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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81화 (81/238)

81화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어 (1)

개봉성(開封城). 낙양과 인접해 있으며,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도시다.

유설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번화가에 높게 치솟은 전각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행인들.

휘황찬란한 곳곳의 모습이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와……. 너무 멋있다. 할배는 여기 와봤어?”

모처럼 자랑거리가 생겼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럼, 당연히 와봤지! 할아버지는 안 가본 곳이 없어. 저쪽에 있는 건물 보이지?”

삼 층 구조의 거대 전각 세 채를 구름다리로 연결한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녀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우와……. 저기는 뭐 하는 곳이야?”

“저 안에는 다 있어. 연극도 하고, 찻집과 선물상점도 있지. 고급 요리도 팔고.”

“정말? 그럼 우리 저기 들어가서 놀다 갈래? 가보고 싶어.”

안달 난 강아지 같은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냐. 우선 볼일부터 끝내고 나서 구경시켜 주마.”

“약속해?”

“할아버지가 언제 거짓말한 적이 있더냐.”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다.

유설은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는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신난다. 히히.”

그렇게 둘은 번화가를 지나 다소 한적한 구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성 내의 구석에 이르자 담벼락에 둘러싸인 이 층 구조의 전각이 보였다.

“이곳인 것 같구나.”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입구의 현판에 각인된 설산표국(雪山鏢局)이라는 문구였다.

“할배랑 내 이름이 들어가 있어!”

“우리 설이, 글씨도 읽을 수 있어? 대단하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유진산은 짐짓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손녀의 얼굴에 보조개가 활짝 피어올랐다.

“나 글씨 많이 알아. 맹 이모한테 배웠어.”

패도문에 머무를 시절 손녀의 글 스승은 백규의 아내인 맹련화였다.

남들보다 학습 능력이 빠른 유설은 이미 대부분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표국의 모습은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늘어선 짐마차에서 쟁자수들이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으며, 훈련 중인 표사들도 보였다.

장원에 들어서기 무섭게 누군가가 재빨리 다가왔다.

복장이 수려하고, 머리에 건까지 두른 걸 보니 표두인 듯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묻지도 않고 따라오라니.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표두가 허리춤밖에 안 되는 아이들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이 어색했던 것일까? 쟁자수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유진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표두가 쟁자수들에게 손짓하며 그들의 관심을 돌렸다.

“중요한 표물이니, 한눈들 팔지 말고 단단히 점검해!”

“예!”

우렁찬 목소리의 쟁자수들은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유진산과 손녀는 그를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표국이라면 의심받지 않고 각지의 정보를 취급할 수 있지. 정말이지 완벽한 위장이군.’

모르고 왔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내부의 모습도 감쪽같았다. 유난히 사무원들이 많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내부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자 표사들이 지키고 있는 방이 나타났다.

단순히 서재가 보관된 곳으로 보였지만, 무엇인가의 장치가 있을 터.

예상대로 표두가 무엇인가를 만지는 순간 기관이 작동했다.

드르르륵-!

책장의 틈새로 드러난 공간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놀랍군. 성내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고서를 살펴보다가 우연히 찾아낸 비밀장소입니다. 저희가 이곳을 매입해 총타를 세운 결정적인 이유이지요.”

“비밀장소치고는 너무 깊은데?”

“아마 궁성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였던 듯합니다. 지금은 중간에 막혀있지만.”

“그렇군. 그런데 그런 걸 내게 얘기해도 되는가?”

표두는 유진산을 내려다보며 씩 웃어 보였다.

“저를 기억 못 하십니까?”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게나 뺀질거리던 흑산도의 만수 녀석을.”

“……어르신.”

흑산도(黑山盜). 과거 양주산에서 손녀를 양육하며 숨어 지내던 시절, 연을 맺었던 관군 출신의 산적들이었다.

섬서의 갑부 세력인 구양상회의 자산을 훔쳐 떠난 그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얼마 전까진 상상조차 못 했었던 일이었다.

만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준 것이 감격스러운지 눈물을 글썽였다.

“울지 마 이 녀석아, 정드니까. 풍호는?”

