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정보의 가치 (2)
역시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또다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참을성이 강한 유진산도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해갔다.
‘이번엔 만날 수 있겠지.’
애꿎은 사공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는 노릇.
답답함 속에 다시 반나절을 이동했다.
강줄기를 굽이굽이 돌며 어딘지도 분간하기 힘들 무렵.
맞은편에서 나룻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에선 초승달이 새겨진 검은 경장에 복면을 쓴 사내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사공 없이도 나룻배가 스스로 다가오고 있다니. 기(氣)를 이용해 배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고수이리라.
높은 무위를 보여주어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일까?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유진산이 움츠러들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 정도는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었으니까.
“자, 건너가십시오. 얘기가 끝날 때까지 저는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뱃사공은 세 명을 옮겨 태운 후 거리를 벌렸다.
“흑야방과 거래를 원하시오?”
우선 그들의 정보력을 어느 정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유진산이 머뭇거리는 동구에게 전음을 보내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동가장의 셋째 아들이지 않소. 그리고 두 아이는 당신의 자녀들이고.”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당신의 아들이 하후세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것까지.”
유진산은 적지 않게 놀랐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꿰차고 있다니. 자신의 진짜 정체까지는 파악 못 한 듯했지만, 정보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우선 동구를 통해 좀 더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흑야방 소속은 맞죠?”
“아니오. 나는 단지 협력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해두겠소. 내게 의뢰 내용을 말하면, 정보에 대한 가격이 책정되어 전달될 것이오.”
귀찮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도, 흑야방의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니? 유진산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흑야방과 직접 접선하게 해주세요. 아무에게나 말하기에는 아주 민감한 내용이니까.”
흑의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귀하는 가장 낮은 고객 등급이라 규정상 불가하오. 최고등급이 되시면 언제든 직접 만날 수가 있을 것이오.”
유진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다시 풀어버렸다.
눈앞의 인물을 족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그 또한 기껏해야 접선책만을 알고 있을 테니.
하지만 반드시 흑야방을 직접 만나야만 했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유진산의 전음을 받은 동구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정보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지금 가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을 만나 협상을 해야만 합니다.”
흑의인의 눈가에 어렴풋이 살기가 어렸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호각을 불며,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룻배를 불러들였다. 돌려보낼 심신이리라.
“규정상 접선 비용은 돌려줄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은자를 다섯 냥이나 털어낸 유진산이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기어코 유진산은 동구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노부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일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앞의 아이가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을 노부라 칭하다니. 그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
유진산은 품속에서 투박한 옥패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설마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맨몸으로 왔겠는가? 내 외상의 대가로 이것을 맡길 생각이네.”
돌연 흑의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사파의 지존인 사도련주에게서 받은 사왕패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옥패를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고, 유진산 앞에 다짜고짜 부복했다.
“일월문의 천광일. 사왕을 뵙습니다.”
예상외의 반응에 동구와 유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진산만이 이미 예상을 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나는 사왕패를 이용할 생각이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게. 사도련의 소속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거나 이것을 담보로 맡길 생각인데, 어찌 생각하는가?”
“…….”
천광일은 어리둥절했다.
사왕패가 무엇인가. 사도련의 핵심 간부들에게만 지급되는 신물이었다.
사도련에 소속된 사파의 무사는 이것을 소지하고 있는 자에게 무엇이든 협조해야 한다.
담보가치가 문제가 아니라,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물품이었다.
“내가 사도련이 아니라니 의아하겠지. 일단 받아보게.”
사왕패를 받아든 천광일은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후면에 각인되어 있을 주인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음양쌍괴……?”
“흑야방을 만나기 전까진 정체를 숨기려 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겠지. 하후세가 놈들은 모르던데, 정보를 취급하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다르군. ”
지금 자신이 누구 앞에서 건방을 떨었단 말인가?
처음보다 어깨가 움츠러든 천광일은 유진산의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유설이 있었다.
“…….”
“그래. 얘가 바로 섬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음괴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음괴가 폭주하면, 흑야방 따위 공중분해하는 건 일도 아니란 사실을. 물론 그리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모용성을 쓰러트린 절대고수가 눈앞에 있었다.
천광일은 정해진 규정을 어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유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며 옥패를 다시 돌려주었다.
“흑야방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주선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고맙군. 이 근방에서 가장 괜찮은 객잔을 찾아서 머물고 있겠네.”
굳이 약속 장소는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흑야방이라면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테니.
* * *
다음 만남은 어림잡아 닷새 이상은 걸리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흑야방은 예상을 뒤엎고 이틀도 안 되어 접근해왔다.
객실 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동구가 문을 열어주었다.
벌컥-!
