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소림사의 고인물 (1)
“할배, 나 몸이 너무 뜨거워…….”
막대한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대환단을 먹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서 영단의 기운을 단전으로 밀어 넣거라!”
유설은 할아버지의 외침에 따라 가부좌를 틀고 진기의 일주천을 시작했다.
전신의 혈도를 빠르게 순회하는 엄청난 기운.
어지간한 무림인은 감당하지 못하고 즉사할 만큼의 엄청난 힘이 몸속에서 용솟음쳤다.
“어떡해! 내 내공이 없어지고 있어.”
유진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녀가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보편적으로 영약을 복용하면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이 오 할을 넘지 못한다.
아이의 전신을 감싸고 일렁이는 기(氣)의 움직임.
이것은 단전으로 축적되지 못한 진기가 소멸되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아까워할 것 없다. 원래 네 것도 아니지 않느냐.”
“힝…….”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역근경을 익힌 파계승이라면 손녀의 일주천을 도와줄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영단의 흡수율을 최대로 높일 수 있을 터.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좀 도와줘.”
그는 한쪽에서 코를 후비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왜?”
“빨리 일을 마쳐야 네게 줄 무림기보를 가지러 가지.”
예상외로 그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거 먹으면 생각해볼게.”
눈을 게슴츠레 뜬 파계승이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손끝에 올려진 검고 동그란 물체.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미친 땡중이 어디서 코딱지를…….’
더군다나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본다니?
결단코 손녀가 보는 앞에서 코딱지를 먹을 수는 없었다.
“너도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화룡신창만 있다고 회염굴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찾을 수 있어!”
“고집부려도 소용없다. 무림기보가 너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회염굴과 가까워져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테니까.”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파계승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그럼 어떡해?”
백팔십도 변한 그의 태도에 유진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우릴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주마. 회염굴을 찾을 때까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계승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만 믿어, 형아!”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어느새 유설의 등 뒤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동시에 투박한 노인의 손바닥이 다람쥐 같은 손녀의 등을 완전히 감쌌다.
찬란하게 빛나는 역근경의 광채.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후한 기(氣)의 파동은 더할 나위 없이 웅장했다.
따듯하고 포근한 불문의 기운에 몸이 나른해진 것일까? 두 눈이 풀린 유설은 입술을 살포시 벌렸다.
“……이상해. 기분이 너무 좋아.”
손녀 옆에 쪼그려 앉은 유진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어서 정신을 집중해서 영단의 진기를 최대한 축적하거라.”
“……응.”
아이의 피부에서 빠져나와 일렁이던 기(氣)의 아지랑이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대환단의 기운을 한 톨의 손실도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전신의 혈도를 따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일주천.
시간이 흐를수록 유설의 단전에는 내공이 끝도 없이 축적되어 갔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돌연 파계승이 아이처럼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끝!”
드디어 작업이 끝이 난 것이리라.
유진산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손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반짝이는 안광.
그리고 맑은 눈동자에는 정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좀 어때?”
유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 지금 엄청 세진 것 같아. 힘이 아주 넘쳐.”
파계승이 유설의 주위를 맴돌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천하무적 비구니! 오 갑자! 오 갑자!”
“오, 오 갑자?”
유진산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의 말은 자신의 손녀가 오 갑자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고작 여덟 살짜리가 삼백 년의 내공 수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할배, 나 그럼 빨리 다녀올게.”
유설은 넘쳐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는 듯했다.
경공이라도 펼쳐 억눌린 진기를 분출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 그래. 풍호 아저씨한테 맡겨뒀으니, 어서 가지고 오너라.”
“응, 조금만 기다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녀의 신형이 눈앞에서 쌩하고 멀어져 갔다.
한 호흡이 지난 뒤에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허허. 이대로라면 천하십대고수에 끼는 것도 시간문제로구나.’
유진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이 성장하는 모습에 뿌듯하지 않을 할애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의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찰나였다.
“형, 이제 우린 뭐할까?”
또 시작이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 될 것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 승려였기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금방 올 테니, 가만히 앉아서 조금 기다리는 게 어때?”
“…….”
그가 입을 꾹 닫자 유진산은 내심 아차 싶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조금씩 일그러지는 파계승의 얼굴.
“죽일 거야.”
“왜, 왜 그래?”
이 미친놈이 갑자기 또 왜 이런단 말인가.
유진산은 내심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나쁜 놈…….”
“나? 아까는 형이라며.”
긴장감이 극에 달할 찰나.
유진산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동공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내 뒤에 누가?’
뒤를 돌아본 유진산은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가 왼쪽 어깨를 움켜쥔 채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에 너덜너덜한 모습.
잊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혈염신마?’
참회동에서 탈출한 마교의 대호법이었다.
