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우리 손녀가 싸움을 좀 잘해 (3)
쩌억-!
죽창의 뭉툭한 부분이 다가오는 도사의 후두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이 축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리라.
“……사, 사숙님들.”
어느새 유진산의 앞에 서 있는 종남파의 도사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주위로 널브러진 일곱 명의 일대제자들. 허무하게 쓰러진 종남칠검(終南七劍)의 모습에 홀로 남은 이대제자는 좌절했다.
비록 이들이 종남파의 최고수들인 종남사수(終南四手)에 비견되지는 못하지만, 나름 한가락씩 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좀 더 데려오지 그랬느냐. 이제 너만 남았구나.”
유진산의 목소리는 곱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도사는 현호 장로를 불러오라고 시켰던 이대제자였다.
녀석이 도망치면서 퍼붓던 욕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백팔십도 바뀐 태도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는 햇병아리였다.
무심히 시선을 돌린 유진산은 전투불능이 된 종남칠검을 한곳으로 끌어다 모으며 말했다.
“노부에게 애새끼라고 소리친 것을 다 들었다. 아까처럼 다시 한번 해보아라.”
“오, 오해이십니다. 제가 어찌 그런 미친 짓을…….”
이대제자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치를 살폈다.
반로환동한 고수는 등을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다람쥐 같은 등짝은 발길질 한 번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망상과 달랐다.
도망치려면 기회는 지금뿐.
도사는 그의 짧은 다리를 보며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얄팍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유진산이 아니었다.
“도망칠 수 있다면 그리해도 된다. 노부는 쫓지 않을 것이니.”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그가 있는 방향이 종남산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반대편으로 뛰어야 했다.
이대제자는 재빨리 등을 돌렸지만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무엇인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듯 갑자기 그의 동공이 경련을 일으켰다.
“현, 현호 장로님……?”
여덟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종남파에서 한 손 안에 드는 고수를 개처럼 끌고 오고 있었다.
반로환동한 고수가 한 명이 더 있었다니. 심지어 더 강해 보였다.
그 둘 사이에 갇힌 이대제자는 공포에 질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 이럴 수가.”
도주를 포기한 그는 사숙들의 옆으로 달려가 말없이 꿇어앉았다.
그때 유진산이 마지막 남은 일대제자를 가지런히 앉히며 등 뒤로 물었다.
“종남이 잡아 왔어?”
“응, 할배!”
“잘했다. 할아버지가 물어볼 게 있으니, 여기다 앉혀 놓거라.”
“알았어.”
얼굴이 곤죽이 된 현호 장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점혈을 당한 상태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손녀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은 모양이었다.
“잠시 이리 와보거라.”
“으응? 왜에?”
기분이 좋아진 유설은 방긋 웃으며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새 유진산의 손에는 하얀 꽃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머리에 꽂아주자 아이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히히. 나 예뻐?”
“그럼. 세상에서 우리 설이가 제일 예쁘지. 내려가기 전에 삼촌들한테 꽂아줄 꽃을 좀 따갈까?”
심문이 시작되기 전에 손녀의 시선을 돌려놓을 심산이었다. 아이에게 굳이 잔인한 심문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좋아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유설은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
“우리 설이가 꽃을 가져가면 삼촌들이 좋아할 게다. 왜 그러고 가만있어?”
“아니……. 삼촌들은 머리카락이 없는데 꽃을 어떻게 꽂아줘?”
유진산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에 꽂지 못하면 어떠하랴.
“그럼 귀에다 꽂아주면 되겠구나!”
그 모습을 상상해보던 유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히히. 신난다. 설이가 삼촌들 귀에 하나씩 다 꽂아줄 거야. 예쁜 꽃으로 골라서 따올게!”
“오냐.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서 놀다 오너라.”
입이 귀에 걸린 유설은 껑충껑충 뛰며 꽃밭이 보이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아이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유진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다짜고짜 현호의 따귀를 날려 그를 깨웠다.
철썩-!
서서히 눈을 뜨는 현호. 치욕스럽다는 표정이 서린 눈빛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도대체…… 우리에게 이러는 연유가 무엇이냐.”
유진산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한 자루 집어 들었다.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손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을 마쳐야 했으니.
“묻고 싶은 게 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대답해주었으면 좋겠군.”
예상대로 순순히 대답할 종남파의 장로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나타나 있었다.
“내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디 두고 보지.”
유진산은 일렬로 세워놓은 종남칠검과 이대제자의 앞에 우뚝 서서는 검을 사선으로 치켜세웠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비록 너는 오늘 죽겠지만,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이 녀석들은 살 수도 있다.”
장차 종남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었다.
현호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를 뿌드득 갈았다.
“괴물이로구나. 아이의 모습으로 어찌 그리도 잔혹한 짓을 벌이는 것이냐.”
“잔혹이라……. 재밌는 말이군. 그럼 너희들이 죄 없는 우리 가문을 몰살시킨 짓은 잔혹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더냐!”
“……?”
현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종남에서 극진문을 기습할 때 함께했던 세 명의 고수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놈들이 누구인지만 말해주면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죽이거라. 나는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
“같은 문파도 아닌 자들을 위해 제자들을 희생하겠단 얘긴가? 그럼 네 뜻대로 해줄 수밖에.”
첫 번째 희생양은 홀로 살아남은 이대제자였다.
유진산이 검을 치켜들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소리쳤다.
