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천하명인 철운비 (2)
이제 남은 것은 가격에 대한 협상이었다.
유설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예요?”
“신병이기를 제작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더는 바랄 것이 없소. 하지만 철가장의 규정상 대가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 가치는 알아서 책정해주시오.”
주고 싶은 만큼 지급하라는 얘기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재물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단지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철가장이 지켜온 중립의 원칙이 깨지기 때문이었다.
“그, 그럼 한 냥만 줘도 돼요?”
철웅방의 가주 철운비.
중원 제일의 명인인 그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설이 흥분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전음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 우리 땡잡았어!
- 녀석. 이제 집안의 가보가 될 물건들인데, 가치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냐. 화룡신창을 녹이고 만든 가보가 엽전 한 냥이라면 조상님들이 무덤에서 뛰쳐나올 게다.
- 할배 돈 없잖아.
자신의 주머니 사정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산도 아무 생각 없이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없지만, 너한테는 값진 보물이 하나 있지.
- 내, 내 보물……?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설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소림사에서 선물 받은 야명주.
어두울수록 밝은 빛을 발하는 이 보석은 같은 크기의 금보다 수십 배나 비싼 가치였다.
-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구해주마. 일단 그것으로 계산해.
- 힝…….
품속을 뒤적거리다 빠져나오는 유설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보물인 야명주를 토해내는 게 아까운 것이리라.
하지만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거 드릴게요.”
야명주라면 값비싼 철가장의 무기를 수십 자루나 구매할 수 있는 가치였다.
역시나 철운비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것은 야명주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기술이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 목숨을 걸고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 볼 테니, 그럼 믿고 맡겨 주시오.”
초인적인 유설의 감각에 그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벅찬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곧바로 작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화룡신창을 움켜쥐고 용광로로 향하는 뒷모습에는 비장함마저 보였다.
그리고 남겨진 장인들은 뿌듯함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삼촌,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저렇게 불타오르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그럴 수밖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실 게다.”
“그런데 무턱대고 진규의 창을 녹여도 되는 겁니까? 이 아이들이 누군 줄 알고…….”
“언제부터 우리 철가장이 손님을 가려가며 의뢰를 받았는가. 나는 그저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해드리고 싶구나.”
그리고 의뢰자의 내력을 묻지 않는 것이 철가장의 원칙이었다.
그들은 가주가 유진산에게 전음을 받은 내용을 모르기에, 혹시 모를 일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근심이 전부였다. 그들의 반응이 평온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나라에 무기를 진상하는 철가장에는 관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까.
그때 철웅의 시선이 다시 유설을 향했다.
“아버지가 저렇게 불타오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아주 근사한 창이 완성될 게다.”
“와아……. 빨리 보고 싶다.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철웅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쪽 세계에서 우리 아버지는 신수(神手)라는 예명으로 불린다. 신의 손을 가졌다는 얘기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련에 실패한 적이 없으니, 아마도 열흘 안에는 완성될 게다.”
명품이 탄생하기 위해선 제련에 성공할 때까지 녹이고 다시 제작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작은 오류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웅이 예측한 기간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기다림은 하루가 일 년과도 같은 법.
“열흘…….”
유설은 알지 못했다. 신의 손을 가진 그가 열흘이라면, 일반적인 장인은 수십 년은 걸려도 이루지 못하는 것임을.
그리고 철웅은 유설의 중얼거림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래, 고작 열흘이면 된다는 얘기다. 어지간한 명품도 반나절이면 뚝딱 만드시는 분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어쨌거나 창이 완성될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면서 기다리는 게 좋겠구나.”
이런 외진 곳에서 열흘이란 지루한 시간을 어찌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가보를 맡기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의 전음을 받은 유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장인 중 한 명이 앞장서서 아이들이 머물 곳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따라오너라. 며칠 머물기엔 불편하지 않을 게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가문이어서 그런지, 무림의 세가와는 장원의 구조가 좀 달랐다.
크고 웅장한 건축물은 없었지만, 아담하고 정갈하게 지어진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때 천천히 뒤따라 걷던 유진산의 고개가 좌측으로 향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좌측으로 보이는 아담한 전각
슬쩍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여자아이가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유진산을 바라보던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얼른 숨어버렸다.
쾅-!
‘웃기는 녀석일세.’
그 모습에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장인이 피식 웃었다.
“철웅 형님의 딸이다. 아무도 못 말리는 철가장의 말썽꾸러기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그 순간 유진산이 옆에서 걷는 손녀에게 전음으로 농담을 건넸다.
- 너랑 똑같구나.
- 아니야. 나는 말썽 안 피워.
