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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73화 (73/238)

73화 내가 바로 낚시왕 (1)

쩌억-!

“아악!”

유진산이 손에 쥔 무기를 놓치며 볼품없이 풀숲을 굴렀다.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유설이 목 뒤로 죽봉을 턱 올리며 다가왔다.

“아파?”

“세상에 할아버지를 이렇게 때려잡는 손녀가 어디 있단 말이냐.”

“봐주지 말라며. 살살할까?”

잠시 숨을 고르던 유진산은 죽봉을 주워들고 다시 일어섰다.

“아니다, 지금처럼 계속해.”

절대고수와의 대련만큼 값진 기연도 없는 법. 유진산은 손녀 덕분에 수련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것은 비록 고되지만, 가장 효과가 큰 수련 방식이었다.

마주 보고 선 둘은 서로를 향해 봉 끝을 겨눴다.

차이가 있다면 유설은 죽봉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손녀의 자유로운 한 손이 앞으로 뻗어 나오며 살며시 오므려졌다.

“들어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도발.

건방진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도 오기가 생겼다.

“요 녀석이 감히 할아버지를 놀려? 지금부터 봐주지 말아야겠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진산이 보법을 밟았다.

시선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움직임. 어찌나 빠른지 그의 신형이 두 개로 늘어나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돌진에 당황할 만도 했건만, 유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맹공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말이다.

파앙-!

머리 위로 죽봉을 흘려보낸 유설은 곧바로 할아버지의 좌측으로 파고들었다.

옆구리에 훤히 드러난 허점. 활짝 펼쳐진 손바닥이 여지없이 그곳을 향해 맹렬히 다가갔다.

쏴아앙-!!

회심의 유가건곤장.

손바닥에서 뿜어진 장력이 허리를 후려치는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유진산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손녀의 측면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았지, 이 녀석!’

순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실전에서 무척 유용하지만, 한 번의 사용으로도 기혈에 무리가 가기에 자주 쓸 수는 없는 기술이었다.

모처럼 잡은 반격의 기회. 이를 악다문 유진산은 다람쥐 같은 손녀의 등을 향해 죽봉을 내리쳤다.

쒜에에엑-!!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죽봉.

빠르고 위력적인 초식에는 나무도 부러트릴 만한 내력이 담겨 있었지만, 부상이 걱정되진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손녀의 호신강기를 깨트릴 수 없을 테니.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이형환위는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음을.

스스스슥-!

갑자기 유설의 신형이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아니, 워낙 빠르게 움직여서 그렇게 보였다.

‘헉?’

당황한 사이 손녀의 움직임을 시야에서 놓치고야 말았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이형환위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혈의 흐름이 자유롭기 때문일까? 유설은 수많은 잔상을 흩뿌리며 자신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경신법.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첫 번째 공격이 다가왔다.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우렛소리.

용케도 첫 번째 일격은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가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또다시 다가오는 그림자. 이번엔 등 뒤였다.

콰앙-!

재빨리 상체를 비틀며 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한번 시작된 공세는 사방에서 계속 이어졌다.

콰쾅-! 콰콰쾅-!!

조금씩 빨라지는 공격.

상단과 하단, 그리고 전후좌우에서 다가오는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엔 놀라움이 앞섰지만, 지금은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유설의 맹공을 다 막아내고 있다니.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짜릿함.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미친놈처럼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엄밀히 따지면 막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격을 조절하는 유설의 놀이 상대였을 뿐.

알아채고 나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

유진산이 방어 동작을 멈추며 우뚝 서자, 손녀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으응?”

한참 재밌었는데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손녀에게 놀아날 수는 없었기에, 유진산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야단쳤다.

“할아버지한테 장난치면 돼? 안 돼?”

유설은 턱을 슬며시 올리며, 자신보다 작아진 할아버지를 밑으로 흘겨봤다

“돼~”

아무리 자신의 외형과 목소리에서 위엄이 없어졌다고 한들 하극상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위계질서는 확실히 해야 하는 법.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힘으로는 안 되니, 비장의 수를 사용할 수밖에.

“그럼 지금부터 금식 훈련이다.”

그 순간 유설의 태도가 백팔십도 변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비굴해지는 아이의 표정.

“안 돼, 잘못했어…….”

기세등등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끙끙거리는 손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유진산이 아니었다.

“참는 것도 훈련이다. 설이 너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어.”

“한, 한 달? 아니야. 난 세 시진 이상 못 버텨…….”

“본디 훌륭한 무인은 식탐을 버려야 하는 법. 화경의 신체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식사 얘기가 나왔기 때문일까? 갑자기 유설의 배가 꼬르륵거렸다.

“나 지금 배고파…….”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은근슬쩍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강인한 아이가 배고픔 앞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하다니.

“그럼 할아버지 말 잘 들을 수 있어?”

“응! 잘할게.”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린 유진산은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근처의 깨끗한 계곡물이었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야산의 분지였기에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일단 운동을 했으니, 몸부터 좀 씻어야겠구나.”

유진산은 한달음에 달려가 몸을 담갔다.

풍덩-!

“아이고, 시원하다.”

유설이 뒤따라 들어오며 물을 뿌려댔다.

“히히. 나 머리 감겨줘~”

어른의 허리 정도까지 잠기는 깊이였지만, 유진산과 손녀에겐 목까지 차올랐다.

“이제 네 나이쯤 되면 스스로 감아버릇해야지.”

