으로 몰아가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더군다나 소림사는 철천지원수처럼 눈에 불을 켜고 음양쌍괴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은화린은 자신의 호위무사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그 모습이 더는 우아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연극은 배우가 많을수록 더 그럴싸한 법이지.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도 무대에서 같이 즐겨볼까?”
“……같이 즐기신다니요?”
“말 그대로야.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지부로 돌아가서 이사 준비 좀 하라 일러둬. 내일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할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손뼉을 두 번 부딪쳤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 귀빈들을 모셔야 하는 관계로 영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술값은 받지 않을 테니, 모두 귀가해 주심이 어떠신지요.”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손님들이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악명 높은 음양쌍괴가 입구를 막고 있었지만, 나가려는 자들을 막을 의사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손님들은 불똥이 튀기 전에 재빨리 입구의 틈새로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헉!”
입구를 나서는 그들은 또 한 번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몽둥이를 움켜쥔 거지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입구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 또한 손님들이 나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인파들이 몰려나가고 장원이 한적해지자, 술잔을 움켜쥔 유진산이 은화린을 바라보았다.
“우리 때문에 괜한 짓을 했군.”
“귀빈들이 처음으로 찾아오셨는데 괜한 짓이라니요. 이곳까지 와서 식사만 하고 돌아가신다면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홍화루의 기예를 한번 사보심이.”
유진산은 은근슬쩍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이어 입구에서 거지 한 명이 기웃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이어서 그가 들을 수 있도록 모르는 척 물었다.
“대가는?”
“단지 그 자리에서 즐겨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문 앞의 거지 놈들이 들어와서 기루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그거라면 매우 싼 값이군. 수락하지.”
거래가 성립되자 누군가가 칠현금을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은화린은 음양쌍괴의 맞은편에 자리를 틀고 앉아 천천히 현을 잡아당겼다.
띠링-!
그것을 시작으로 악기를 움켜쥔 기녀들이 다가와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퉁소와 비파까지 어우러진 합주는 무척 그럴싸했다.
거기에다 화려한 색채의 옷깃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춤을 추는 기녀들의 모습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들 같았다.
그 모습에 유설이 입을 벌리며 넋을 놓았다.
“……와아. 너무 아름다워.”
* * *
오백여 명의 개방도들은 홍화루를 멀찍이 포위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주인 화운개는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모아왔는데 시작도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도대체 밥을 왜 이렇게 오래 처먹는 거야?”
주어진 임무는 흑야방의 지부를 박살 내는 것이지, 음양쌍괴를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홍화루를 엿보던 삼결제자가 분통하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당주님. 흑야방의 기생년들이 음양쌍괴에게 아부를 떨고 있어요.”
“놈들이 돌아가면 우리에게 당할 운명들이니,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겠지.”
“벌써 두 시진이 지났어요. 그냥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림맹의 임시지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니, 그때까진 기다리는 게 좋아.”
“여기서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언제 올 줄 알고요? 오백 명이 달려들어서 겨우 두 명을 못 잡겠습니까?”
음양쌍괴를 잡기만 한다면 명성은 물론 신분 상승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으나, 화운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양괴는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음괴가 문제야. 마음먹고 싸우면 우리도 최소한 백 명은 죽어 나가겠지.”
“음괴가 그 정도로 강합니까?”
“섬서에서 모용성이 음괴에게 개처럼 맞아 죽었다더군. 하지만 우리랑 싸우면 양패구상일 테니, 놈들도 쉽게 싸움을 걸어오진 못할 거야.”
오백 명의 개방도가 펼치는 타구진은 그 누구도 쉽게 볼 수가 없는 위력이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내내 시끄럽던 합주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쥐죽은 듯 고요해진 정적 속에 창을 움켜쥔 두 명의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명의 개방도들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마주하는 둘은 조금의 움츠러듦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얼굴에는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가득했다.
“잘 놀았구나. 그렇지?”
내공이 실린 양괴의 중얼거림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음괴의 모습에 개방도들의 마음에도 불안이 피어올랐다.
“정말 최고였어. 다음에 또 오자.”
그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음에 오면 홍화루는 없을걸?”
“왜에?”
“저 탐욕스러운 거지 놈들이 오늘 이곳을 박살 낼 테니까.”
그 순간 음괴의 미간이 잔뜩 좁혀지며 기세를 뿜어냈다.
“절대 안 돼!!”
상황이 이쯤 되자 개방도들이 주춤거리며 당황했다.
설마 자신들의 머릿수를 보고도 도발을 할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당주에게 전음으로 명령을 받은 삼결제자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 그냥 지나가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양괴가 대꾸했다.
“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밥을 얻어먹었으면 합당한 값을 치르는 게 강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럼 고작 둘이서 우리 전부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개방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잡았다.
척-! 처처척-!
음양쌍괴를 향한 오백여 개의 타구봉.
그것을 마주한 둘의 입가에는 오히려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유진산이 출수를 준비하고 있는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아가, 할아버지가 개방이 무서운 점이 뭐라고 했지?
- 머릿수~
- 약점은?
- 허리에 매듭!
무리에서 가장 강한 대장이 볼품없이 쓰러진다면 전체가 흔들리는 법.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러한 수법은 금수들의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굳이 전부를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개방은 누가 대장인지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대놓고 서열을 표시하고 다니고 있었으니까.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유설은 유난히 허리춤에 매듭이 많은 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곧이어 작은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찾았다.”
무리들에 섞여 있던 화운개는 자신이 지목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공포의 음괴가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씩 웃으면서 말이다.
타구진법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걸음걸이였다.
당주 화운개는 뒷걸음질을 치며 다급히 소리쳤다.
“쳐, 쳐라!”
기다렸다는 듯이 오백여 명의 거지들이 음양쌍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덮쳐오는 수백여 개의 타구봉에 하늘이 검게 물든 듯했다.
누구든 당황할 법한 장엄한 광경이었지만, 유설의 두 눈은 오직 화운개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타앗-!
용화창을 사선으로 치켜든 유설이 타구진의 중심으로 마주 돌진했다.
찰나의 순간 창날에서 꽃잎이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허공에 수를 놓듯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무서움은 뒤따르던 유진산만이 알고 있었다.
써컥-! 쩌저저적-!!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며 잘려나간 수십여 개의 타구봉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그리고 그 틈으로 유설이 계속해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오직 한 명만을 노려보면서.
무식하게 돌진해오는 가공스러운 모습에 화운개는 경악했다.
“……헉!”
문득 그의 뇌리에 잊고 있던 정보 한 가지가 떠올랐다.
소림사에 침입했던 음괴가 백팔나한진을 뚫고 나왔다는 사실을.
개방의 타구진 따위가 소림의 백팔나한진에 비교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콰앙-!!
“크윽!”
“컥!”
“흐악!”
밝은 빛무리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십여 명의 방도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이제는 자신과 음괴의 사이를 막아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운개는 순순히 당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이를 악다물며 타구봉을 움켜쥐었다.
“내가 바로 개방의 당주 화운개다, 이년…….”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뭉툭한 용화창의 끝부분이 그의 뒷목을 후려쳤다.
쩌억-!!!
허리가 구십 도로 꺾인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져 버렸다.
단 한 방이었다.
개방의 당주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자, 방도들이 당황하며 움찔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들어!”
음양쌍괴가 기절한 화운개를 양쪽에서 붙잡고, 어깨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