사찰의 입구 방향으로 간 혈염신마가 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헤어질 때만 해도 멀쩡했던 그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설마 탈출에 실패하고 도망치다가 이쪽으로 온 것일까?
중요한 것은 파계승이 그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인다.”
외마디와 함께 파계승이 다짜고짜 혈염신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혈염신마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붉은 강기에 휩싸인 오른손이 다가오는 금빛 기류를 매섭게 후려쳤다.
콰앙-!!
일합(一合). 고작 첫 번의 격돌로 둘의 실력 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크윽!”
외마디 신음과 함께 혈염신마의 신형이 후방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반면에 파계승은 조금의 충격도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를 향해 나아가며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유진산은 멀찍이 떨어져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싸움이었다.
‘광인(狂人)이 되었음에도 깊은 곳에 남아있는 본능이 마기를 싫어하는 것이로군.’
황금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져 눈부신 번갯불을 토해내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악착같이 버티는 혈염신마도 대단했지만, 그를 압도하는 파계승의 무공이 더 놀라웠다.
아무리 부상을 당했어도 멸문당한 마교의 대호법이었다.
그런 그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한 채 수비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꽈앙-!!
둔탁한 굉음과 함께 둘의 거리가 멀찍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 수십 합을 겨루고 나서야 서로가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이리라.
사색이 된 혈염신마는 눈알을 굴리며 퇴로를 찾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곧이어 유진산을 발견했다.
“도, 도와다오!”
유진산은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구나. 죽기에는 참 좋은 날이야.”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이 도울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설프게 파계승에게 대들었다간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무엇보다 자꾸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칫 그와 한통속으로 엮였다가는 파계승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나, 나 혈염신마일세! 너와 함께 있던 대협은 어디 있는가!”
유진산은 파계승이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더 늦기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혈염신마를 꾸짖기라도 하듯 유진산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보아하니 나보다 어린놈 같은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이, 이놈!”
혈염신마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파계승이 다시 그에게 공격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싸움은 오래 가지 않을 듯했다.
유진산은 느긋한 표정으로 뒷짐 진 채 헛기침을 했다.
“흠흠.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눈알이나 부라리고 말이야. 참회동에서 탈출한 마두 같은데, 법력이 높은 고승을 만났으니 오늘이 제삿날이겠구나.”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쩌억-!!
혈염신마의 허리가 새우처럼 꺾였다.
기어코 파계승의 일장이 그의 복부에 쑤셔박힌 것이다.
“크헉!”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한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갔다.
쩌억-! 쾅-! 콰직-!
뒤이어 이어지는 무자비한 폭행.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에는 그의 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닭 모가지를 틀어쥐듯 파계승이 혈염신마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눈을 노려봤다.
한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무림의 마두가 허무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역근경이라……. 정말이지 대단한 무공이로구나. 우리 설이도 저런 거 하나쯤 배워두게 하면 참 좋을 텐데.’
오직 일인전승으로만 이어지는 소림의 제일무공이었다.
파계승을 꼬드겨볼까 생각하던 유진산은 이내 단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대였기에 지금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진산에게 아직 의문이 남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이 누구로부터 도망쳐 왔던 거지?’
그 누가 혈염신마를 저 지경으로 망가트렸던 것일까.
어차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부상이 아니었다면 그가 조금 더 버텼을지도 몰랐다.
예상보다 그의 의문은 쉽게 풀려버리고야 말았다.
혈염신마의 시신을 움켜쥔 파계승의 시선이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
그곳에서부터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거대한 염주를 목에 매단 고승이었다.
분명 천천히 걷는 발걸음이었지만,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십여 장씩 좁혀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을 확인한 유진산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삼사십여 년 전.
자신이 무림에서 은퇴를 준비하고 있을 시절, 고강한 무공으로 무림을 종횡했던 한 젊은 승려가 있었다.
과거 무랭맹에서 보았던 그의 이목구비와 일치했다.
당대 소림의 제일 고수이자 천하십대고수에 포함된 인물.
‘………혜광?’
파계승과 혜광대사는 침묵을 지킨 채 서로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긴장감 속에 숨 막히는 고요가 흘렀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혜광의 입이 달싹였다.
“사부님. 아직도 심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겁니까.”
그의 한마디에 유진산은 또 한 번 놀랐다.
‘혜광대사가 저 파계승의 제자였단 말인가?’
정점에 선 거물들의 만남에 그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진산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돌연 파계승이 혈염신마의 시신을 휙 내던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싸우자!”
“오늘은 사부님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 마두만 넘겨주시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일순간 유진산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혜광대사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끌려가면 참회동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 할 터.
다행히도 파계승은 자신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 형 건들면 죽여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