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밝혀지는 비화 (2)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백 명이 넘는 무승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그 수는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유진산이 퇴로를 물색할 무렵. 나한들의 틈새에서 밤톨만 한 동자승이 검지를 내뻗으며 소리쳤다.
“사백조님, 저 녀석도 한패입니다!”
사사건건 참견하던 그 녀석이었다.
점혈이 풀리자마자 또 오지랖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에 달려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때 한 고승이 유진산과 유설을 번갈아 보더니 무엇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대성일갈했다.
“이 사악한 마두들! 네놈들의 정체가 바로 음양쌍괴렸다!”
소림에도 나름대로 정보망이 있을 테니, 정체가 탄로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뚫을 수 있겠어?”
할아버지의 질문에 유설이 어두운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한번 해볼게.”
지금껏 자신의 손녀가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눈 앞에 펼쳐진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그 누가 이 무상의 진법 앞에 당당할 수 있겠는가.
백팔 명이 펼치는 대나한진은 절대고수조차 초라하게 만드는 무림최강의 진법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구나. 내가 시선을 끌어볼 테니, 먼저 빠져나가거라.”
“……할배는?”
유진산이 뭐라 입을 열 찰나.
돌연 손녀가 그의 옷을 움켜쥐고는 옆으로 확 잡아당겼다.
“……?”
얼떨결에 일 장을 밀려난 유진산은 어리둥절했다.
다소 경직된 아이의 표정.
도대체 무엇을 보고 유설이 이리도 긴장한단 말인가.
무심코 뒤를 돌아본 유진산은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조금 전 자신이 서 있었던 참회동의 입구.
그곳에서 한 노인이 백발을 휘날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벅-!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독한 마기(魔氣)가 휘몰아쳤다.
마교의 대호법 혈염신마. 극마(極魔)의 고수인 그가 기어코 족쇄를 풀고 나온 것이다.
“혈, 혈염신마가 탈출했다!”
“이럴 수가…….”
수행이 깊은 나한들은 미동조차 없었지만, 내공이 약한 승려들이 동요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한 고승이 앞으로 나서며 일갈했다.
“누가 겁을 먹는 게냐! 그 어떠한 마두라도 오늘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대연무장에서 봤던 혜운대사였다.
혈염신마가 그를 노려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동안 참회동에서 쌓아온 원한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땡중들, 오늘 모조리 다 죽여주마.”
“네 이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망동을 부린단 말이냐!”
혜운대사가 겁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곳은 소림사에서도 가장 깊은 참회동이었으니까.
사찰에서 무예를 익힌 승려들만 수천 명. 마교의 대호법이 아니라 교주였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혈염신마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유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대협. 비록 나한진이 무적의 진법이라 불리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능히 뚫을 수 있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의 태도에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적인 마두가 손녀에게 대협이라고 추켜세우며 협력을 제안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하던 녀석이 말이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고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다니?’
쪼그만 녀석이 할아버지한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승낙하다니. 자기도 나름대로 계산을 한 모양이었다.
다소 황당했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만큼 손녀에게 전음을 보내 봉인을 풀어주었다.
- 지금부터는 살풍창(殺風槍)의 사용을 허락하마.
그 순간 죽봉을 움켜쥔 유설의 기세가 달라졌다.
자세를 낮추며 출수를 준비하는 혈염신마와 음괴.
그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것일까? 나한진이 꿈틀대며 더욱 두터운 방벽을 형성했다.
“갑시다, 대협.”
“네!”
어깨를 나란히 한 둘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타탓-!
벼락처럼 쏘아져 나가는 두 개의 빛살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뒤를 보조하며 뒤따랐다.
백팔나한진의 한 지점을 향해 맹공을 퍼붓는 두 명의 절대고수.
무지막지한 공격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콰쾅-!!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십여 명의 나한이 튕겨 날아갔다.
“크윽!”
“큭!”
시작은 우세를 점한 듯했지만, 이렇게 쉽게 무너질 백팔나한진이 아니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또 다른 나한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아쳐 오는 공격 세례는 피할 방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유설이 움켜쥔 죽봉이 수십여 개로 갈라지며 다가오는 공격을 차단했다.
콰콰콰쾅-!!
음괴의 수비 뒤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혈염신마의 공격이 이어졌다.
붉은 마기에 휩싸인 양손이 두 명의 나한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쩌정-!
“컥!”
“크악!”
혈염신마의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신으로 기의 파동을 뿜어냈다.
반탄강기(反彈罡氣).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기의 장막이 다가오는 나한들을 밀쳐냈다.
콰쾅-!!
“지금이오, 대협!”
다급한 마두의 외침과 함께 유설이 공수를 교대하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타탓-!
유설은 비틀거리는 나한들의 틈새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작은 체구로 번갯불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도깨비 같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크게 감탄했다.
‘풍연진격세(風連進擊勢)?’
살풍창의 열여섯 번째 초식으로 자신은 흉내도 내지 못하는 동작이었다.
양손으로 짧게 움켜쥔 죽봉을 사정없이 흔들어 재끼는 모습은 신기(神技) 그 자체였다.
나한들이 계속해서 앞을 막아섰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갈 뿐.
투콱-! 콰콰콰콱-!!
“크윽!”
“끄억!”
드디어 나한진에 균열이 생길 조짐을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칠 혈염신마가 아니었다.
이를 악다문 그는 유설과 합류하여 미친 듯이 쌍장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었다.
콰쾅-! 콰콰콰쾅-!!
