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내 허락 없이는 못 가 (3)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정파가 움직임이 없어서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뒤에서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흑묘파의 문주 백상. 의자에 앉은 채로 한쪽 턱을 괸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서찰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정파의 사파 말살 작전은 그가 이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정파가 이렇게 급하게 일을 벌여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놈들의 속내를 어찌 알겠습니까. 어쨌거나 이대로 사파가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중립 세력이겠지요.”
백상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흑묘파와 같은 살수 집단은 정파에게 있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마교가 무너진 후 유일하게 정파를 견제해오던 사파마저 없어진다면, 중립 세력 또한 무사할 수가 없을 터.
“원하는 것은?”
“결전의 날에 화산파가 호현으로 오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주십시오.”
“하필이면 화산파라니…….”
구대문파에서도 상위권에 있는 강한 세력이었다. 제아무리 흑묘파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을 테지만, 단순히 시간만 끄는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유진산은 미리 구상해온 작전을 넌지시 던졌다.
“화산에서 호현으로 오기 위해선 반드시 양장림을 지나야 하지요.”
양장림(陽長林). 햇빛조차 들지 않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살수들이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에 매복하여 화산파의 이동을 저지해달라는 의미였다.
“우리가 화산파만 묶어둔다면, 나머지는 호현에서 막아낼 수 있겠소?”
“그리 해주신다면 가능성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백상은 의자에 앉은 채로 깍지를 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선 돌아가시오. 긴히 생각해보고 패도문으로 답신을 보내주겠소.”
그것이면 충분했다.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진산도 더는 이곳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등을 돌렸다. 살수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그는 손녀의 손을 잡고 지체없이 걸음을 옮겼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 유설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할배, 나 배고파.”
그러고 보니 아침에 출발하여 아무것도 먹은 기억이 없었다.
한창 성장할 나이였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음. 할아버지가 괜찮은 객잔을 하나 알고 있다. 섬서에서 고기국수를 제일 맛있게 하는 곳이지.”
“헤헤. 정말?”
“그럼~ 어서 가서 먹어보자꾸나.”
방향을 정한 둘은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 * *
일식경이 지난 후 도착한 곳은 백양현이라는 마을이었다.
보통의 무림인들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을에서는 경공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켜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공을 멈춘 둘은 중심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까 그 아저씨가 할배보다 나이가 많아?”
뜬금없는 손녀의 질문에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아이의 질문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 흑묘파의 문주에게 예우를 갖춰주었던 일 때문이리라.
“나보다 어린 녀석이지. 하지만 무림의 배분은 나이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왜에?”
“무공과 명성, 그리고 위치가 배분을 결정하는 법이지. 그자는 할아버지보다 무공이 강하고, 명성도 높으며, 문주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존중받는 게다.”
유설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잠시 후 자신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물어왔다.
“그럼 설이 배분은?”
“우리 설이는 유가장의 진전을 이어받은 소가주의 신분이지. 가문의 대표이기 때문에 언제나 당당해야 한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머리를 굽혀도 안 돼.”
배분이 높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유설은 입이 귓가에 걸렸다.
“히히. 그리고 또?”
“음. 황당하긴 하지만 벌써 명성이 쌓이고 있고…… 무공도 대적할 상대가 거의 없으니까…… 뭐 따지고 보면, 장문인급을 상대하는 게 아닌 이상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게지.”
“그으래?”
갑자기 손녀의 작은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깨를 펴고 턱을 뻣뻣이 세우는 걸 보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던 유진산은 잠시 후 어딘가를 향해 검지를 내뻗었다.
“도착했구나. 바로 저곳이다.”
“와~ 크다.”
유진산과 손녀가 도착한 곳은 이층구조의 대형 객잔이었다.
입구에는 소호객잔(笑互客棧)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으며, 안에는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기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어서 가서 먹어보자.”
유진산이 손을 잡아끌었지만, 유설은 따라오지 않고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마치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할배, 나 여기 와본 것 같아.”
손녀를 바라보던 유진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구나. 네가 두세 살쯤에 와봤던 곳이지.”
선음지체의 특이체질이라서 가능한 것일까? 기억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흑산도의 총관인 현희와 함께 셋이 식사를 하고 갔던 객잔이었다. 게다가 검후를 처음 본 장소였기에 유진산의 기억에도 강렬히 남아있었다.
“보고 싶어, 현희 언니.”
아기였던 유설을 특히나 예뻐하던 무당파 출신의 산적이었다.
그녀의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흐뭇하면서도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게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안으로 들어서자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간식 앞에서 흥분한 강아지처럼 유설도 코를 킁킁거렸다.
손녀의 눈이 식탁 위의 요리로 향했다면, 유진산은 손님들을 탐색해보고 있었다.
검후가 자주 오던 곳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일까? 마치 강호의 명소라도 된 듯 손님 중 무림인들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평상시에도 무림인들이 이렇게 많은 곳이었나? 뭐 상관없겠지.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누구든 우리 아이의 식사를 방해하는 녀석이 있다면 허리를 꺾어주마.’
