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몰래 떠나야 해 (1)
유진산은 사도련주로부터 선물 받은 사왕패를 살펴보았다.
손바닥 정도의 작은 크기인 투박한 옥패. 겉보기엔 볼품없어 보였다.
“이게 무엇인가.”
“형님은 정파 출신이니 생소하겠지만, 사도련의 무사치고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없소.”
“음. 가치가 뛰어난 물건인가 보군.”
“하하! 이건 천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는 것이오. 사도련의 영웅에게 지급되는 최고의 명예패가 바로 이것이니.”
사도련의 명예패를 왜 자신에게 건네준다는 말인가.
음양쌍괴를 포섭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 일을 좋아해야 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명예패가 무슨 필요가 있겠나.”
“사왕패를 단순한 소품으로 보시는구려. 사도련의 무사라면 이것을 소지하고 있는 자에게 무슨 일이든 협조해야 하오.”
그렇다면 사도련의 간부들과 같은 권한을 가진다는 말과도 다름이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 백규의 말대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물건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진산에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사도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한다면 행동에도 제약이 따르게 될 터. 오히려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이었다.
“나는 사도련의 소속이 아니네. 앞으로 누구의 밑으로도 들어가지 않아.”
“그냥 선물일 뿐인데, 뭘 그리 의미를 담아 두시오? 다른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성의를 봐서 그냥 넣어두소.”
유진산은 사왕패를 움켜쥔 채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고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도련주가 누구인가. 사파의 지존으로 정파의 무림맹주와 동급인 존재였다. 그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사왕패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아우 말대로 받아두긴 하겠지만, 이것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네.”
자신이 사왕패를 사용하여 사파의 세력에 영향을 끼친다면 스스로가 사도련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사도련주가 원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모용성을 쓰러트린 사파의 신진고수들이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쉽게 넘어가 줄 유진산이 아니었다.
“아무도 강요치 않으니, 사용하든 말든 형님 마음대로 하시오. 그나저나 괜찮으면 나랑 산책이나 좀 하는 게 어떻소?”
“그리하지. 병상에만 누워있으려니 좀 답답하군.”
유진산과 백규는 몸을 일으켜 전각의 밖으로 나왔다.
소식을 가져온 사도련의 무사가 돌아가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곳곳에 활기가 가득했던 장원이었지만, 연무장과 몇몇 곳을 제외하면 몹시 한적했다. 이번 정파의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문도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유진산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망하군……. 너무 많이 죽었어.”
“자칫하면 전멸할 뻔했는데, 오히려 이 정도면 선방한 거요. 우리가 죽은 녀석들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주면 그뿐이니 슬퍼할 것 없소.”
“하지만 얼굴은 그래 보이지 않는군.”
백규라고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패도문의 문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위치였을 뿐. 타들어 가는 그의 속내는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말과는 달리 백규는 서글픈 눈으로 먼 곳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친 정파놈들이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소.”
“얻으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본전도 못 건진 셈이겠지. 내 짐작으로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가 아닌 것 같네.”
“그럼 그들에게 또 다른 적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고개를 슬쩍 한 번 끄덕였다.
“무림맹은 사도련이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해서 정면 승부를 감행했지.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말일세. 만약 내 가정이 사실이라면, 눈엣가시인 사파부터 미리 정리해놓을 필요가 있었겠지.”
“형님의 생각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마교까지 무너진 지금, 그 누가 무림맹에 위협이 된다는 말이오?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소.”
“그것까지 내가 어찌 알겠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머지않아 드러날 걸세. 어쨌거나 이제 정파도 잠잠하겠군.”
백규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아주 형님은 눈치가 귀신이구려. 최근 무림맹의 활동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소. 쥐새끼들처럼 말이오.”
“내 짐작대로라면 또다시 무리해서 공격을 감행하진 못할 걸세. 더는 전력을 낭비할 수도 없을 테고. 게다가 작전의 실패로 무림맹의 수뇌부도 입지가 흔들리고 있을 테니까.”
“언젠가는 이 빌어먹을 놈들에게 이번 일을 갚아줘야겠소. 그나저나 형님은 이제 어찌할 거요?”
유진산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미 서로의 표정만 봐도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둘은 잠시 침묵에 잠긴 채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유진산이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오 년쯤 된 것 같군. 당시의 나는 무림맹으로부터 추격을 받고 있었네. 설이를 등에 업고, 노숙까지 하며 정처 없이 쫓겨 다녔지. 갈 곳 없는 우리를 따듯하게 받아준 사람은 자네밖에 없었네.”
“그런 말 하지 마소. 형님과 설이는 우리 패도문의 은인이고, 식구이니까.”
“그래도 떠나기 전에 고맙다는 말은 한 번쯤 하고 싶었네.”
“어휴. 우울한 말은 됐고, 언제 출발할 건지나 말해주소. 그래도 우리가 이별주 한 잔은 기울여야 하지 않소?”
“이미 결정했으니 머뭇거릴 필요는 없겠지. 내일 바로 출발할 걸세. 나는 우리 설이 좀 보고 갈 테니, 먼저 돌아가 있으시게.”
