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내 허락 없이는 못 가 (1)
달빛이 드리우는 야밤의 수련장.
유진산은 손녀에게 진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범을 한 번 보여준 그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진법만 한 것이 없지. 이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월아쌍창진(月兒雙槍陳)이다.”
“할배랑 나랑 둘이 하는 거야?”
“제대로 보았구나. 둘이서 펼칠 수 있고, 호흡이 잘 맞는다면 위력이 배가 되지.”
“재밌겠다~ 빨리 같이 해보자.”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며 말했다.
“한 번 더 보여줄 테니 눈에 익혀두어라.”
자세를 잡은 유진산은 목창을 서서히 내뻗었다. 이어서 다시 한 바퀴를 회전하며 보법을 밟았다.
비록 느릿한 움직임이었으나, 현란했으며 부드러웠다.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창을 들고 춤을 추는 듯했다.
“창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에 있다. 상대의 거리를 뺏고, 우리의 거리를 지킨다면 패배할 수 없느니라.”
“알았어.”
유진산은 움직임을 계속하며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상대가 나에게 오지 않고 물러서거든 나는 나아간다. 나는 밀고, 너는 잡아당긴다. 창진에 갇힌 자는 우리를 공격할 수 없고, 진을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의 모습을 상상해보던 유설은 측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힝. 그럼 불쌍하겠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 자비는 사치이니라. 철저하게 상대를 희롱하고, 농락하는 것이 바로 이 월아쌍창진이다.”
파아앙-!
무림인 중 구 할 이상이 도검류의 짧은 무기를 사용한다.
그 점을 노려 장창의 긴 타격 거리를 극대화한 공격진법이 바로 월아쌍창진이었다.
어느 순간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본격적으로 내기를 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아앙-! 파아앙-!
목창은 바위를 부술 힘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빨랐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이 절정에 이를 무렵이었다.
창진의 시범을 보여주던 유진산은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나도 할래.”
지켜보던 손녀가 갑자기 진세로 난입해 들어왔다.
“……?”
손녀에게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어디 있겠는가.
본디 진법은 수없이 많은 반복과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한 법이다.
손발을 맞춰보지도 않고 어찌 함께 창진을 펼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유설은 어느새 자신과 호흡을 맞춰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유진산은 당황했지만, 한번 시작된 진법은 쉽게 멈출 수가 없는 법. 일단은 지켜보며 행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우려가 괜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설이 알아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움직임을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손녀지만 참으로 놀랍구나. 이 정도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무림의 역사상 누가 있었단 말인가.’
창진이 궤도에 오르자 두 자루의 창이 서로 맞물리며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리리릭-!
유진산과 손녀 사이의 작은 공간.
이 장도 안 되는 거리에는 수백 자루의 창이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돌풍에 휩싸인 꽃잎이 허공에 수를 뿌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완벽한 합을 이루는 창진.
그 속에서 창무(槍舞)를 추고 있는 유진산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미소를 본 유설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히히.”
일식경이 지난 뒤에서야 진법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며, 요란함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가에서 갈채가 터져왔다.
“하하하! 정말 최고의 창진이었소! 아주 훌륭하오!”
멀지 않은 곳에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양손을 부딪치고 있었다.
“백규 삼촌!”
후다닥 달려간 유설이 그를 덮치듯 폴짝 뛰어 올라탔다.
아이를 왼쪽 팔로 안아 든 백규가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이쿠, 이 녀석. 뭘 먹고 다니기에 이렇게 무거워진 거냐.”
“히히. 설이 간식 가져왔어?”
“눈치가 귀신이구나. 삼촌은 할아버지랑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먹고 있거라.”
백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아이에게 건넸다.
안에는 만두 몇 개와 우유가 담긴 죽통이 들어있었다.
“고마워, 삼촌~”
유설은 백규의 목을 한 번 꼭 끌어안고 다시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혼자 바구니를 움켜쥐고 수련장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살랑거리는 걸음걸이를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홀로 남겨진 그를 향해 유진산이 다가오며 말했다.
“가문의 무공을 엿보다니, 자네답지 않구만.”
“하하. 우리 사이에 그러시기요?”
유진산은 씩 웃으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잠시 이동하자는 뜻이었다.
“농담이네. 자네라면 자격이 있지. 헌데 무슨 일인가? 요즘 부쩍 바빠 보이던데.”
영문을 알고 있던 유진산이었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규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아직도 안 떠나고 있소?”
“음. 그냥 마음이 바뀌어서 좀 더 머무를 참이네.”