“싫어~ 할배가 감겨줘.”

투덜대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유진산이었다.

아이를 씻겨주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설이는 낚시 못 해봤지?”

“으응.”

산속에서 적당한 재료를 긁어모은 유진산은 능숙하게 낚싯대를 만들어갔다.

나무껍질을 벗겨 끈을 매달고, 단단한 가지를 깎아가며 바늘을 만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둘은 적당한 바위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통통한 놈으로 잡아서 맛있게 구워 먹자꾸나.”

“알았어. 근데 언제 올라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 보거라. 낚시란 말이지, 시간을 낚는 것이란다. 인내심을 기르고, 기다림의 미학을 즐기는 것이지.”

“……기다림?”

“응. 무공을 사용하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그러면 의미가 없는 게지.”

“…….”

유진산은 낚싯대를 천천히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혀 봐. 그럼 더욱 멀리 내다볼 수 있고, 평소에 보지 못하는 것도 보이는 법이다.”

할아버지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유설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빨리 잡혀라.”

“물고기가 미끼를 물게 하려면,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곧 잡힐 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잡히기는커녕 입질조차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리처럼 조금씩 튀어나오는 입술. 허기가 차오르는 만큼 손녀의 심술도 더해졌다.

“할배~”

“응?”

“저거 뭐야?”

유진산은 아이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잘 안 보이는구나. 뭘 얘기하는 거야?”

뭉툭하게 생긴 바위 하나만 있을 뿐.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찰나.

“으잉? 나 물고기 잡았어!”

그사이 물고기를 잡았다니? 낚싯대가 휜 것을 보니 거짓이 아닌 듯했다.

곧이어 유설이 낚싯대를 들어 올리자 파닥거리는 큼지막한 물고기가 보였다.

“제법인데? 우리 설이는 낚시에도 소질이 있나 보구나.”

“히히.”

낚싯대에서 물고기를 분리하던 유진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왜 바늘이 몸통에 꽂혀 있지? 바보 같은 녀석이 지나가다 걸렸구나. 운이 좋았어.”

“이제 할배 먹을 것도 잡아줄게.”

“오냐. 계속해 보아라.”

자신감이 넘치는 유설이었다.

그리고 한번 터득한 요령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낚싯대를 집어넣기 무섭게 금세 터져 나오는 손녀의 외침.

“또 잡았어!”

무엇인가 이상했다.

이번에는 낚싯바늘이 물고기의 몸을 관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물고기를 빼낸 그는 안광에 내력을 집중하여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음.”

머지않아 알아챌 수 있었다. 물속에서 꼿꼿이 선 낚싯바늘이 물뱀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중후한 진기를 낚싯대로 흘려보내 기(氣)로 바늘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그것은 근처에 지나가는 물고기를 향해 섬전처럼 다가가 꿰뚫었다.

유설은 낚싯대를 바로 올리지 않고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은 흉내도 내지 못할 기술이었다.

손녀의 얼굴을 쓱 바라보자 큰 눈을 끔뻑이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왜에?”

“…….”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런 요령을 피운단 말인가. 한마디를 하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모른척했다.

일다경이 지난 후에는 손녀 혼자서 다섯 마리의 물고기를 건져 올렸다.

“빨리 먹어보자~”

입이 귓가에 걸린 유설이 쪼그려 앉아 재촉했다.

유진산은 장작을 모아놓고, 나무막대에 물고기를 꽂아 꼬치를 만들어냈다.

남은 것은 불을 붙이는 것뿐. 부싯돌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한 손을 내뻗은 유설이 진기를 태워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화르르륵-!

거센 화력은 순식간에 모닥불을 만들어내며 힘차게 타올랐다.

손녀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은 유진산은 꼬치를 돌려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네 아비도 너만 할 때 요령을 참 많이 피웠지. 말을 엄청 안 들었어.”

“우리 아버지?”

유설의 머릿속에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그편이 다행이었을까? 기억이 없다 보니, 그리움도 없다. 그렇기에 유진산도 회피하지 않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문의 비화(悲話)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만 제외하면, 평소에도 이따금씩 집안 얘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그래, 내 막내아들. 우리 설이처럼 할아버지가 매일 업어 키웠단다. 네 나이 때까지 오줌을 가리지 못해서…….”

무심코 자식 생각을 하던 유진산은 옛 생각에 잠시 서글퍼졌는지 말끝을 흐렸다.

“할배, 울어?”

“울긴 누가 우느냐. 자, 익은 것 같으니 한번 먹어보자.”

유진산은 말을 돌리며 꼬치 하나를 쓱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물고기의 구수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코를 킁킁거리던 유설은 냉큼 한입을 물어보았다.

뜨거울 법도 했건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용암에도 견딜 수 있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의 신체였으니.

“맛이 어때?”

“꼬소해! 히히히. 아주 기가 막혀.”

입이 귓가에 걸린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도 흐뭇한 미소로 물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맛이 괜찮구나. 할아버지는 두 마리면 되니, 설이가 세 마리 먹거라.”

“아니야, 이건 동구 아저씨 줄래.”

그러고 보니 오늘이 동구가 정보를 수집해 와서 함께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손녀가 검지를 내뻗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산 중턱 아래로 삼백여 장.

집중해서 살펴보니 약속장소에서 누군가가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틀림없이 동구이리라.

어떤 소식을 가져왔을지 유진산도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마침 잘되었구나. 우리만 이 맛을 보기는 아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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