“사, 사백조님,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저희 다 죽습니다!”
현호는 인자한 미소로 이대제자를 바라보았다.
“아광아. 태어나면 다시 죽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니 겁먹지 말거라. 단지 그 시점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니라. 나는 네가 마지막까지 종남의 자부심을 지켰으면 좋겠구나.”
“…….”
확고해 보이는 현호. 그리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아광을 보며 유진산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유감이군. 네 사백조란 자는 너희들을 살릴 생각이 없는 듯하구나.”
말을 마친 유진산은 천천히 검을 잡아당겼다.
일대제자들인 종남칠검은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제자인 아광은 달랐다.
“시, 시…… 시발!”
갑작스러운 이대제자의 욕설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일대제자들이 노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네 이놈! 감히 장로님 앞에서 지금 무어라 했느냐?!”
“수치스러운 짓 말고, 명예롭게 죽어라!”
사숙들이 호통을 쳤지만, 죽음 앞에 선 아광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제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어차피 우리 문파도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겁니까! 사백조님이나 사숙들은 살 만큼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요!”
“너, 너 지금 뭐라고…….”
일대제자 중 한 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꾸짖으려 했지만, 아광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지금까지 개고생만 하다 이제 막 강호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뭐? 명예롭게 죽으라고? 이런 개 시발! 지금껏 문파에서 손발이 닳도록 수발들어줬으면 한 번쯤 살려줘도 되잖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젊은 제자로 인해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
“…….”
규율이 엄격한 구대문파에서 이러한 하극상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진산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인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현호 장로는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얼굴로 아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고요한 정적을 깨고 현호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 듣고 보니 네 말도 맞는 것 같구나.”
“장로님……?”
마음이 조금 진정된 아광이 민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현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유진산을 향해 물었다.
“정녕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실토한다면, 저 아이들을 살려주시겠소?”
이대제자였던 아광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유진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너를 제외한 모두가 살 수 있다.”
현호는 해탈한 표정으로 종남산을 올려다보았다.
평생을 보냈던 터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아두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무림맹의 비밀 무력단체인 창룡대(蒼龍隊)라 불리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유진산의 두 눈에 살기가 서렸다.
자신의 짐작이 기우이길 바랐건만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창룡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무림맹의 그림자들이오. 정마대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창룡대의 암중 활약 덕분이었소.”
유진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의 업적 따위는 관심 없어. 놈들과 접촉하는 방법은?”
“우리 문파에서 먼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소. 단지 무림맹의 총단을 통해 통보만 받을 뿐이오.”
“그럼 놈들의 사문이라도 말해.”
“삼십 년에 한 번씩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이 소집되어 창룡대로 키워진다고 들었소. 그 아이들의 출신은 알지 못하오.”
표정을 보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마교는 무너졌고, 사파 또한 정파의 호적수가 되지를 못하거늘, 어찌하여 무림맹은 창룡대라는 비밀조직을 양성한 거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동안 강호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해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오.”
약간의 실마리는 풀렸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는 없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죄를 물을 수 있는지 말이다.
“고작 그것이 네가 아는 전부라면, 이 녀석들을 살려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 유진산은 잠자코 기다렸다.
예상대로 현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무엇인가를 기억해낸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소림사로 가서 원강대사를 찾으시오. 당대의 창룡대원들을 훈련시켰던 교관 중에 그가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소림사(少林寺). 무림의 태산북두와 같은 곳으로, 구대문파의 말석인 종남파와는 차원이 다른 막강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원수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원강대사를 찾아가 유가장을 습격한 이유와 관련된 자들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군. 약속대로 네 제자들은 보내주겠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현호는 좌측으로 나란히 꿇어앉은 제자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창호야.”
종남칠검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가 슬픔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나는 비록 여기까지이지만, 너희들이 있기에 편히 갈 수 있겠구나. 그리고 저 아이를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사태가 마무리되면 하극상을 저지른 아광을 종남칠검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백님…….”
“큰 짐을 남겨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구나.”
장로와 제자들이 눈물겨운 작별을 고하고 있을 무렵, 유진산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잠시 후 그것을 눈치챈 도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그냥 갔는데요?”
“……?”
유진산은 이미 그들을 뒤로한 채 손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현호를 살려둔 이유는 이미 손녀가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처형식을 거행할 수는 없는 일. 만약 그가 원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해치웠을 테지만, 그게 아닌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설아!”
꽃밭에서 유설이 해맑은 미소로 다가왔다.
양손에는 알록달록한 꽃이 한가득 들려져 있었다.
“어떡해. 담을 데가 없어.”
양손에 나눠 들고 패도문까지 뛸 수도 없는 노릇.
꽃은 의미 없는 소품에 불과했다. 꽃을 따오라고 한 것은 단지 아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으니.
“음. 어쩔 수가 없겠구나. 바람에 날려 자유롭게 해주자꾸나.”
유설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써 따온 꽃을 이대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할배, 가만히 있어 봐! 좋은 생각이 났어.”
“……응? 무슨 생각?”
유진산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손녀를 보며 움찔거렸다.
아이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설이가 머리에 꽂아 줄게.”
“괜, 괜찮아. 괜찮대도…….”
“가만히 있어.”
유진산은 다급히 손사래를 쳐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손녀의 눈빛은 마치 거절하면 제압이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
“히히. 우리 할배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