당시 채주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흑야방의 방주가 되어있을 터.

만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도착했어요.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퉁이를 돌자 백여 평 규모의 광장이 나타났다.

그동안 꼭꼭 숨어있던 흑야방의 본거지.

수없이 많은 책자와 서류 더미의 틈새에서 수십 명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이 모습을 비추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

인파의 틈새에서 낯익은 일남일녀가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

흑산도의 채주인 풍호와 총관이었던 현희였다. 그중 현희는 아이를 가졌는지, 배가 조금 불러있었다. 짝이 누구일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산과 손녀를 마주한 그들은 조금 전의 만호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로환동을 해서 어려졌지만, 얼굴의 형태와 윤곽이 어찌 변하겠는가. 그들은 유진산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유난히 큰 눈과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예쁘장한 여자아이. 유설의 정체도 말이다.

“아가. 전에 현희 언니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

막상 그녀를 마주한 손녀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무려 오 년도 더 지난 일이었으니 어색할 수밖에.

“설아! 언니 기억해?”

현희가 먼저 불러주자 유설이 움찔하다 말고 냉큼 달려갔다.

“현희 언니!”

서로 끌어안고 좋아하는 둘의 모습에 유진산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누가 보면 모녀가 상봉한 줄 알겠구만.’

아기가 보고 싶다고 매일같이 찾아와 무공을 알려주며, 업고 다니던 현희의 모습이 생생했다.

당시의 손녀는 고작 두세 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이름까지 외치는 손녀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싸안고 좋아하는 둘을 뒤로한 채 유진산과 풍호가 마주했다.

“다시 뵐 줄 알았습니다, 어르신. 풍채가 더 좋아지셨군요.”

“너도 아부가 더 좋아졌구나. 애한테 풍채가 느껴진다고 하는 걸 보니.”

“하하. 여전하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흑야방의 정체가 너희들이었다니, 자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완이 좋았어?”

풍호는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끝은 좀 안 좋았지만, 제가 그래도 중앙군의 장교 출신이잖아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좀 앉으시지요?”

“그리하지.”

한편 손녀는 현희를 따라 쫄래쫄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시설을 구경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이 자리에 앉자 풍호가 찻잔을 채워주었다.

“여러 사연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하남으로 넘어올 당시 가진 건 넘쳐나는 자금뿐이었어요.”

“그랬겠지. 무림맹의 추격을 받고 있었으니 정상적인 활동도 불가능했을 테고.”

“예. 그래서 저희는 우선 음지의 세력들부터 닥치는 대로 인수했습니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뭐 그런 부류들?”

“네, 시작은 그랬지요. 과정에서 인재들도 많이 영입하고, 공격적인 투자로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장한 건 일월문과의 협약을 맺은 뒤부터였습니다.”

유진산은 강 위에서 접선했던 사파의 고수가 자신을 일월문이라 소개한 것을 기억했다.

“……일월문이라. 실력은 꽤 있는 곳 같더군.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심부름이나 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그렇죠? 그들이 원하는 건 정보 수집과 수입원이었고, 우리는 무력과 뒷배가 필요했습니다. 일월문을 등에 업은 이후부턴 외형 확장에 사활을 걸었지요.”

“결과가 좋았나 보군.”

“보시다시피요. 이후에는 상단과 표국도 여러 개 인수했고, 막힐 게 없었어요.”

일월문은 사도련의 소속이다. 그들도 자체적인 정보망이 있을 터인데, 부족했던 것일까?

뭐가 되었든 무림맹에 비교하면 사도련의 정보력이 현저히 뒤떨어질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사도련에서 개방에 대항할 조직으로 흑야방을 키워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급성장을 할 수가 없었을 테니.

만약 사도련이 뒤에서 개입하고 있다면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유진산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재차 물었다.

“혹시 사도련에서 가입 요구는 없었던가?”

“아직 그러한 요구는 없었지만, 그쪽의 접선책을 몇 군데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면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요.”

“그렇군. 만약 사도련이 흑야방을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얘기일세.”

