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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96화 (96/238)

96화 좋은 소식이 있어요 (1)

“아, 아버지!”

“형님!!”

쓰러진 철운비의 주변으로 식솔들이 몰려들며 울부짖었다.

비록 그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가주의 죽음에 어찌 슬픔이 없겠는가.

“으흐흑…….”

오열하는 그들을 보며 유진산도 숙연해졌다.

더는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심장의 박동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창백해진 피부까지.

노쇠한 몸으로 엿새 동안 혼신의 기력을 다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예고된 가주의 죽음에 모두가 침울함에 잠겨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비켜주세요!”

그가 이렇게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둘 유설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장한들을 밀치며 파고든 아이는 철운비의 단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윽!”

“……뭐, 뭐하는 거야?

식솔들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유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의 두 눈에는 철운비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자신의 선물을 만들어주다 이렇게 된 것임을 알고 자책하는 것이리라.

순간적으로 유설의 손바닥이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

오직 유진산만이 눈치채고 있었다.

오(五) 갑자의 내공으로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진기가 철운비의 단전으로 파고들고 있음을.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그래, 설이 너라면 할 수 있다!’

거침없이 흐르는 진기는 파도처럼 철운비의 혈도를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몸속에서 자신의 진기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상대가 다른 성질의 내공을 보유한 자라면 그 난이도가 수십 배는 올라간다. 몸속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운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타고난 선음지체의 체질과 화경의 집중력을 가진 손녀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갑자기 유설의 주변으로 기(氣)의 폭풍이 소용돌이쳤다.

쏴아아악-!

“으윽!”

“뭐, 뭐야?”

화들짝 놀란 장인들이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인물은 오직 유진산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극성의 유가심법(劉家心法)을 보는구나. 언제 이 정도까지…….’

가주인 자신도 이루지 못한 십이성(十二成)의 단계를 손녀가 펼치고 있는 것이다.

유가장의 심법은 패도적이지도 않고, 내공을 쌓는 속도 또한 매우 느린 편이다.

그 대신 기본이 탄탄하고, 바람처럼 부드러운 성질을 지녀 운공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상황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연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후한 기운이 철운비의 오장육부를 감싸고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길 잠시 후.

쿠쿵-!

철운비의 가슴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분명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약한 호흡과 혈색이 도는 피부까지.

기어코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곧이어 작업을 마무리한 유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휴.”

지금까지 손녀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처음 보는 유진산이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으니 심력이 고갈될 수밖에.

그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손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수고했어.”

유설이 물러선 자리로 다시 장인들이 몰려들어 철운비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달라진 가주의 상태에 그들은 몹시 놀라워했다.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셨어!”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어느새 혈색이 돌아온 철운비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유설을 향해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얘야.”

“모두 네 덕분이야.”

유설은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유진산이 아이에게 냉큼 전음을 보냈다.

- 멋진 선물을 받았으니, 바로 떠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하루만 더 머물다 가자꾸나.

- 응, 나 졸려…….

* * *

저녁이 되자 철가장의 장원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무기를 만드는 명가에서 최초로 신병이기를 탄생시켰는데 어찌 자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가주를 살려낸 유설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었다.

“아가, 어서 이것도 먹어 보거라.”

유설의 입 속에는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도 좌우에서 온갖 진수성찬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이모가 오늘 손수 만든 꿀떡이야.”

이미 삼키기도 전에 좌우에서 여인들이 음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마이떠요.”

“힘이 장사라며? 어디서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배웠어?”

그 순간 옆에서 건장한 장한 한 명이 달려와 그녀를 말렸다.

“큰일 날 질문은 하지 마요, 누이. 우리 가문의 원칙을 잊었어요?”

“그냥 귀여워서 한번 물어본 건데,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정색한 건 아니에요. 누이도 알다시피 의뢰자의 신상을 절대 묻지 않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물이나 좀 떠와. 우리 애기 목 막히니까.”

철가장은 정파든 사파든 대가만 지불하면 의뢰자를 따지지 않고 무기를 만들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강호에 철저한 중립을 포고하여 적대 성향이 만들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거기에 황실이라는 뒷배경이 더해져 아무도 건들지 않는 성역의 가문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되자 장한도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씩 웃어 보였다.

“예에, 누님. 금방 대령하겠습니다요.”

어쩌다 보니 모처럼 실컷 포식하게 된 유설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아…….”

