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져와~ 전부 내 거니까 (2)
개봉에 도착한 조손은 곧바로 흑야방으로 향했다.
설산표국의 지하 밀실.
유진산은 풍호와 마주 앉아 그간 있었던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파계승을 그냥 내버려 두고 온 것입니까?”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떠났지 뭐. 같이 있어 봐야 비급만 빼앗길 테니까.”
“기회가 있을 때 죽여서 후환을 없애지 그러셨습니까?”
유진산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끔 미친 짓을 좀 해서 그렇지,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보다 보니 좀 딱하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아도 어르신께서 떠나신 후 그자에 대해 좀 더 알아봤습니다.”
“어서 들어보고 싶군.”
풍호는 미리 준비해 놓은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펼쳤다.
“오래된 일이지만, 파계를 당하기 전의 정혜대사는 소림사에서 제일가는 무공광이었습니다. 방장의 자리를 승계받을 위치까지 갔지만, 사제인 정명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요.”
유진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에 목을 매지만,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지.”
“예. 어쨌거나 당시만 하더라도 정혜대사는 소림사의 기둥이었습니다. 불가의 삼대 고승에 포함될 정도로 승려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하네요.”
“나도 잘 아네. 정말이지 대단했었지. 내가 은퇴하기 전까지도 그 명성이 강호 전체에 자자했으니까. 그토록 강한 자가 어찌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풍호가 자료 중에서 문건 하나를 찾아 내밀었다.
“기록을 보면 누군가에게 패배한 뒤로부터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었던 인물이었다.
도대체 그 누가 그를 제압했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몹시 궁금해졌다.
“그가 결투에서 패하다니? 검후에게 당했나?”
“아닙니다. 검후에게 당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지요. 이름조차 모르는 새외무림의 고수였다고 합니다.”
새외무림(塞外武林)은 외지의 세력을 뜻하며, 중원의 무림인들보다 한 수 아래로 쳐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군다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게 소림사의 자존심이 짓밟힌 것이다.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일화였다.
“새외에 그토록 강한 자가 있었다고?”
풍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종이를 펼쳐 보였다.
“확실합니다. 이 자료에도 같은 맥락의 문건이 있어요. 천축에서 온 고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천축이라니…….
무림맹의 창룡대부터 검후의 행적까지 모두 그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어쨌거나 무너진 소림사의 자존심은 모두 정혜가 짊어졌겠군.”
“예, 저 같아도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소림사에서 그에게 의지했던 만큼 어깨 또한 무거웠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토록 완벽했던 사람이 어찌…….”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없네.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더욱 큰 번뇌에 빠지기도 하는 법이지.”
유진산은 탁상 위에 깍지를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책과 힘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심마(心魔)를 만들어낸 것인가?’
어떠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는 듯했다.
역근경까지 익힌 그가 미쳐가면서까지 더욱 강한 절세신공을 찾아다니던 이유.
무슨 사연이 더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현재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풍호가 눈빛을 빛냈다.
“그러면 앞으로 그 파계승의 행보는 어찌 될까요?”
“더는 숭산에 머무를 이유가 없을 테니, 이제는 우리를 찾아 떠돌겠지.”
“위험하지 않겠어요?”
“언젠가는 다시 마주치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적어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전까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하긴, 따지고 보면 어르신이 잘못한 것은 없는 셈이지요.”
어쨌거나 파계승과의 약조는 지킨 셈이었다.
자신들의 역할은 대환단을 대가로 화염굴의 입구를 찾아주는 것까지였으니.
그냥 무시했으면 교룡이 동굴에서 기어 나와 그를 씹어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유진산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맡긴 그 비급 말이야. 해독이 가능하겠는가?”
풍호의 시선이 밀실의 광장 구석을 향했다.
그곳엔 세 명의 집사가 머리를 맞대고 비급을 살펴보고 있었다.
“양호!”
그의 외침에 지목당한 집사가 재빨리 다가와 기립했다.
“예, 방주님.”
“해독은 어찌 되고 있어?”
“아주 오래된 고대의 범어라 풀어내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두 시진 동안 겨우 한 문장을 해독했어요.”
이대로라면 최소한 십 년은 걸릴 터였다.
예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법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또 하나.
한 가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었다. 과연 이 서적이 누군가의 장난질이 아닌 절세신공의 비급이 확실한지 말이다.
왜냐하면, 불문사자신공이란 무공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전혀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첫 문장은 뭐라 쓰여 있던가.”
“이러한 극양(極陽)의 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체에서 양기를 제거하여 음양의 조화를 맞춰야 한다고 합니다.”
유진산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허탈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이런 망할…….”
양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답답한 녀석아. 이 무공을 익히려면 거세부터 해야 한다는데, 그럼 좋아해야 할까?”
“……맙소사.”
내심 손녀와 함께 허공답보를 펼치며 무림을 종횡하는 꿈을 꿔보았던 유진산이었다.
그러나 거세를 하면서까지 절세고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후도 없었다.
꿈은 일장춘몽이 되고야 말았지만, 그렇다고 비급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배우지 못한다면 손녀라도 익히게 하면 그뿐.
