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몰래 떠나야 해 (2)
섬서에서 하남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유진산은 장안의 북쪽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낙양 근처의 맹진항까지 이동하는 길을 택했다.
동선을 최소화하여 강호의 이목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사이좋게 손을 맞잡은 유진산과 손녀의 작은 등에는 봇짐이 하나씩 매어져 있었다.
“와아~”
둘은 지금 장안의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패도문이 있는 호현에서 열흘이 걸리는 거리를 하루도 안 되어 도착한 것이다.
유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언제 이런 대도시에 와볼 수 있었겠는가. 감탄하는 것이 당연했다.
궁성까지 이어진 주작로. 그리고 웅장한 건축물들이 열을 맞추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신기하지?”
“응, 저것 좀 봐!”
손녀의 검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동상 하나가 우뚝 솟아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장군상으로 높이가 구름을 뚫을 듯이 장엄했다.
주변에는 마치 관광명소처럼 인파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도시에 누군가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오직 황제가 직접 내린 어명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동상의 주인이 황제의 총애와 함께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장군 소무.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이었지.”
“멋있어! 할배, 나랑 같이 저기 가서 뛰어놀래?”
눈빛을 보니 경공을 사용하여 전각의 지붕 위를 뛰어다니자는 얘기인 듯했다.
신이 난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도 흐뭇해졌다.
그러나 관군이 주둔 중인 대도시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자의 무공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저기 갑옷을 입은 아저씨들 보이지?”
“으응.”
“이곳에서는 무공을 사용하면 잡혀간다. 꽁꽁 묶인 후에 몽둥이로 엉덩이 맞아.”
“…….”
시무룩해지는 유설의 얼굴.
아이는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유진산도 양보할 수는 없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 앞에선 절대 무공을 사용하면 안 돼.”
“……성 밖에서도?”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응. 우리가 섬서를 떠났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면 안 돼.”
“왜에?”
“세상은 무척 넓단다. 이곳에는 우리한테 현상금까지 걸려 있지만, 그곳 사람들은 음양쌍괴에 대해서 잘 모를 게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이동하자꾸나.”
“알면 안 돼?”
“할아버지는 관계없지만, 우리 설이는 그곳에서 새 삶을 살아야지. 그러니까 도착할 때까지는 항상 조심해야 해.”
무림맹의 수배령은 어디까지나 섬서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남의 무림인들은 음양쌍괴의 존재조차 모를 터. 굳이 꼬리를 잡혀 운신의 제약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는 강호 전역으로 명성이 퍼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당분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 우울해진 것일까?
유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
유진산은 시무룩해진 손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잠시 헛기침을 한 그는 은근슬쩍 중얼거렸다.
“섬서에서 먹을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 아마 이곳이라지? 한 번도 못 먹어본 산해진미들이 가득하다던데.”
“……정말?”
고개를 슬며시 돌리는 손녀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시장이 있는 방향을 지그시 응시했다.
“오화저과육(五和猪果肉)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못 들어봤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여덟 살짜리 아이가 장안의 음식을 어디서 들어봤겠는가.
유진산은 손녀가 흥미를 보이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섯 가지의 향긋한 과일에 돼지 앞발을 푹 삶은 후 기름에 다시 튀긴다더구나. 거기에 양념을 입히고 얇게 손질한 채소들로 고명을 하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에선 촉촉한 육즙이 흘러나와. 거기에 부드러운 식감과 담백한 양념이 어우러지면 마치…….”
마른침을 꼴깍 삼킨 유설은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보자!”
“먹고 싶어?”
손녀는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으응……. 빨리.”
유진산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허허. 그래, 어서 가보자꾸나.”
* * *
한 시진이 지난 후.
둘은 장안성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성 밖으로 나왔다.
배를 쓰다듬는 유설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맛있었어.”
불룩해진 손녀의 배를 보니 유진산의 마음도 배불렀다.
“그래. 하남에 도착하면 볼거리도 많고, 새로운 음식도 맛볼 수 있지.”
