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아저씨가 지켜주마 (2)
수상비를 펼칠 정도의 고수가 아닌 이상, 제아무리 수적이라 해도 황하의 급류에서 생존할 확률은 바늘구멍이었다.
하지만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살 확률이 높을 터.
수적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갑판 밖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풍덩-!
적왕단의 수적들이 모두 사라지자 갈채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승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했다.
한편 동구는 기마자세를 한 채로 움켜쥔 도(刀)에 힘을 주고 있었다.
“동구 아저씨, 뭐해요?”
유설이 뒷짐을 진 채 그의 주위를 쓱 훑었다.
“이상하네. 갑자기 또 안 되네, 이거.”
“뭐가요?”
“조금 전까지 힘이 넘쳐났는데, 갑자기 사라졌거든. 내 몸속 깊은 곳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그 힘의 원천을 찾으려는 거야.”
“무슨 비밀이요?”
“아무래도 아저씨가 백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천하제일의 무골인 것 같아.”
“에이~ 거짓말.”
시치미를 뚝 떼는 유설의 연기는 완벽했다.
“확실해. 방금 아저씨가 수적 놈들 해치우는 거 봤잖아.”
그때 동구에게 선장과 선원들이 다가와 양손을 모았다.
죽다 살아난 그들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나타나 있었다.
“고맙습니다. 대협 때문에 모두 살았습니다.”
동구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도를 걷는 한 명의 무인(武人)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천만에요. 미약하게나마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삼 층 누각의 특등 선실을 좀 비워드려도 괜찮겠는지요?”
“어이쿠, 뭐 그렇게까지…….”
유설이 거절하려는 동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와아……. 고맙습니다.”
마다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삼 층 누각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일행은 선장의 뒤를 졸졸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고위 관료나 귀빈이 아니라면 이용할 수 없는 최고의 선실이었다.
아늑한 침상 두 개. 그리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물도 저장되어 있었다.
좁아터진 일 층과는 차원이 달랐다.
“남은 여행길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유설은 입이 귓가에 걸렸다.
냉큼 달려가 침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대자로 눕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자신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전음을 보냈다.
- 할배, 빨리 와서 옆에 누워봐. 여기 엄청 편해.
유진산은 기뻐하는 손녀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 아니다. 할아버지는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 잠시 좀 쉬고 있어.
- 으응. 빨리 와~
갑판으로 내려가는 유진산은 계단에서 막대기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는 인적이 없는 선미로 이동하며 황하의 물살을 훑어보았다.
‘남은 거리는 편히 갈 수 있겠군. 뒤처리만 끝낸다면.’
찝찝한 부분이 있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수적들이 타고 왔던 배에도 남아 있는 일행이 있을 터.
게다가 강물에 입수했던 수적 중 몇 놈이 용케 살아남아 배 위로 올라간 것을 목격했다.
그냥 돌려보낸다면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보복하러 올 확률이 높았다.
‘불확실성은 사전에 차단해야겠지.’
승객들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는 녀석들이 아니었던가. 사정을 봐주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몸을 날렸다.
타앗-!
선체 밖으로 높이 날아오른 그는 황하의 물살을 향해 뛰어들었다.
만약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그가 스스로 죽고자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절정고수인 유진산에게 급류 따위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물 위를 박차고 달리는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타타타탓-!
목표물은 수적들이 타고 온 너벅선.
기동력이 좋고, 삼십 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중형 선박이었다.
그때 뱃머리에서 유진산을 발견한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저, 저놈 뭐야!?”
수적들이 갑판으로 몰려들며 당황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등평도수(登萍渡水). 물 위를 평지처럼 달리는 기술로, 수적들로서는 처음 보는 고난도의 경공술이었다.
“막아!”
마침 활을 들고 있던 두 명이 다급히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파팟-!
정확한 궤도로 다가오는 두 개의 화살.
솜씨가 제법이었지만, 유진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단지 물 위를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을 뿐이었다.
타앗-!
화살들은 그의 발밑을 유유히 통과하며 멀어져 갔다.
유진산은 어느새 선박의 하늘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곧이어 매가 급강하를 하듯 그림자 하나가 갑판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선체가 흔들리며 갑판 위의 수적들이 비틀거렸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어찌 이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강호에는 상식을 벗어난 기인들이 존재하는 법.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수 앞에 수적들은 몹시 당황했다.
“어이, 황하의 쓰레기들.”
유진산의 앞뒤를 포위한 십여 명의 수적들.
공격할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으나, 몸이 얼어붙어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삼류에서 이류 정도 되는 그들이 초절정고수에 맞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목,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보내주신다면 착실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유진산은 손에든 막대를 천천히 사선으로 치켜세웠다.
“노부는 일평생 너희 같은 녀석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만나 보았지.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말이야.”
“……?”
