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저씨가 지켜주마 (1)
“……모두 밖으로 나오십시오.”
선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원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뭐예요?”
“정말 수적이 나타난 겁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사살을 해주자, 승객들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 설마 이대로 나갔다가 전부 처형당하는 거 아닙니까?
“하…….”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문 앞에 서 있던 선원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다시 재촉했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살 수 있습니다. 어서들 나오시지요.”
승객들 대부분이 절망에 빠져 있을 무렵. 그들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 묵묵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단의 무림인들.
“수적들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군.”
청색 경장 차림을 한 다섯 명의 검객이었다.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서는 그들의 모습에 모두가 갈채를 보냈다.
이들이야말로 모두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이 듬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여기 그대로 있으십시오. 우리가 처리하고 올 테니.”
그들이 밖으로 나갈 무렵. 동구가 하체를 굽혀 유진산과 유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제 되었다. 저분들이 물리쳐 준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그는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유설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힘들 텐데.”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눈썰미가 아주 좋거든. 다른 건 몰라도 고수를 분간하는 눈만큼은 나를 따를 자가 없지. 강호의 고수들이 나섰으니 걱정할 것 없어.”
동구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 보였기 때문일까? 유설은 그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흠.”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소란스러움이 다시 사그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잠해지자 승객 한 명이 문틈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밖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른 승객들이 결과를 재촉했다.
“어떻게 됐어요?”
“우리 편이 이겼어요?”
목을 다시 빼낸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초점을 잃은 동공까지. 무엇인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시, 시발,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요?”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불안해졌다.
“다 죽었어. 수적들이 열 받았으니 우린 이제…….”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으악!”
잠시 후 그가 사라진 자리로 수적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에서부터 왼쪽 귀밑까지 찢어진 흉터.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는 무척이나 흉악스러워 보였다.
문턱에 몸을 기댄 채 건들거리는 모습이 약탈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자, 여러분들? 지금부터 짐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몸만 나오시면 됩니다. 이 박도로 썰어버리기 전에요. 참 쉽죠?”
험악한 인상으로 사근사근 얘기하는 모습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벌벌 떨며 하나둘씩 갑판으로 나가는 승객들.
뒤쪽에 자리한 유진산과 손녀도 별수 없이 동구의 뒤를 따라 걸어 나갔다.
- 할배, 이제 어떡해?
유설의 전음은 무공을 사용해도 되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굳이 정체를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 이 녀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 동구 아저씨? 싸움 못 하잖아.
- 할아버지한테 생각이 있으니 지금부터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전음을 주고받는 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실 밖으로 나오자 가관이었다.
처참하게 살해되어 바닥을 뒹구는 다섯 명의 검객들. 게다가 선원들도 몇 명이 본보기로 참수를 당한 듯했다.
갑판 위로 보이는 수적의 수는 열 명 남짓. 예상했던 대로 머릿수는 많지 않았다.
황하의 수적들은 충각이 달린 작은 쾌속선을 타고 소수 정예로 무리 지어 다닌다. 중앙군에서 편성된 토벌대를 피해 다니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괜찮을 거다. 무서워하지 말고 아저씨 뒤에만 있어.”
동구는 자신의 등 뒤로 아이들을 가리며 안심시켰다.
뒤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녀석 참.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제법 강단이 있구만.’
선수로 몰려든 승객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한쪽에선 선장을 포함한 뱃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얼굴에 흉터가 있는 수적이 좌중을 훑어보며 박도로 위협을 가했다.
“자 지금부터 모두 옷을 벗고 강으로 입수합니다. 반각을 드리지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손을 듭니다.”
충격적인 그의 말에 승객들이 술렁이며 급격히 당황했다.
황하의 누런 급류에서는 수영 자체가 불가능하다. 뛰어드는 순간 무조건 사망이었다.
“세, 세상에…….”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가진 건 모두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아무리 사정해도 수적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곳곳에 포진한 그들은 승객들에게 거친 위협을 가했다.
그때 수적들 중 누군가가 박도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우리 적왕단에는 규칙이 있지.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스스로 뛰어내리든가, 죽은 채로 던져지든가.”
적왕단(赤王團). 황하에서 활동하는 수적으로 그들의 악명은 무척이나 유명했다.
상인이고 여행객이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하는 그들은 관군의 최우선적 토벌 대상 중 하나였다.
“…….”
승객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아이의 호통이 수적들의 귓가를 울렸다.
“야 이 상도덕도 없는 놈들아! 재물을 내놓았는데 목숨까지 빼앗는 건 너무하잖아?”
갑판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며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어수룩하게 생긴 중년인의 등 뒤. 웬 꼬마 아이가 미간을 좁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 너 왜 이래?”
동구는 몹시 당황하며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구걸해도 장담할 수 없는 판국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곱게 죽기도 틀린 상황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그러지는 수적들의 얼굴.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눈알을 부라렸다.
“방금 삐악거렸던 병아리 새끼 앞으로 나와. 넌 오늘 죽었다.”
씩씩대는 걸 보니 도륙이라도 낼 심산인 듯했다.
