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양괴와 음괴 (3)
생각할수록 기분이 불쾌했다.
“이놈들이 감히 우리한테 음양쌍괴라는 별명을 붙이다니…….”
유진산이 씩씩대고 있자, 근처에서 건곤장을 수련하던 유설이 양손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물었다.
“그럼 할배가 양괴고, 내가 음괴야? 히히. 나는 마음에 들어.”
“좋아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무림의 마두로 낙인찍히게 생겼어.”
“그럼 안 돼?”
“그야 당연히…….”
유진산은 반박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어차피 정파와는 돌이킬 수가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다소 귀찮을 일이 생길지언정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소식을 전해온 패도문의 광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르신,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예……?”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그의 허리춤에 붙어 말했다.
“잠시 좀 걷지.”
둘은 묵묵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나란히 걸었다.
수련장을 벗어나자 광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자네 문주 말일세. 요즘 백규 아우가 뭐 때문에 그리 바쁜가.”
그는 손녀와 함께 무공 수련에 매진하면서도 문파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최근 이곳에 포착된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유진산이 아니었다.
눈에 띄게 잦아진 백규의 외출. 게다가 마천회와 사혈문의 간부들이 이곳으로 소집된 광경도 몇 번 목격했다.
“별일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시선을 회피하는 그의 눈동자.
유진산은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거 서운하군. 노부가 남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괜찮으니 어서 얘기해 봐.”
“…….”
광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속내는 털어놓고 싶으나, 말할 수 없다는 답답함 같은 것이 보였다.
“네가 얘기해줬다는 것은 비밀로 하지. 어서 말해봐.”
“죄송합니다. 문주님께서 함구하라고 말씀하셔서…….”
“무엇 때문에?”
“떠나시는 어르신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유진산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의 등을 한 번 토닥였다.
“내가 어찌 백규 아우의 마음을 모르겠나. 이미 다 알고 있어. 지금 이곳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광호가 짐짓 놀라며 되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맞는가 보군.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그냥 널 한번 떠본 거지. 어쨌거나 내가 이대로 떠나면 후회할 텐데?”
“…….”
유진산은 씁쓸한 미소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이 나는군. 당시엔 패도문밖에 없었네. 세 살배기 손녀를 업은 갈 곳 없는 노인을 받아준 곳이……. 떠나기 전에 신세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을 셈인가?”
어느덧 패도문과 함께한 세월이 오 년을 넘었다.
그런 이곳을 어찌 도망치듯 떠날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야 마음이 홀가분할 것만 같았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광호가 결심을 굳힌 듯 실토했다.
“어르신이 저희 문주님께 전달해주신 서찰 때문이었습니다.”
“밀봉되어 있어서 내용은 보지 못했네. 백규 아우는 별 내용이 없다고 했는데?”
광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예, 별 내용은 아니지요. 거기엔 사파 말살 작전에 관한 내용만 적혀 있었으니까요.”
“사파 말살 작전이라니?”
“강호의 전 지역에서 한날한시에 정파의 총공세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파를 굴복시키겠다는 수작이지요.”
유진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파의 전력은 흔히 정파의 삼 할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하지만 이런 공격방식은 효율도 떨어질뿐더러 자신이 아는 정파의 방식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무리해서? 정파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저도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어쨌거나 서찰의 인장이 무림맹주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일시는?”
“앞으로 보름쯤 남았습니다. 아무튼,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무방비상태에서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요. 지금은 저희도 대비하고 있으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파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파가 말살되면 강호에서 더는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게 된다.
무림이 추구하는 것은 힘의 균형이지 완전한 평화가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으리라 짐작되었지만, 지금으로선 알 방도가 없었다.
“그날이 도래하면 호현에도 많은 정파인들이 몰려들겠군.”
“예. 이곳도 떼거리로 올 테지만, 사혈문과 마천회와 함께 연계해서 잘 막아볼 것입니다.”
“그래. 혹시라도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지체하지 말고 가져와. 당분간은 계속 수련장에 있을 테니.”
“그리하겠습니다, 어르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추이를 지켜봐야 했다.
그를 돌려보낸 유진산은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갔다.
어깨를 풀고 있는 손녀의 모습을 보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흥분한 아이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할배, 나랑 대련하고 놀자!”
난데없이 대련이라니. 아기 때의 추억이라도 떠올랐던 것일까?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기에 대충할 수도 없을 터. 그렇기에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싸라기 같은 손녀가 하자면 못 해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훈련용 목창(木槍)을 집어 들며 나직이 말했다.
“비록 네 자질이 뛰어나지만, 할아버지는 경험이 아주 많단다. 게다가 네 초식도 전부 알고 있으니 통하지도 않을 거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유설은 목창으로 자신의 뒷목을 두들기며 보조개를 피어 올렸다.