“좀 더 빨리 해독할 방법은 없겠는가.”
“강호는 넓고 명숙은 넘쳐나는 법이지요. 분명 해독에 능통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좀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말일세.”
유진산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들었다.
헝겊을 벗겨내자 눈부시도록 찬란한 휘광을 발하는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것은……?”
“내가 직접 교룡의 목을 따고 얻은 전리품이지. 우리 설이가 좀 돕기는 했지만.”
절대고수에 비견되는 전설상의 신수를 초절정고수인 그가 어떻게 잡았다는 말인가.
짧은 순간 풍호의 눈빛에 의심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진위를 따져봐야 득이 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어르신. 교룡의 영석이라면 최고의 내단이나 다름없습니다. 복용하신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내공을 얻게 되실 겁니다.”
“내공은 이미 충분해. 그리고 내공이 꼭 강함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이것은 창을 만들 때 사용할 생각이네. 언제까지고 나무때기를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풍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르신 정도면 어떤 무기를 들던 마찬가지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지. 기(氣)를 다룰 수 있으면 갈대로도 바위를 가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무기가 신병이기라면 얘기는 달라지는 법이네.”
“무슨 차이가 있는지요?”
유진산이 옆에 내려놓은 화룡신창의 창날을 들어올렸다.
“이것을 들면 진기의 흐름이 자유롭고, 초식의 위력도 더 강해지더군. 하지만 내 체구에 비해 날이 너무 커서 사용하기가 마땅치 않아.”
이제야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풍호가 손뼉을 부딪쳤다.
“그럼 그걸 녹인 후 두 자루로 만들 생각이시군요?”
“그래. 이 정도의 현철을 녹인다면 두 자루는 충분히 나오지 않겠나. 우리 설이와 한 자루씩 나눠 가져가질 생각이네.”
현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미지의 운석에서 추출한 금속을 뜻한다.
하지만 단단한 만큼 재련이 쉽지 않아 어지간한 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다루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적절한 기술을 가진 대장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유진산에겐 호현의 대장장이에게 들었던 정보가 있었다.
“내 듣기로는 하남의 철가장이 이 방면으로는 제일이라더군.”
옆에서 기립하고 있던 양호가 아는 척을 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곳에 중원 제일의 명인이 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어요.”
“소문이 사실이라니 다행이로구만. 위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그가 뭔가를 기억해내고는 환한 미소로 말했다.
“양유현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을 타고 이틀쯤 걸릴 겁니다.”
유진산은 그들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후 비급과 화룡신창을 회수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군. 도움이 많이 되었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갈 길이 머네. 하늘에 올라가 별을 떨어트려야 하는데, 머뭇거릴 시간이 어디 있겠나.”
최종목표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무공을 지닌 무림맹주였다. 창룡대를 움직여 유가장을 박살 낸 진정한 흉수였으니.
지금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였기에, 과정을 착실히 준비해나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걸음을 나아가야 할 시점이었다.
‘근데 얘가 어디 갔지?’
한참 전부터 손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산은 지하 왕국과도 같은 흑야방의 본부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황실의 비밀대피소로 지어진 곳이었던 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역시나 미로와 같은 이곳에서 아이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헤집고 다니길 한참 후.
그의 발걸음이 어딘가의 드넓은 밀실 입구에서 멈추었다. 흑야방의 연무장으로 쓰이는 곳 중 하나였다.
“거기서 뭐해?”
홀로 쪼그려 앉은 유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소림사에서 획득한 백보신권(百步神拳)의 비급이었다.
“할배, 거기 가만히 있어봐.”
유진산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휩싸였다.
엉거주춤 일어선 손녀가 돌연 기마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왜?”
“가만히 있어.”
설마 백보신권을 자신에게 시험해보려는 것일까?
역근경에 비교할 바는 안 되지만, 위력만큼은 명불허전인 소림의 상승무공이었다.
화들짝 놀란 유진산이 몸을 움찔거리는 찰나.
유설의 호두 같은 주먹이 섬전처럼 뻗어 나오며 파공음을 뿜어냈다.
파앙-!!
바람 한 점 없는 밀실에 광풍이 불어 닥치며 유진산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휘리리릭-!
“으윽!”
다행히도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권풍(拳風)만을 뿜어낸 것이었으니.
그런데도 기세만큼은 엄청났다.
“이 녀석이 할아버지를 놀려?”
말과는 달리 그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백보신권을 수련한지 고작 하루 만에 기초단계인 형(形)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초식을 연마한 건 아니지만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손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히히. 시원했어?”
어디 시원하다 뿐이겠는가.
“아주 오싹하구나. 할아버지한테 또 장난치면 혼나!”
할아버지의 야단에 시무룩해진 유설이 고개를 푹 숙였다.
“……”
“그건 그렇고, 바로 출발해야 하니 어서 채비하거라.”
“……우리 어디가?”
답변을 고민하던 유진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륙 년 전쯤 아기였던 손녀가 호현의 대장간에서 청룡언월도의 모조품을 갖고 싶다고 떼를 쓰던 상황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네 선물을 만들러 가는 거야. 아마도 마음에 들어 할 게다.”
“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