유진산은 은근슬쩍 손녀와 함께 동구의 등 뒤로 숨었다.
그가 다가오자 동구가 반사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그래도 애들인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비켜. 너부터 뒈지기 전에.”
겁을 먹을 만도 했건만, 동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시골 동네의 이름 없는 도장 출신이었지만, 나름대로 십 년이나 무예를 연마한 무인(武人)이었다.
문제는 실전 경험이 전무 했기에 자신의 실력이 어느 위치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더 다가온다면 말로 하지 않겠소.”
그의 한마디에 몇몇 수적이 배꼽을 부여잡았다.
“푸핫!”
“하하하!”
“오늘 우리 광호 형님 제대로 임자 만났구만. 킥킥킥.”
광호라 불린 수적은 동료들의 비아냥거림에 눈이 까뒤집혔다.
“어디서 삼류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유설이 동구의 허리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아저씨. 우리를 지켜주세요!”
동구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일평생 무예를 연마했는데,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는 일.
“걱정하지 말거라, 얘들아.”
양손을 얼굴 앞으로 치켜든 그는 다짜고짜 다가오는 수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용기를 내어 선공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느릿하고도 어설픈 일격이었다.
수적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옆으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이었을 뿐, 이상하게도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엇!?”
마치 귀신이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주먹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듯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동구의 주먹이 광호라 불린 수적의 턱 밑을 정확히 가격했다.
퍼억-!
그리 강하지는 않은 충격인 듯했다.
수적은 다시 반격을 가하여 동구를 묵사발 내리라 다짐했다. 자신의 발이 지면에서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헉?’
붕 떠오른 수적은 어느새 갑판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동구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웬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살며시 내뻗고 있는 모습을.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는 억울함을 해명할 기회도 없이 삼 장을 날아 황하의 물살로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풍덩-!
“……?”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수적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뭐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광호 형님이 당했다고?”
오직 음양쌍괴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동구가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내뻗는 그 순간. 유설이 무형의 기(氣)를 발출하여 수적을 잡아당긴 후 다시 밀쳐낸 것이다.
화경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수법이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동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자신의 주먹을 힐끔 바라봤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였지만, 조금 전보다 자신감이 생겨났다.
“누구든 다가오기만 해 봐!”
“지랄하고 있네.”
또 한 명의 수적이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구의 목젖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박도.
제법 날카롭고 정확한 일격이었지만, 지켜보고 있을 음양쌍괴가 아니었다.
유진산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지풍이 쏘아져 나와 그의 손목을 밀어냈다.
각도가 틀어지는 박도의 끝. 날카로운 도(刀) 날이 동구의 목을 한 치 차이로 비껴나갔다.
파앙-!
‘……어라?’
수적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동구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수적의 복부를 향해 정권을 내지르는 동구. 그리고 그의 뒤에선 유설이 앙증맞은 손바닥을 허리에 살포시 맞대고 있었다.
유설의 손바닥에서 뿜어진 중후한 진기가 그의 혈도로 스며들며 주먹을 통해 다시 발출되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아앙-!!!
“쿠헉!”
수적의 비명은 흡사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와도 같았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돌풍에 휩쓸려 날아가듯 수적은 순식간에 선체에서 멀어져갔다.
풍덩-!
“와아! 동구 아저씨 대단해요!”
유설은 자연스럽게 동구의 등 뒤에서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 동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살아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지막지한 힘이 전신의 혈맥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환각제라도 복용한 듯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얘들아. 아무래도 나한테 무슨 힘이 숨어 있는 것 같구나. 지금 내 몸속에서 굉장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상황이 이쯤 되자 수적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동료 두 명이 연달아 일격에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조금 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어진 모습이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동구는 수적이 떨어트린 박도를 움켜쥐었다.
용솟음치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혈도를 맴도는 알 수 없는 힘 때문일까? 갑자기 그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내가 바로 천하일진문의 동구다!!”
그 순간 도 끝에서 유백색의 빛무리가 쭉 뽑혀 나와 날을 감쌌다.
“도, 도기?”
“이, 이럴 수가…….”
도기(刀氣). 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선명한 수준이라니.
동구 자신도 놀라서 움찔거렸다.
‘헉! 내가 어떻게 도기를?’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알 수 없는 힘이 저절로 손끝으로 흘러나와 도에 기를 불어넣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유설이 콧소리를 냈다.
“무서워~”
지금까지의 동구가 아니었다. 눈에 힘을 잔뜩 준 그는 이미 절대고수의 위엄이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저씨만 믿어라. 이놈들 오늘 다 뒈졌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수적들이라 한들, 도기를 엿가락처럼 뿜어내는 고수에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두려움을 느낀 그들은 본능적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몰, 몰라뵈었습니다, 대협…….”
“이, 이대로 물러갈 테니 노기를 거둬주십시오.”
살아생전 자신이 언제 대협이란 호칭을 들어보았단 말인가. 이미 동구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그는 수적들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토막나고 싶지 않은 놈들은 지금 즉시 강물로 입수한다.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