수적들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쓰레기는 아무리 개과해도 쓰레기일 뿐,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굳이 자신의 손을 직접 더럽힐 필요도 없었다.
유진산이 움켜쥔 막대의 끝으로 눈부신 기(氣)가 사납게 응집되기 시작했다.
수적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초승달 모양의 빛무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직선으로 쩍 갈라지는 갑판의 바닥.
벌어진 틈새에는 선체까지 뚫고 지나간 강기의 참상이 고스란히 보였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기에, 서둘러 수리하지 않는다면 배가 침수될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수적들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순순히 죽어줄 그들이 아니었다.
“시발, 한 번에 덮쳐!”
“뒈져!”
유진산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조금의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가소로운 몸부림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수적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선체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콰앙-! 콰쾅-!!
빛살이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선체의 곳곳이 쩍쩍 갈라졌다.
급격히 부서져가는 너벅선은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순식간에 목적을 달성한 유진산은 발을 박차고 선체 밖으로 날아올랐다.
타앗-!
떠다니는 나뭇조각 위에 그의 신형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침몰하는 선박과 다급해진 수적들.
살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는 몸부림이 안쓰러울 만도 했지만, 조금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저승에 가면 너희들이 수장시킨 억울한 영혼들에게 사죄부터 하거라.”
무심히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유진산은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의 정체는 유설이 분명했다.
도대체 언제 소리없이 다가왔단 말인가.
뒤를 돌아본 그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뒷짐을 진 손녀가 심술 난 얼굴로 황하의 물살을 밟고 있었다.
‘무력답수?’
무력답수(無力踏水). 아무런 저항 없이 물 위를 걷는 기술로, 등평도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위의 경공술이었다.
나무를 밟고 서 있는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건 언제 터득했단 말인가. 나날이 발전하는 손녀의 무공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따라 왔어?”
“조금 전에. 나만 빼고 할배 혼자 싸움했지?”
“저런 놈들 때문에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 하남에 가면 고수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 설이는 만일을 대비해 힘을 아껴둬야지.”
고수들이라는 말에 손녀의 얼굴이 도리어 밝아졌다.
아무래도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많이?”
“그곳이 바로 강호의 중심이다. 가는 곳마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넘쳐나지. 섬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어.”
“빨리 가고 싶다. 언제 도착해?”
“아마 닷새 정도면 될 거야.”
“그렇게나 오래……?”
무공 수련에 중독된 아이가 며칠간 배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실 수밖에.
답답해진 손녀의 기분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놀아주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나온 김에 할아버지랑 같이 놀다 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나타났다.
“정말로?”
“오냐, 우리 설이가 얼마나 빠른지 한번 보자꾸나!”
말을 마친 그는 물살을 박차고 반대편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황하의 물 위를 밟고 전력으로 달리는 그의 속도는 물고기보다 두 배나 빨랐다.
그런데도 유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히히. 열까지 세고 쫓아간다.”
* * *
처음과는 달리 선상에서의 생활은 안락하기만 했다.
하남까지 경공을 펼쳐 단번에 갈 수도 있었으나, 무리해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은 항해가 제법 즐거웠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갖춘 귀빈실. 고급요리와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데 뭐하러 고생을 하겠는가.
게다가 지루할 때면 몰래 빠져나와 경공 수련을 함께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적왕단의 함선을 세 척이나 발견해 부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항해가 끝나는 내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닷새가 지나고 목적지인 맹진항에 도착했을 땐 아쉬움마저 남을 정도였으니.
“하하! 이게 얼마 만에 밟아본 땅이냐.”
어깨에 보따리를 둘러멘 동구였다. 십 년 만에 고향 근처에 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동안 즐거웠어요, 아저씨.”
유설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러나 동구는 아쉽다는 듯 쉽게 아이들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너희들, 우리 집에 같이 안 가볼래? 우리 동가장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어디에요?”
“낙양 방면에 있는 남양현이다. 너희들의 친척이 있다는 숭산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어. 경유해서 가는 게 어때?”
여덟 살짜리 아이가 하남의 지리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유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장 머물 곳도 없지 않은가. 하남에 거점을 여러 군데 마련해 두는 것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양현이라면 이곳의 코앞이었다.
“네. 그렇게 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가자꾸나. 부지런히 가면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어.”
그렇게 봇짐을 둘러멘 셋은 남양현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아침에 출발한 일행은 날이 어둑해질 때쯤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적한 평야 지대의 언덕 위에 담장에 둘러싸인 장원. 어림잡아 오십여 명은 넉넉히 거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름있는 무가(武家)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없는 구조였다.
“이상하다. 문이 왜 닫혀 있지?”
동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기억상으로 가문의 대문이 닫혀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잠시 후 문 앞에 우뚝 선 동구가 목청껏 소리쳤다.
“아버지, 저 왔어요!”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동구 왔다니까요!!”
그때 유설이 등 뒤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피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