자리를 벗어난 유설은 볼록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한참 전부터 구석진 곳에서 철운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녀를 발견한 유진산이 흐뭇하게 웃어 보일 찰나. 누군가가 은밀히 다가와 유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너 잠깐만 이리와 봐.”

머리를 양 갈래로 딴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 철가장의 말괄량이로 소문난 아련이었다.

어리둥절한 유설이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나? 왜에?”

“잠깐만 와봐.”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산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또래와 얘기를 나눠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아이였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친구를 사귀어 봐야겠지.’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철운비와 몇 마디를 더 나눈 그도 자리를 마무리했다.

“몸이 회복되려면 좀 더 쉬셔야 하오. 무리하지 마시고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좋겠소.”

철운비와 유진산은 마주 포권을 건네었다.

“오늘 신병이기를 만들어내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내게는 최고의 날이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기쁨은 마음이 통하는 벗을 사귄 것이라오.”

철운비도 유진산이 반로환동한 노인이며, 자신과 같은 연배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겉보기엔 백발의 노인과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도 그러하오. 다시 볼 때까지 부디 몸조리 잘하시구려.”

일이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인지 거처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예상대로 아직 손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련과 어디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결국은 둘이 친해지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저 싸우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나.’

철가장에서 준비해준 목욕물로 몸을 씻고 방에 들어오자 금세 몸이 나른해졌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는 손녀를 기다리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유설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좋은 친구를 만나다 보면 시간의 흐름도 잊게 되는 법이지.’

하지만 무려 한 시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슬쩍 잠이 들었을 찰나였다.

벌컥-!

방문이 활짝 열리며 유설이 후다닥 달려왔다.

“할배, 빨리 일어나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일찍 자고 내일 얘기하자꾸나.”

유설은 옆으로 누운 할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빨리 일어나봐. 할 얘기가 있어.”

“……뭔데?”

“아련이가 나보고 예뻐서 부럽대. 그리고 있잖아.”

“……그리고 뭐?”

잠시 뜸을 들이던 유설이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련이가 할배 좋아한대.”

손녀의 한 마디에 유진산은 잠이 확 달아났다.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막내아들의 늦둥이 손녀와 같은 또래 아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라고 얘기해주지 그랬어.”

“여기서는 내가 누이라고 하라며.”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래,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가 소싯적에 인기가 참 많긴 했지. 너도 날 닮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해.”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서 손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힛.”

“왜 웃어?”

“전에는 내가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잖아.”

유진산은 반대편으로 냉큼 돌아 유설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요 녀석이!”

“히히히히.”

까르륵거리던 손녀가 잠잠해지자 유진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까, 미리 짐이라도 챙겨둬.”

“알았어.”

이미 조용히 떠나기로 철운비와도 얘기가 끝난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봇짐을 하나씩 짊어진 유진산과 손녀는 조용히 이곳에서 빠져나왔다.

철가장의 장원 입구.

대문 앞에서 유설이 머뭇거렸다.

“왜 그러고 있어?”

“할배, 나 잠깐 깜빡한 게 있어.”

“……?”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무엇을 두고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쌩하고 사라진 유설은 일각이 지난 후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맙소사…….’

손녀보다 조금 더 작은 키의 여자아이.

이곳에 있는 내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아련이었다.

유설이 깜빡했다는 게 친구와의 작별인사인 모양이었다.

“……산아, 어디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서글픈 표정으로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에 유진산은 당황했다.

“집에 가야지.”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지? 또 올 거지?”

심정이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련의 뒤에서 유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울고 있는 손녀의 친구를 내버려둔 채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도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그래. 또 보자꾸나.”

해맑은 아이의 미소에 유진산도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철가장을 빠져나온 조손은 바로 개봉의 흑야방으로 복귀했다.

유진산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방주인 풍호와의 만남을 가졌다.

“안색이 좋으신 것을 보니, 철가장에서의 일이 잘 풀리셨나 봅니다.”

“모두 자네들 덕분이지. 어디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게.”

용살창을 건네받은 풍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광장히 멋집니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최고의 명인이 만들어준 신병이기일세. 용화창은 우리 설이가 가지고 있지.”

“정말 부럽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음. 좋은 소식이라니?”

풍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대 범어에 능통한 인물을 찾았어요. 아마도 그자라면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을 손쉽게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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