고풍스러운 인상의 여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연꽃 문양으로 수놓아진 비단옷과 기품이 넘치는 모습.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은 듯했지만, 범상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부장 은화린입니다.”
지부장이라면 이 지역을 맡은 책임자일 터. 간부급 인사가 찾아온 것이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그녀의 호위무사도 보통이 아닌 듯했다.
“어르신께서 직접 대화하실 예정이니,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유설은 목재 침상에 옆으로 누워 졸린 눈을 살짝 뜨고 있었고, 유진산은 탁상에 앉아 있었다.
자신을 은화린이라 소개한 자는 유진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히려 노부가 더 영광이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흑야뱡의 거물이 직접 찾아왔으니.”
“절차가 복잡했던 부분은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도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력이 아닌 정보와 자금력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이해하네.”
은화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직접 온 연유는 무엇인가. 지부장이 직접 움직인 데에는 그만한 목적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일세.”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지요. 우리 흑야방은 지금부터 어떠한 대가도 없이 모든 정보를 어르신께 무상 제공할 방침입니다.”
유진산은 기뻐하기보단 다소 곤욕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흑야방의 협조가 사왕패 때문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사왕패의 힘을 이용하는 순간 음양쌍괴가 사도련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왕패는 단순한 담보 제공일 뿐, 나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네. 사도련의 소속이 아니라고도 밝혔을 텐데?”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두려워서? 위치가 노출되지 않았으니, 그것도 아닐 테고.”
“총단에서 내려온 방침이라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방주께서 어르신을 직접 만나 뵙기를 원하십니다.”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음지에 숨어있을 흑야방의 방주가 무엇 때문에 직접적인 만남을 원한단 말인가. 설마 함정이라도 파놓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흑야방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에게 불현듯 어떠한 연결고리가 떠올랐다.
‘흑야방……. 흑산차……. 설마?’
가능성은 극히 적었지만, 흑야방의 방주가 자신이 아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짐작대로라면 지금의 상황이 아귀가 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를 한번 만나봐야 했다.
“장소는?”
은화린은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봉성의 설산표국을 찾아가십시오.”
“표국이라…….”
성내에서 운영이 가능한 표국의 개수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허가를 따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합법적으로 성내에서 무기 소지가 가능한 조직인 만큼, 선정 기준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관에 연줄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음지에서 이렇게나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니. 알아갈수록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볼일을 모두 마친 그녀가 일어서서 포권을 건네었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럼 살펴 가시게.”
* * *
“일이 잘 풀리셔서 다행입니다.”
“동구 네가 없었으면, 어찌 이렇게 수월하게 진행되었겠나. 여러모로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는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할 시점이었다.
봇짐을 짊어진 동구는 씩 웃어 보이며 유설을 바라보았다.
“우리 설이도 그동안 건강히 잘 있어야 해.”
유설은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아저씨, 이제 못 보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기회가 되면 언제든 할아버지하고 같이 동가장으로 놀러와.”
“……네. 꼭 놀러 갈 거예요.”
동구는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유진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르신.”
“그래,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게다. 수련 게을리하지 말고.”
“예. 그리고 이거…….”
동구가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옥구슬을 연결해 만든 알록달록한 팔찌 세 개였다.
“이건 뭐야?”
“어제 잠시 노점에서 사 왔습니다. 뭔가 추억이라도 남기고 싶어서요.”
“다 큰 어른이 뭐 이런 걸…….”
말과는 달리 유진산은 팔찌를 건네받아 바로 끼우고 있었다.
장신구에 취미를 가질 나이는 아니었지만, 성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조개 목걸이도 걸고 있는 마당에, 이 정도야 뭐…….’
자신과는 다르게 손녀는 팔찌가 마음에 드는지 방방 뛰며 좋아했다.
“너무 예쁘다. 동구 아저씨 고마워요!”
“그래, 나중에 다시 만나면 우리 이걸로 서로 알아보는 거다.”
“히히히. 알았어요.”
이제는 정말 이별이었다.
동구는 다시 한번 유진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달라진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그간 자네 덕분에 즐거웠네.”
동구와 헤어진 유진산과 손녀는 목적지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출발하자꾸나.”
“응!”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경공을 펼쳐 나아갔다.
목적지는 개봉성.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개방의 총타가 성외 인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야방이 성내에 총타를 마련한 이유는 관군의 그늘에 숨기 위함이리라.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노인(路引)이라는 통행증이 필요한데,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거지들은 이것을 발급받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개봉성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된 이후, 성내는 치안 문제로 거지와 개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위치가 노출되더라도 개방이 수비군을 무시하고 어찌 성안으로 들어가 흑야방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가장 안전한 위치에 총타를 마련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