- 네가 애기 때 말이다. 할아버지 등에다 오줌 싸고, 밥 달라고 울고불고한 거 기억 안 나는 모양이구나.
- 나는 그런 적 없어!
유설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극구 부인했다.
손녀를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한지 유진산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참을 소리 없이 웃던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 방금 그 녀석이랑 친구 해보는 게 어때?
- 싫어, 나는 친구 필요 없어.
- 왜? 또래랑 어울려서 놀아야 재밌지.
- 나는 할배랑만 놀 거야.
- 그래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든든하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친구를 사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안내해온 장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늑한 방 하나였지만, 아이 둘이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머무르거라. 이모들한테 얘기해둘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저기 보이는 전각으로 오고.”
“고맙습니다.”
안내를 맡은 인물이 사라지자 유설이 먼 곳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 어디 좀 갔다 와도 돼?”
뜬금없이 혼자 어딜 다녀온다는 말인가.
유진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갑자기?”
“수련하고 싶어…….”
예상대로였다. 한동안 제대로 된 수련을 못 했으니, 몸이 근질근질할 수밖에.
멀지 않은 곳에 인적이 드문 초원과 지세가 평탄한 산이 있었기에 수련 장소는 충분할 터.
여기서 창이 완성되기만을 죽치고 기다리는 것보단 의미가 있을 듯했다.
“대신 먼 곳으로는 가지 말고,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한다.”
“알았어. 백보신권을 터득해서 할배한테 꼭 보여줄게.”
유진산이 화들짝 놀라는 시늉으로 물었다.
“설마 또 나한테 위력을 시험해 보려고?”
“히히.”
아니라고 얘기하지 않는 것을 보니 내심 불안했지만, 하나뿐인 손녀가 뭘 하든지 예뻐 보이는 게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유진산은 흠칫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또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조금 전의 그 아이였다.
전각 뒤에 숨어서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숨어버렸다.
뭔가 찝찝했지만, 고작 아이에게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유설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 그럼 다녀올게.”
“오냐. 수련하다가 배고프면 바로 돌아와.”
“응!”
유설은 마음이 급한지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전각의 지붕 위를 새처럼 날아가던 작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없어져 버렸다.
홀로 남은 유진산은 방으로 들어와 드러누웠다.
머리 뒤로 깍지를 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보신권이라……. 배워 두면 유용하긴 하겠지.’
이미 손녀에게 가문의 무공을 모두 알려주었지만, 권법 중에서는 마땅한 게 없었다.
대부분의 격투술도 호현의 무사들과 대련을 하며 스스로 터득한 것일 뿐,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함께 사용이 가능한 백보신권을 익힌다면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따라가서 익히고 싶었지만, 누군가는 남아서 가보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모처럼 혼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시간은 멈춰있는 듯했고, 지루함은 더해져 갔다.
묵묵히 누워있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다시 대장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눈요기라도 하며 심심함을 달랠 요량이었다.
탕-! 탕-! 타탕-!
조금씩 해가 지고 있음에도 요란한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면 방해가 될 수 있었기에, 멀찍이 떨어진 적당한 곳에 자리를 트고 앉았다.
‘이게 바로 명인들의 모습인가? 하나같이 대단하구나.’
그들이 움켜쥔 연장에는 마치 영혼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유진산의 옆에 털썩 앉았다.
머리를 양 갈래로 딴 그 여자아이였다.
“너 이름이 뭐야?”
기껏해야 손녀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돗토리 같은 녀석이 초면부터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반로환동을 하기 이전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산.”
“산이? 내 이름은 아련이야, 철아련. 나는 여덟 살인데, 너는 몇 살이야?”
반로환동이 뭔지도 모를 아이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귀찮다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부턴가 잊고 살아서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아마 너보다 열 배쯤 많을 게다.”
“푸힛! 재밌어.”
농담이라고 생각한 아련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 모습에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할아버지는 너랑 장난할 나이가 아니야. 저리 가서 놀아라.”
그 순간 아련이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트렸다.
“푸히힛. 너 정말 재밌다. 어디서 왔어?”
“아주 먼 곳에서 왔다.”
“근데 아까 걔는 누구야?”
“…….”
마치 심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왜 이렇게 귀찮게 군단 말인가.
그때 아련이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재촉했다.
“빨리 말해봐. 아까 예쁘게 생긴 그 애는 누이 맞지? 그렇지?”
“너는 몰라도 돼.”
“그럼 혹시……?”
유진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도망칠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를 벗어난다고 한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아련이 어깨를 계속 흔들자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맘대로 생각하거라.”
“그럴 줄 알았어.”
“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련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자신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심술 난 듯 물러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것참, 이상한 녀석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