“으응. 빨리 들어와~”
저런 도발은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게다가 선공까지 양보하겠다니.
“요 녀석, 오늘 할아버지한테 혼 좀 나보자꾸나.”
말과는 달리 어리다고 대충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목창을 움켜쥔 유진산은 쏜살같이 전면을 향해 튀어 나갔다.
타타탓-!
눈 깜짝할 사이 손녀의 코앞까지 당도한 그는 지체없이 창을 내질렀다.
쏴아앙-!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뭉툭한 창끝은 유설의 명치를 향했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부상에 대한 우려는 없었다.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화경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되려 목창이 부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격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손녀는 반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단지 상체를 슬쩍 비틀었을 뿐이었다.
파앙-!
애꿎은 허공을 꿰뚫은 창끝이 다시 반 바퀴를 회전했다. 유가창법의 연계기로 창의 손잡이로 가격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지점으로 향했을 시점에서 유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휘리리릭-!
“……?”
손아귀에 아무런 감촉이 없었다. 또다시 바람만 가른 것이다.
초식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나 빠른 움직임이라니. 옆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직접 마주 서보니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재빨리 창을 잡아당긴 그는 본능에 따라 후미를 향해 공격했다.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창끝. 그리고 또다시 고개만 틀며 여유롭게 피해내는 손녀의 모습이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유설이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즐겁겠지만, 할아비는 죽을 맛이로구나.’
봐주면서 할 때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연격을 개시했다.
폭풍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창술은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눈앞에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휘리릭-! 휘리릭-!!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모조리 피해내고 있는 손녀의 모습에는 여유로움이 넘쳤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듯 보였다.
“싸움은 피하기만 해서 능사가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이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다가오는 목창 한 자루.
위치를 바꿔가며 허점을 파고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산이 누구인가. 경험 많은 그가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악다문 그는 온 힘을 다해 허리를 비틀며 목창을 쳐냈다.
터엉-!
‘허허. 해냈구나!’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 전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유설의 공격을 보며 유진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믿을 수 없게도 창을 한 손으로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게다가 손녀의 공격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터엉-! 터엉-! 터터텅-!
두 자루의 목창이 맞물리며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계속해서 빨라지는 손녀의 공격에 유진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자신의 손발이 꼬여가기 시작하면, 손녀가 의도적으로 공격 속도를 늦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참, 백규도 대련을 피해 도망 다닌다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구만.’
대련 놀이를 오래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를 때릴 수가 없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이대로 계속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유진산이 보법을 밟자 그의 신형이 수많은 잔상을 흩뿌리며 늘어져 갔다.
그는 손녀와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그만!”
“힝. 벌써 끝이야?”
아이의 얼굴에는 아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봐준 게다. 다음에 다시 하자꾸나.”
“으응, 꼭이야~”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유진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짓을 했다.
“잠시 이리 와서 앉아 보아라.”
옆으로 다가온 유설이 다소곳이 앉아서 두 눈을 마주쳤다.
“왜에?”
유진산은 손녀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찾아올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지금처럼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우리 가문의 흥망성쇠가 네 손에 달려있다.”
“알았어.”
“그리고 할아버지 말을 꼭 명심해야 한다. 네 무공이 너무 강하니, 앞으로는 힘을 조절하거라. 적과 싸우게 되더라도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언제나 반절은 숨겨야 한다.”
“웅, 지금처럼?”
유진산은 마치 헛것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손녀의 말은 곧 조금 전의 대련에서 힘을 절반도 사용을 안 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이룬 자신을 상대로 말이다.
유진산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잡혔다.
바구니 하나를 움켜쥔 푸근한 인상의 중년 부인. 백규의 아내인 맹련화였다.
“여기들 계셨군요?”
“음. 잠시 손녀하고 수련 좀 하고 있었네.”
“간식을 좀 챙겨왔어요.”
그때 유설이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요?”
“자, 이모가 직접 만든 주먹밥이니, 어서 먹어 보거라.”
“히히. 잘 먹겠습니다~”
큼지막한 주먹밥을 두 개 집어들은 유설은 먼저 할아버지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서 먹어봐.”
“괜찮다. 할아버지는 별로 입맛이 없으니, 우리 설이 많이 먹거라.”
유진산은 별로 식탐이 없었기에 정해진 식사 외에는 어지간해선 입에 대지 않는다.
하지만 유설은 물러설 의사가 없는 듯했다.
마치 자신을 흉내 내기라도 하듯, 손을 내뻗으며 타이르듯 말해왔다.
“잘 먹어야지 할배! 그래야 쑥쑥 크지.”
유진산은 움찔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사이 손녀의 키가 자신보다 미세하게 더 커진 것 같았다.
유설의 먹성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차이는 더욱 벌어질 될 터.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주먹밥을 냉큼 낚아챈 유진산은 맹련화를 올려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 더 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