더는 아기를 업고 도망쳐다니던 힘없는 노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다면 손녀의 심술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점소이가 다가오자 유진산은 말없이 은자 몇 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귀찮은 설명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만 많다면 갓난아이도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 세상 이치인 법. 점소이는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소리쳤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유진산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소호객잔의 특식으로 주문했다.
“고기국수 두 그릇과 소호팔압채. 그리고 우유 한 잔 주시게.”
아이의 말투가 늙은이처럼 이상했지만, 점소이의 표정 관리는 완벽했다. 무림인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던 만큼 조심성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예, 그럼 금방 내오겠습니다.”
유진산은 왼팔을 탁상 위에 올린 채 습관처럼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삼삼오오 모여 곳곳에 자리를 꿰찬 각양각색의 무림인들. 성향이 다른 자들이 뒤섞여있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정파와 사파가 서로 마주친다고 무조건 칼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강호에는 암묵적인 규칙들이 있으며, 인파가 많은 시장에서는 무차별적인 칼부림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무림과 관군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이 최소한의 질서 유지였다.
만약 세상의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자가 있다면, 무림공적으로 몰릴 뿐 아니라, 관군에게도 쫓기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배고파…….”
앞에서는 유설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유진산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손녀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곧 나올 게다. 조금만 기다려보자꾸나.”
“……으응.”
젓가락을 움켜쥐고 있길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던 음식들이 탁상 위로 올라왔다.
“맛있겠다!”
“어서 먹어 보거라. 네가 어렸을 때도 좋아하던 음식이었으니.”
몸이 맛을 기억하고 있는지 자동으로 반응했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젓가락. 유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릇에 얼굴을 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입안 한가득 국수를 넣어 터질 듯 부푼 아이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이떠! 어서 할배도 먹어봐!”
“천천히 먹어. 체하겠구나.”
손녀가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른 유진산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도 천천히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너 번쯤 젓가락을 움직였을 때, 돌연 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접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에서부터 뺨을 타고 내려오는 검상의 흔적과 붉은 두건. 허리춤에 매인 검까지. 그리고 손에는 술병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사파의 무사로 보이는 그가 식탁 옆으로 다가와 양손을 모았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유설을 응시하고 있었다. 육수를 들이켜는 손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배가 빵빵해진 유설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닦았다.
“끅. 잘 먹었다.”
유설은 이제야 다가온 인물에게 관심을 보이며 올려보았다.
험악하게 생긴 중년인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 혹시 음, 음양쌍괴 대협들이 아니신지요?”
음양쌍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객잔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삼삼오오 앉아있던 무림인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휙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객잔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객잔 안을 맴돌았다.
유진산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무렵, 호기심이 발동한 유설이 먼저 반응했다.
갑자기 턱을 올려 보이며 도도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까지. 조금 전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맞아요. 내가 음괴예요.”
스스로 음양쌍괴임을 시인하다니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인가. 정신이 멍해진 유진산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객잔의 곳곳이 술렁이며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 사파의 무사가 술병을 움켜쥔 채로 양손을 모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성을 듣고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화웅방의 이진광이 술을 한 잔 올려도 되겠는지요?”
“나는 술 안 마셔요.”
“아…….”
상황이 어색해졌기 때문일까? 유설이 식탁 앞으로 왼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그 순간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며 전율했다. 죽통에 담긴 우유가 역류하듯 허공으로 빨려 올라왔기 때문이다.
격공섭물로 물체가 아닌 액체를 다루는 것은 몇 단계나 어려운 기술로 알려져 있다.
허공에서 똬리를 틀던 우유 줄기는 탁상 위의 빈 잔을 향해 또르르 내려왔다.
“이거 한번 먹어봐요. 맛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유 잔이 스스로 붕 떠오르며 이진광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얼떨결에 그것을 움켜쥔 그는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순간 객잔의 곳곳에서 갈채가 터져 나왔다.
고작 둘이서 종남파의 코앞까지 쳐들어간 것도 모자라, 무림맹의 무사들을 기습했던 음양쌍괴가 아니던가.
그들의 용맹한 무용담은 그동안 정파의 위세에 억눌려 살았던 사파인들에게 가슴 뛰는 일화였다.
“와아! 정말 최고입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사파의 새로운 영웅들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옳소!”
유설은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사파 성향의 무림인들이 환호하는 그때, 유진산은 객잔 밖으로 나가는 일단의 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파 성향의 무림인들이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여겼다.
결심을 굳힌 유진산은 벌떡 일어서서 의자 위로 올라갔다.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음양쌍괴가 여러분께 긴히 드릴 말이 있소!”
비록 작은 체구와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누구도 그의 위세에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다.
사파 성향의 무림인들은 입을 다물며 그를 주목했다.
“앞으로 닷새 후! 정파에서 사파 말살 작전을 거행할 것이오!”
난데없는 그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살 작전이라니? 우리가 뭐 벌레요?”
“무슨 그런 농담을…….”
잠시 호흡을 고른 유진산은 진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섬서성의 사파 세력은 호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도련에 소속되지 않은 사파 성향의 중소방파들. 하나같이 개성이 강해 뭉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운명공동체였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시작으로 그들의 결집을 꽤 할 요량이었다.
“지금부터 모두 내 말을 잘 들어보시오!”
이제는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주변이 다시 잠잠해지자 유진산은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