백규는 내심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럼 이따가 우리 조카 데리고 저녁이나 먹으러 오소. 오늘 밤 대작으로 날 이기지 못하면, 보내주지 않을 거요.”
유진산도 어색한 웃음으로 한 손을 쓱 올려 보였다.
“그리하지.”
백규와 헤어진 그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곳곳을 눈에 담아두면서 말이다.
그간 정이 들었기 때문인지 마지막으로 문파를 둘러보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가문의 복수를 위해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원통하게 죽은 유가장의 식솔들.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넋을 위로해주겠는가.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생존자는 오직 단 두 명. 그것도 집안의 최고 어른이었던 자신과 갓 태어난 막내아들의 늦둥이뿐이었다.
이토록 기구한 운명이 세상에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반드시 하남에서 원강대사를 찾아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야만 했다.
이곳과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겠지.’
유진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유설이 있을 연무장이었다.
그는 그곳으로 향하며 손녀와 모용성의 싸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지.’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변방의 가문인 유가장이 무림의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를 무너트린 것이다.
생각만 해도 피가 끓어 오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만인의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입증해 보인 손녀였지만, 정작 본인은 지금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 욕구와 끝없는 갈망. 무공 연마에 매진하는 유설의 모습에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서려 있었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할 나이였고, 무공 수련을 하자고 하면 도망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가문의 아이들이 모두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유설만큼은 달랐다. 고되고 힘든 정신과 육체의 수양을 오히려 즐기다니.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손녀의 이상한 취미를 유진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 참. 누구 손녀인지 참으로 대견하구나.’
먼발치에서 유설의 수련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연신 감탄했다.
모용성과의 대결에서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그사이 수련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마치 상상 속의 적과 싸우듯 보법을 펼치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펼치는 모습이었다.
휘리릭-! 휘리리릭-!
죽봉이 뿜어내는 돌풍이 이곳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한 차례의 요란스러운 연무가 끝나자 유설은 움켜쥔 봉을 놓았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할배에~!”
자신이 온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맑은 웃음으로 후다닥 달려온 손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법이구나. 그사이 실력이 또 늘었어.”
거리를 살짝 벌린 손녀는 은근슬쩍 할아버지의 목을 흘겨보았다.
자신이 선물해 준 조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나 확인하는 것이리라.
“히히.”
흐뭇한 미소로 자신을 쳐다보는 손녀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유진산은 아이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주고는 시선을 돌렸다.
“우린 내일 떠나야 하니, 정이 든 사람들이 있거든 오늘 미리 작별 인사를 해두거라.”
“……으응? 어딜 떠나?”
“아주 멀리. 네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
유진산은 간략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는 내내 손녀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정든 사람들을 떠난다는 아쉬움이리라.
“이제 다 못 보는 거야?”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니니 안타까워할 것 없다. 우리가 강호에 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래도.”
“슬퍼하지 말거라. 우리 설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곳까지 하루 안에 달려올 수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힘들겠지만.”
손녀의 경공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그의 말에 안심이 된 유설은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히히. 그럼 좋아! 할배, 나 인사하러 다녀올게.”
“그래. 삼촌, 이모들한테 작별인사 잘하고 저녁에 보자꾸나.”
“으응!”
* * *
거처로 돌아가서 짐을 챙기던 유진산은 고이 모셔둔 화룡신창을 챙겨 대장간으로 향했다.
아이의 손으로는 쥐기 어려울 정도로 굵었으며, 일 장 반에 이르는 길이는 들고 다니기에도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가문의 유일한 가보를 처분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분해한 후 창날만 챙겨가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대장장이에게 화룡신창을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어르신. 또다시 이 신창(神槍)을 마주하다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유진산이 아이의 모습임에도 대장장이는 그를 깍듯이 모셨다. 그동안 죽봉을 수십 자루씩 제작해간 단골손님이며, 그의 정체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 길을 떠나야 해서 크기를 줄여야 하네. 창을 좀 분해해 주시게. 자루는 필요 없고, 날만 챙겨갈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작업은 반 시진이면 끝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하지.”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묵묵히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룡신창을 다루는 대장장이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애틋함까지 담겨 있었다.
역사상 제일의 무기장인이었던 진규의 작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유진산에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말일세. 이것을 녹여 창을 두 자루로 나눌 수는 없겠는가?”
대장장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첫째로 저에겐 이것을 다룰 만한 기술이 없습니다. 이 신창을 제련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하남의 철가장이 유일할 것입니다.”
“철가장이라……. 나도 몇 번 들어본 것 같군.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진규의 작품에는 신수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는 전설이 있지요. 저는 사실이라 믿고 있습니다. 헌데 신수의 영혼을 둘로 나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짐승이 도를 깨우치면 영물이 되고, 무림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과거 양주산에서 마주쳤던 청랑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물이 진화를 거듭하면 무시무시한 신수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었으며, 무림의 역사에서도 신수가 출몰한 기록은 많지 않았다.
“아쉽지만 할 수 없겠군.”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어르신이 신수를 한 마리 더 잡아 영단을 구하신다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화룡신창을 두 자루로 분리하는 것이.”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진지한 친구인 줄 알았더니,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어서 작업이나 마무리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