목적은 진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가는 것이다. 굳이 무리해서 힘겨루기할 필요가 없었다.
백팔나한진에 구멍이 생기자, 삼 인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타타탓-!
우여곡절 끝에 진법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놓치면 안 돼! 어서 저 마두들을 잡아라!”
“와아아아아!!”
나한진의 밖에도 이미 수백 명의 무승이 포진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들의 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맞서 길을 뚫어나가는 혈염신마와 음괴의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때 뒤따라 달리던 유진산이 돌연 방향을 틀어 지면을 박찼다.
타앗-!
붕 떠오른 그는 나한들의 틈새에 끼어있던 체구가 작은 승려를 날아찼다.
퍼억-!
“아악!”
옆차기를 맞은 동자승은 아프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고 뒹굴었다.
사사건건 일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정체를 고자질했던 그 녀석이었다.
“에끼, 싸가지 없는 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유진산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손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본격적인 탈주가 시작될 찰나였다.
“명호!”
멀찍이서 승려들을 지휘하던 혜운대사가 누군가를 불러 물었다.
“예, 대사님.”
“사대금강은 지금 어디 있는가.”
사대금강(四大金剛). 나한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공을 지닌 네 명의 승려들이다. 이들의 합격술은 능히 절대고수도 제압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흘 전쯤부터 달마동에서 참선 중입니다.”
“어서 가서 불러오너라.”
“하지만 방장스님의 허가가 없으면 그들을 불러낼 수가…….”
혜운대사의 이마에 핏대가 곤두섰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더냐!”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금강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규율을 어기지 않습니다.”
혜운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혹시 몰라서 혜광 사백께 사찰의 입구를 지켜달라고 부탁드렸으니까요.”
혜광대사는 명성이 자자한 무림의 십대고수 중 일인이며, 소림사의 제일 고수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혜운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혜광 사형이 움직였다고? 평소 방장스님의 부탁에도 꿈쩍 안 하는 사형이?”
“예. 아시다시피 사백께서 지금 묵언 수행 중이시라 대답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분명 고개를 끄덕여 보이셨습니다.”
“잘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예. 마두들은 절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 * *
한편 백팔나한진을 뚫고 탈출한 삼 인은 정신없이 도주하고 있었다.
좌측을 맡은 혈염신마가 막 덤벼들던 무승의 목을 틀어쥐었다.
터업-!
“대협, 왜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이오? 이렇게 잡고 목을 확 꺾으면 될 것을?”
우드득-!
그는 축 늘어진 시신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자신과 달리 급소를 피해서 공격하는 음괴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쩌억-!
유설이 또 한 명의 무승을 후려치며 참새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불쌍하잖아요.”
혈염신마는 다가오는 승려들을 쳐내는 와중에도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명성이 자자한 마두 같으신데, 땡중을 가엽게 여긴다는 게 말이 되오? 혹시 반로환동의 부작용으로 정신이 이상해지신 거요?”
“나는 반로환동 안 했어요. 아직 여덟 살이거든요.”
혈염신마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공을 보아하니 연배도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시오?”
“……농담 아닌데.”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한 이유는 다소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찰의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덤벼드는 승려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전황을 살펴보던 유진산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전각의 틈새에 낀 좁은 길목에 접어들 때였다.
“멈춰!”
유진산의 외침과 동시에 유설이 경공을 멈춰 세웠다.
혈염신마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정문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왜 멈추는 거지?”
손녀에게 예우를 갖춰주던 그가 유독 자신에게는 하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애써 마음을 비우며 자신의 뜻을 말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으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소.”
“출구가 또 있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풍호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사찰에 경종이 울리면 입구부터 막힌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체된 이후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참회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길이 있소.”
여기까지 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니. 혈염신마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완전히 미쳤군. 나는 절대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그럼 여기서부터 우린 갈라져야겠소.”
혈염신마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유설을 바라보았다. 그를 설득해주길 원하는 것이리라. 아니면 자신과 함께 떠나거나.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야 말았다.
“나는 원래 우리 할배랑만 다녀요!”
“대, 대협……?”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유진산은 그를 뒤로한 채 손녀의 손을 잡아끌며 물러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앞을 막아서는 승려는 거의 없었지만, 후미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마치 사냥감을 몰이하듯 따라붙는 무승들. 전각의 지붕 위에서도 나한들이 가득했지만, 단지 자세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쪽으로는 길도 없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유진산은 일거에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역으로 그를 설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마음이 생길 턱이 없었다. 자신에게만 반말을 찍찍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단념한 혈염신마는 음양쌍괴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서로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배, 나만 따라와.”
후미의 길을 가로막은 무승의 숫자가 수백 명이었다.
혈염신마의 도움 없이 손녀 혼자서 뚫고 나가기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응?”
“할아버지가 전에 얘기해주지 않았더냐.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가면 그뿐이라고.”
유진산은 오른손을 어깨 뒤로 잡아당겼다.
유가건곤장 제팔식 건곤이격(乾坤理格).
곧이어 활짝 펼쳐진 그의 손바닥이 전각의 벽면을 후려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벽면에 통로가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잔해들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크지 않은 구멍이었지만, 아이들의 체구로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가자!”
유진산과 손녀는 새로 생겨난 벽면의 틈새로 쏙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포위망을 좁혀오던 승려들은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곳은 허가 없이 출입하면 누구든 사지근맥이 절단 나는 금지구역이었다.
소림사의 무공비급과 경전을 보관하는 성스러운 장소. 장경각(藏經閣)이었으니까.
“와아~ 할배, 여기 책이 엄청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