“정말? 어서 가보고 싶어.”
유진산은 은근슬쩍 손녀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필요할 때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배워두려는 목적이었다.
“좀 있으면 나루터에 도착할 게다. 배는 한 번도 안 타봤지?”
“응. 재밌겠다……. 근데 할배 말투가 왜 그래?”
“우리 설이랑 같은 말투를 써야 사람들이 의심을 안 하지. 그래서 연습하고 있는 거야.”
“그으래? 그럼 나 따라 해 봐. 조금 있으면 나루터에 도착할 거야~. 이렇게.”
유진산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린 손녀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니 어색할 수밖에.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진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 번 시도했다.
“흠흠. 조금 있으면 나루터에 도착할 게다.”
“아니야. 부드럽게……. 다시 따라 해 봐. 곧 도착할 거야~”
“곧 도착할 게다~”
“이상해!”
손녀에게 야단을 맞다니. 내심 서러웠지만 배움의 길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몇 번을 더 시도를 해보았음에도 쉽지가 않았다.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러워질 터.
“아무래도 당장은 안 되겠구나. 나루터에 도착해서 누가 말을 걸어오거든 네가 알아서 대신 대답해 주어라.”
“알았어.”
“그리고 눈에 띌 수 있으니 도착할 때까지는 할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남매인 척해.”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던 둘은 소화가 될 때쯤 황하가 내려다보이는 나루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배는 여러 나루터를 거쳐 맹진항까지 이동한다.
마침 배 한 척이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대도시의 항구를 왕래하는 민용 누선(樓船)으로, 배의 중앙에 삼 층 구조의 누각이 높게 솟은 비려(飛廬)급이었다.
대형선박이라 뱃삯은 좀 비싸겠지만, 그만큼 편의가 좋았기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 전 탑승이 시작된 듯했다.
“미리 타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어서 가보자꾸나.”
“으응. 내 손 잡아줘.”
뱃삯을 지불한 유진산과 손녀는 손을 잡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장안에서 맹진항까지의 이동 시간은 어림잡아 열흘.
이러한 장거리 여행에 아이 둘이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자연스레 주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희 둘뿐이니? 남매인가 보네.”
뒤를 돌아보자 어깨에 보따리를 둘러멘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가벼운 경장 차림에 푸근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제법 탄탄한 체구와 미약한 내기. 미약하게나마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였지만, 아직은 삼류 정도의 수준이었다.
유진산은 손녀에게 적당히 둘러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네. 우리는 하남으로 가요. 아저씨는요?”
물어보지도 않은 목적지는 왜 말해준다는 말인가. 게다가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동선을 물어보다니? 다소 황당했지만 일단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남이면 맹진항까지 가겠구나. 마침 아저씨도 거기로 간단다.”
“히히. 그럼 우리랑 같이 갈래요?”
옆에서 지켜보던 유진산은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동행자를 구하다니. 말릴 틈도 없었다.
기가 막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좋게 생각할 수밖에.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아이 둘이 움직인다면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될 터. 저 녀석에게 묻어가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그때 중년인이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며 답했다.
“좋지! 네 키가 좀 더 큰 걸 보니 옆에는 동생인가 보구나?”
유설이 방긋 웃으며 할아버지의 어깨에 팔을 턱 올렸다.
“네 맞아요. 제 동생 귀엽죠?”
“그러게. 고 녀석 참 또랑또랑하게 생겼구나.”
“근데 제 동생은 원래 말이 별로 없어요. 말투가 이상해서 부끄럽대요.”
손녀의 연기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언어 장애가 있는 동생으로 만들 줄이야.
자신을 딱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중년인의 표정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런……. 부모님은?”
“우리 둘만 빼고 전부 돌아가셨어요.”
“세상에……. 하남에 친척이라도 있나 보구나.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할 때까지 아저씨만 따라오너라. 아이 둘이 다니기엔 위험해.”
“고맙습니다~”
잠시 후 배에 승선한 셋은 선수의 갑판으로 이동했다.