“갈 길이 먼데, 기왕이면 겨울이 오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소?”
유진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백규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에서 오 년을 넘게 지냈는데, 왜 그리 급하게 쫓아내려 하는가.”
백규는 무엇인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여비와 먹을거리를 좀 챙겨놓았으니, 닷새 안에 떠나주시오.”
겉으로 보기엔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그의 속내를 어찌 모르겠는가. 유진산은 소리 없이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맙군.”
“나가달라는데 고맙다니, 그것이 웬 말이오?”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해줘서 말일세. 내 아우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네.”
“무엇을…….”
더는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유진산은 그의 말을 끊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사파 말살 작전 말이네. 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건가?”
백규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다 알고 있었구려. 아무리 고민해도 희망이 없으니 형님과 설이라도 빨리 떠나소. 여기 남아서 함께 죽을 필요는 없지 않소.”
“섭섭한 소리 하지 말게. 이곳을 도망치듯 떠나서 패도문이 당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은가?”
“아무리 형님이라도 이번에는 방법이 없을 거요. 섬서의 모든 정파가 호현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섬서에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수많은 군소방파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한 채 쓸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다른 지역의 사파 세력들도 상황이 비슷할 테니, 지원을 요청할 곳도 없겠군. 우리에겐 사혈문과 마천회뿐이고.”
“어찌 그리 잘 아시오. 종남파와 떨거지들만 온다면 한번 해볼 만한데, 화산파 놈들은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소.”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화산파는 종남파와는 급이 달랐다.
머릿수에서도. 무공 수준에서도 어느 것 하나 유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규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문파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의 지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가.
어려운 상황임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뒤 침묵을 깨고 유진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무림에는 정파와 사파만 있는 것이 아니지.”
잠시 후 그의 의도를 눈치챈 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중립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자는 말씀이오? 공식적으로 정파와 적대시할 만큼 간 큰 세력이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왜 없겠나. 이곳 섬서성에도 한 곳이 있지 않은가. 화산파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음에도 백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큰 섬서의 중립 세력은 하나뿐이었으니.
하지만 결코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오.”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는 없네. 무슨 일이 있어도 흑묘파를 설득시켜야 해.”
흑묘파(黑卯派). 중원 제일의 살수 집단으로 유명한 문파였다.
정파, 사파의 기준을 두지 않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만 의뢰를 받으며, 한번 정한 목표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그런 살수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백규였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를 돕는다는 말이오?”
유진산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파가 말살되면, 정파에서 살수들을 지금처럼 그냥 놔둘까? 현재의 상황을 전한다면 반드시 우리와 함께할 걸세. 그들 또한 무림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분명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으나,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라 접선이 쉽지 않을 것이오. 알선책이 있긴 하지만, 의뢰가 아닌 이상 윗선까지 내용이 잘 전달될지도 의문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시간이 없네. 흑묘파의 본거지가 무악산이라고 했나? 내가 직접 가서 문주를 만나보겠네.”
백규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악산에는 살수들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자칫하면 문주를 만나기 전에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데, 형님 혼자 보내기엔 너무 위험하오. 아무래도 내가 다녀오는 게 좋겠소.”
“지금 상황에서 호현을 총지휘해야 할 자네가 자리를 비우면 되겠나. 신경 쓸 것 없네. 상황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면 바로 철수할 것이니.”
“그래도…….”
“괜찮아. 이미 결정했으니 더는 거론하지 말게.”
단호한 유진산의 입장에 백규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조심하시오. 특히 흑묘파의 문주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니.”
살혼검(殺魂劍) 백상.
단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하지 않은 전설적인 살수로,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유진산도 들어본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보시게.”
“언제 출발할 겁니까?”
“머뭇거릴 시간이 없겠지. 우리 설이부터 재워놓고, 새벽에 혼자서 출발…….”
유진산은 아차 하며 말끝을 흐렸다. 먼 곳에 앉아 있는 손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입안 가득 만두를 넣고 두 눈을 빛내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백규가 머리를 긁적였다.
“좀 더 멀리 이동할 걸 그랬나 보오.”
“……못 들었겠지?”
거리가 무려 삼십여 장이었다. 게다가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으니, 듣지 못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백규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마음만 먹는다면 옆 동네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텐데.”
뭔가 각오를 다지는 듯한 손녀의 진지한 얼굴. 그리고 비장함이 깃든 눈빛을 보니 확실해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얼굴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거 몰래 다녀오기가 쉽지 않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