풍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벌써 거기까지 유추하신 겁니까? 저도 사실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흑야방의 경쟁세력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도련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겠군. 순순히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그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몸집을 키우는 수밖에.”

“예. 그래서 저희는 자체적으로 관료들과 연줄을 만드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자금이 많이 투입되긴 했지만,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요.”

유진산은 탁상 위에 깍지를 끼며, 대화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꿨다.

“뭐 재력만 있다면야 못 할 게 없는 세상이지. 그런데 음양쌍괴가 우리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역사상 반로환동한 고수가 둘이 같이 다닌 일이 있었습니까? 음괴의 무용담을 듣고 혹시나 했습니다. 설이가 지금 나이쯤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풍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접선 장소에서 어르신께서 단서를 주셨잖아요. 산과 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가장의 손주들이 음양쌍괴라는데 무슨 확인이 더 필요합니까? 전서구를 받자마자 확신했어요.”

“그렇구만. 그럼 아직 우리 정체가 무림맹 쪽에는 드러나진 않았겠어.”

“확실할 겁니다. 그런데 무슨 정보가 필요하신 겁니까? 최소한 하남에는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뭐든 말씀만 하세요.”

유진산은 품속에서 엽전 한 묶음을 꺼내어 탁상 위에 툭 올렸다.

“이 가격이면 어디까지 알려줄 수 있어?”

“어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어르신께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는데요. 이렇게 나오시면 서운합니다.”

풍호가 손사래를 치자, 유진산이 씩 웃으며 재빨리 엽전을 회수했다.

“예나 지금이나 농담이 안 통하는 친구로구만. 혹시 창룡대라는 무림맹의 비밀조직을 들어본 적이 있나?”

“창룡대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그들에 대한 정보는 없는 듯했다.

사도련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조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유가장을 초토화시킨 녀석들이지. 소림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곳에 창룡대와 연관된 놈이 있거든.”

“소림사가 있는 숭산 근방에도 우리 지부가 있습니다. 아마 자료는 여기에도 다 있을 겁니다.”

풍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근처에서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다가와 기립했다.

“예, 방주님.”

“소림사에 관한 자료를 모두 가져다 줘.”

잠시 후 그들이 앉은 탁상 위로 문서와 서적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노력해도 다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풍호가 씩 웃어 보였다.

“자료를 전부 확인하실 생각이 아니시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셔야겠습니다.”

“음. 이 중에 원강대사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

잠시 후 풍호에게 지목당한 관리자가 다가와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적 끝에 일각이 지난 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 찾았습니다. 비록 일 년 전에 확인된 내용이지만요.”

유진산이 흡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겠어?”

이어서 들려온 대답은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참회동에 있다고 쓰여 있는데요.”

“참회동? 거긴 왜?”

참회동이 어디인가. 죄를 지은 승려나 마두들을 가두어놓는 소림사의 깊은 감옥이었다.

그가 왜 그곳에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들어갔다고 기재되어있습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다른 내용은 없어요.”

유진산은 머리가 지끈 아프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참회동에 갇혀 있는 그를 어찌 불러내서 잡는다는 말인가.

“이거 낭패로구나.”

“그를 꼭 만나셔야 한다면, 승려로 변장한 후에 직접 소림사로 들어가셔야겠는데요. 저희가 진입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야말로 기가 차는 소리였다.

“우리보고 머리를 밀고 동자승으로 위장하라고?”

소림사가 어디인가. 과거 잠입한 경험이 있었던 종남파보다 열 배 이상은 더 위험한 곳이었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승들도 곳곳에 널려 있을 터. 손녀의 도움 없이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그렇다고 강제로 여자아이의 머리를 밀고, 동자승으로 변장시킬 수도 없는 노릇.

“다른 방법은 없어요.”

유진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휴.”

답답하다는 듯 머뭇거리던 그는 넋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길 잠시 후.

어디선가 현희의 손을 잡고 손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지하미로를 구경하고 온 모양이었다.

“설아.”

“으응?”

“잠시 이리 좀 와 보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유설은 기분이 좋은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그렇게 다가왔다.

“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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