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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58화 (58/238)

58화 내 허락 없이는 못 가 (2)

새벽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각. 누워있던 유진산의 두 눈이 슬며시 떠졌다.

마치 시간이 수십 배나 느려진 것처럼, 그는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곧이어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좌측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깜짝이야!”

손녀가 문 앞에서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유설이 앵두처럼 작고 붉은 입술을 서서히 실룩거렸다.

“할배, 어디 가.”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좀 갔다 올 테니, 좀 더 자고 있거라.”

“어디든 설이랑 함께 간다며.”

유진산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타일렀다.

“거긴 위험할 수도 있어서 안 돼.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위험해서 같이 가는 거야. 설이가 지켜줄게.”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들 어찌 여덟 살짜리 손녀에게 호위를 맡기겠는가.

유진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시간 없으니, 어서 비키거라!”

그러나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아이 목소리에 무슨 위엄 따위가 있겠는가. 과거와는 달랐다. 애써 소리쳐 보았지만 유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이 녀석이, 그래도?”

성큼성큼 다가간 유진산은 문 앞에 앉아 있는 아이를 끌어당겨 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땅속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근추?’

천근추(千斤錘). 내공으로 몸의 무게를 증가시키는 기술이었다. 지금 유설의 무게는 천근이 아니라 만근처럼 무거웠으며, 무쇠처럼 단단했다.

마치 거대한 태산이 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녀를 잡아당길수록 오히려 자신이 끌려가고 있었다.

“못 나가.”

“…….”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걱정되어 그러는 아이의 마음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과 손녀는 일다경 동안 줄다리기를 하고 나서야 결국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일 것. 혹시라도 상황이 어려우면 혼자서 도망치는 것 등 몇 가지 안전장치를 타협했다.

“할아버지하고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알았어. 꼭 지킬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사파를 향한 정파의 말살 작전.

정보가 새어나간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 터. 어떠한 변수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출발하자꾸나.”

문밖으로 나온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설이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손 잡아줘~”

유진산은 왼손을 내뻗어 손녀의 손을 맞잡으며 거듭 당부했다.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곳이다. 도착하면 할아버지 뒤에만 있거라.”

이곳에서 목적지인 무악산까지는 걸음으로 닷새가 허비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들의 경우이며, 경공이 극에 달한 무림인들은 두 시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타타타탓-!

손을 맞잡고 쏜살같이 달리는 둘의 기세에 새들이 놀라 흩어지기 일쑤였다.

굳이 길을 따라 달릴 이유가 없었다. 전각이 보이면 지붕을 타고 달렸으며, 장애물이 나오면 도약해서 뛰어넘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좋군. 세상 끝까지라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유진산에겐 순간순간의 행복이 소중했다. 손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즐거웠다.

유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두 시진을 내달리자 먼 곳에 구름 위로 자취를 감춘 산봉우리가 보였다.

무악산(霧惡山).

흑묘파의 본거지인 이곳은 이름처럼 안개가 자욱한 험산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살수들의 입장에선 최적의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입구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푯말이 보였다.

푯말 앞에서 유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들어오지 말래. 어떡해?”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뒤에만 바짝 붙어 있거라.”

“으응.”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무악산의 정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일반인들에겐 진입조차 힘들 만큼 험한 산길이었지만, 이들에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마치 평지를 달리듯 나아가길 잠시 후. 곳곳으로 괴이한 흔적들이 보였다.

뒤에서 유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 뼈다귀가 있어.”

“원숭이가 죽었나 보구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자꾸나.”

좀 더 올라가자 안개가 자욱해지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치 반딧불이 빛나듯 유진산의 안광이 빛났다. 두 눈에 내력을 집중해 어느 정도 가시거리를 늘린 것이다.

뒤따라오는 유설은 안개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듯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 반각을 더 전진했을 때였다.

“할배, 저 아저씨는 저기서 뭐해?”

잠시 걸음을 멈춘 유진산은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십여 장 거리의 나뭇가지 위에 음영이 드리워져 일렁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자세히 보자 사람의 형상이 분명했다.

‘은신이로군.’

그 순간 나무 위의 그림자가 쭉쭉 늘어지며 전광석화처럼 다가왔다.

매우 숙련된 살수의 몸짓이었지만, 위치를 알고 있는 이상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유진산은 재빨리 상체를 비틀며 공격을 회피했다.

파아앙-!

태도 한 자루가 앞가슴을 스치고 지나갈 찰나.

뒤따라오던 유설이 벼락처럼 다가와 살수의 발목을 후려 찼다.

쩌억-!

연약해 보이는 작은 발등이었지만, 나무도 꺾을 만큼 가공할 내력이 담겨있었다. 게다가 그 속도는 가히 섬전과도 같았다.