처음 보는 황하의 물살이 신기한지 유설은 갑판 위로 고개를 쭉 빼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뒤에서 중년인이 유진산과 유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부모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단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이곳에서 십 년 동안 무예를 연마했지. 이제 뜻을 이루었으니 당당히 본가가 있는 하남으로 돌아가려고 해.”
십 년이나 무공을 연마하고도 삼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마침 무료했던 유진산이 은근슬쩍 물어봤다.
“무공을 배운 곳이 어디인지요.”
“음. 말을 잘 못한다더니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계속 말을 해 버릇해야 한다. 안 그러면 말투가 어색해지는 법이지.”
“네.”
“아저씨의 사문은 천하일진문이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일류문파지.”
유진산의 기억에는 없는 문파였다.
거창한 이름의 문파치고 제대로 된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십중팔구 이름조차 없는 동네 문파이리라. 지역별로 이러한 문파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한 문파들은 무공은커녕 제대로 된 심법조차 보유하지 않았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수련을 해도 성과에 한계가 있는 게 당연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빗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두둑-! 두두두둑-!!
“어이쿠, 비가 오는구나. 어서 선실로 들어가자꾸나.”
배의 중심에 설치된 누각은 삼 층 구조로 되어있으며,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아마도 위층은 나라의 관료나 부호를 위한 특실이리라.
일반 승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아래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백여 명에 가까운 인파가 같이 쓰기에 매우 비좁았다.
그때 중년인이 어깨에 메고 있던 보따리에서 작은 담요 하나를 꺼내었다.
“어서 빗물부터 닦아내자꾸나. 안 그러면…….”
갑자기 그가 놀란 눈을 부릅뜨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과 남자아이는 흠뻑 젖었지만, 여자아이의 옷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얼굴에도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왜 그래요, 아저씨?”
유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토끼 같은 눈을 끔뻑거렸다.
오직 유진산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화경의 신체가 가지는 특유의 반탄(反彈) 성질이 빗물을 튕겨낸 것이리라.
그 순간 유진산의 손이 쏜살같이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사용하고 팽개쳐둔 판자 쪼가리였다.
“제가 비를 막아줬습니다.”
그의 손에 움켜쥔 판자를 본 중년인은 이제야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하하! 역시 그렇지? 순간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지 뭐야. 누이를 잘 챙기는 모습이 보기가 좋구나.”
귀신이라는 말에 유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에 정말 귀신이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뭐 시간도 많고 적적하니 아저씨가 얘기를 좀 들려주마. 어서 앉아들 보거라.”
유진산과 유설은 그렇게 중년인과 마주 앉아 시간을 보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동구라 소개했다.
황하의 물살 위에서 생활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는 법. 순박하고 입담이 좋은 그는 심심함을 달래기에 아주 좋은 말동무였다.
그렇게 셋은 특별한 일 없이 배 위에서 이틀을 함께 지냈다.
비가 자주 왔기에 선실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저씨. 여긴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와요?”
동구는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유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건조하고 습한 우기라서 그렇단다. 계절적으로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지.”
“근데 아저씨네 집은 가족이 많아요?”
유설의 질문은 재잘재잘 끝이 없었다.
그런데도 동구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전부 받아주었다.
그가 싫지 않았던 유진산도 가만히 등을 기대어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가족이 아주 많지. 우리 가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무가란다. 이제는 당당하게 돌아갈 수 있어. 나 정도면 아버님께서 인정을 안 할 수가…….”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배가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선체 전체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쿠우우웅-!!
선실 밖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선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사달이 난듯했다.
잠시 후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전해져 왔다.
“수적이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 선실 안의 승객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떡해?”
“수, 수적이라니…….”
“그럼 우리 다 죽는 거야?”
황하의 수적 집단은 장강에 비교해 규모와 머릿수가 적은 편이지만, 매우 빠르고 교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강한 이유는 관중에서 중원까지 이어진 중앙군의 감시망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정예들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얘들아. 아저씨 뒤에만 꼭 붙어 있어.”
동구가 유진산과 유설을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