살수는 꽈당 넘어지며 비명을 토해냈다.

“크악!”

유설은 넘어진 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호두 같은 주먹을 어깨 위로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

“우 씨.”

여차하면 얼굴을 때리겠다는 몸짓이었다.

압도적인 무공의 차이를 느낀 살수는 저항을 포기한 듯했다.

그가 무력화되자 유진산이 손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 어서 가자.”

도움을 청하러 온 입장인 만큼 살수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살수의 혈도를 눌러 기절시킨 유진산은 다시 앞장서서 나아갔다.

기습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터. 그는 죽봉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우린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소!”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돌아온 대답은 살수들의 암기다발이었다.

파팟-! 파파팟-!!

표창과 비수 따위의 암기들이 급소를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좌우와 후미에서 오는 암기들을 유설이 막아주고 있었기에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진산은 죽봉을 휘둘러가며 전면에서 날아오는 암기만 정신없이 쳐내었다.

텅-! 터터텅-!

날아오는 암기의 빈도가 점차 사라지고, 공세가 약해졌다.

그런데도 간헐적으로 날아오는 암기는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짜증이 났던 것일까? 뒤따라오던 유설이 미간을 좁히며 나직이 말했다.

“할배,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어, 어디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손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곧이어 유진산은 안개 속을 휘젓는 작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폭풍우처럼 몰아쳐 왔다.

쩌억-! 퍼억-! 쾅-!

타격음과 박자를 맞추어 연달아 들려오는 비명들.

“크윽!”

“컥!”

“캬악!”

처절한 비명은 한참이 지나도 끊이질 않았다.

유설이 살수들을 죽일 리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죽이면 안 돼!”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직 처절한 비명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

무려 일다경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곧이어 죽봉을 어깨 위로 걸친 손녀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괜찮아, 할배.”

“……어떻게 됐어?”

“응. 다 자고 있어.”

전부 기절시켰다는 의미이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진산은 다시 앞장서서 정상으로 향했다.

‘실전에서는 살풍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얘기해놓은 것이 다행이로구나.’

가문 최강의 절기인 살풍창(殺風槍)은 살상력이 너무 강해 지금의 유설이 사용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대신 훗날을 위해 수련만 계속 이어나가게 했을 뿐이었다.

잔기술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이동하는 내내 더는 암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일급살수 정도로는 유설에게 조금의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급살수를 보내자면 그들도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터.

‘한 명의 특급살수를 키우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법이지.’

이곳에 온 목적을 밝힌 이상 흑묘파에서 그렇게까지 달려들 이유는 없었다. 자신들을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라면 이미 목적은 달성했을 테니.

예상대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더는 기습이 없었다.

잠시 후 정상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흑의로 전신을 가린 인물. 절도 있는 동작과 조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 여지없는 특급살수였다.

“문주님께서 만나보시겠다고 하십니다.”

“고맙소.”

유진산과 손녀는 그를 따라 흑묘파의 본진을 가로질렀다.

정상의 분지는 마치 산적들의 산채를 방불케 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특이해 보이는 살수들의 훈련장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온갖 장치들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그곳에서 죽을힘을 다해 훈련하는 살수들을 보며 유설이 부럽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재밌겠다.”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곧 있으면 무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게다. 할아버지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거라.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설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고풍스러운 전각 한 채가 우두커니 있었다.

“들어가 보시오.”

길을 안내한 특급살수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문 앞에서 모든 움직임을 정지했다. 고목처럼 서있는 그의 모습은 살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전각의 내부로 들어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계절이 바뀐 듯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왔다.

유설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것일까? 약간 경직된 얼굴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으응.”

전각 안에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문을 열어보자 붉은 양단이 깔린 단상 위에 기다리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인상. 감정을 도려낸 것 같은 눈빛은 오싹할 정도였다.

흑묘파의 문주 살혼검 백상. 그가 확실해 보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느낌이 이상해 옆을 보니 손녀와 흑묘파의 문주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기 싸움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다급히 유설의 손을 놓으며 전음을 보냈다.

- 노려보지 말고, 어서 할아버지처럼 하거라.

유진산이 먼저 양손을 모아 포권을 하자, 유설도 자동으로 따라 했다.

얼어붙은 공기가 한층 가라앉자 백상의 입이 먼저 열렸다.

“내 평생 반로환동한 고수 두 명을 동시에 보기엔 처음이군. 이곳에 올 자격이 충분하오.”

“길을 열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백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깍지를 꼈다.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했는데, 듣던 것보다 굉장하구려. 음양쌍괴. 찾아온 용건은?”

유진산은 속으로 무림맹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음양쌍괴라는 별호가 흑묘파까지 전해졌다니. 강호에 소문이 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는 패도문의 백규에게서 빌려온 사도련의 총사패와 준비해온 서찰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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