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누가 감히 (2)
심문을 끝마친 유진산은 그를 기절시킨 뒤 밖으로 빠져 나왔다.
장로에 대한 부분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양화전이라…….’
현호 장로가 있는 위치였다.
하필이면 문파의 중심부라니. 그를 외진 곳으로 꿰어낼 방법이 관건이었다.
심문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활용하여 거짓으로 그를 유인할 생각이었다.
주전자를 움켜쥔 유진산은 종남파의 심장부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연무장을 지나고 연못을 돌아 전각이 밀집한 곳을 비집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십수 명의 도사들을 마주쳤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이봐, 거기 너!”
뒤를 돌아보자 약관을 갓 넘겨 보이는 젊은 도사가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뱀처럼 찢어진 눈매와 깔보는 듯한 시선. 호승심이 넘치는 삼대제자쯤으로 보였다.
기분이 나빴지만, 인기척이 많은 이곳에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나요?”
“그래, 너! 이번에 입문한 녀석들 중 한 명인가? 여긴 막내 항렬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어떻게 들어왔어?”
마음 같아선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유진산은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올려 보였다.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잠시 길을 잃었습니다.”
“근데 말투가 왜 그래?”
평생을 달고 살았던 말투가 어찌 쉽게 고쳐지겠는가.
그의 말투는 아이라고 하기에 이질적인 느낌이 많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반로환동한 노인이 아이의 말투를 흉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녀와 연습이라도 해둘 것을. 이미 후회해도 늦은 상황이었다. 습관처럼 연륜이 녹아든 말투는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수록 삼대제자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갔다. 막내 항렬이 감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놈이 감히 나를 우롱해?”
그의 발끝이 다짜고짜 유진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콰직-!
“크악!”
공격을 가한 도사의 입에서 나온 신음이었다.
마치 바위를 걷어찬 것 같은 충격에 그는 자신의 발등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반면 유진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조차 없었다.
“왜 그러시는 겝니까?”
“너 이 새끼, 발목에 뭘 숨겼어?”
“거 참, 그냥 가만히만 있었거늘,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표정과는 달리 유진산의 속내는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예닐곱 살짜리의 말투와는 괴리가 있었다. 오히려 흉내를 낼수록 더욱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지체되는 시간까지. 설상가상 주변의 이목까지 이곳으로 집중되며, 도사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고 있었다.
“종해 사형, 왜 그러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다쳤어요?”
두 명의 젊은 도사가 다가오며 종해라 불린 도사를 살폈다.
종해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사제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끄……. 저 늙은이 말투 쓰는 애새끼 잡아.”
도사 중 한 명이 어리둥절한 유진산에게 다가가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이거 낭패로구나.’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는 법. 뜻하지 않은 곳에서 고난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어린 도사들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다니.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 쥐방울 같은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은 입을 꾹 닫은 채 상황을 살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종해가 다가와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순순히 따귀를 맞아 줄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왼쪽 팔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뻐억-!
“아악!”
이번에도 종해는 손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치 벽돌을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때 유진산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도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요놈 봐라?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어서 손을 놓아주시게.”
“놓아주시게? 이 녀석이 감히 사숙들을 놀리네. 너 이름이 뭐야?”
소란스러움은 점차 거세졌으며, 근처를 배회하던 도사들이 하나둘씩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이상한 도사 녀석 하나 때문에 일이 꼬여버리고야 말았다. 이 상태로 염탐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누군가의 호통이 뿜어져 나왔다.
“뭣들 하는 게야!”
화들짝 놀란 도사들이 좌우로 길을 비켜섰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도사가 뒷짐을 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인물로 보였다.
그의 등장에 십수 명의 도사들이 양손을 모아 포권지례를 취했다.
“현호 장로님을 뵙습니다…….”
유진산의 눈빛이 흔들렸다. 공교롭게도 목표물이 먼저 다가온 것이다. 그가 기거하던 전각의 근처였으니 이상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현호 장로는 노한 얼굴로 도사들을 꾸짖었다.
“사숙이란 놈들이 새로 입문한 제자를 살펴주지는 못할망정, 어찌 단체로 괴롭힌단 말이더냐!”
종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유진산을 향해 검지를 내뻗었다.
“오, 오해이십니다. 저 녀석이 저를 먼저 공격했습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는 소리였다. 무공은 둘째치더라도 어른과 아이의 체급 차이였으니.
다른 도사들은 종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호의 반응이 뭔가 좀 이상했다.
장로의 신분인 현호는 강호에서 닳고 닳은 노련한 인물이었다.
분명 그의 예리한 눈빛은 퉁퉁 부어오른 종해의 손목을 살펴보고 있었다.
“…….”
잠시 후 그는 묵묵히 유진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와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유진산의 긴장감도 더해졌다.
‘당황하지 말자.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만, 내가 외부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현호는 어느새 한 발자국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유진산의 모습을 아래로 살펴보고 있었다.
“…….”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일까? 유진산의 긴장감이 극에 달할 찰나였다.
돌연 현호의 오른손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왔다.
쐐에엑-!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손바닥. 한눈에 보아도 나무를 꺾을 만큼 가공한 위력 앞에 유진산은 선택해야 했다.
결심을 굳힌 그는 반사적으로 작은 손바닥을 마주쳐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유진산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초?’
상대의 공격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공격이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한 속임수였음을.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유진산과 현호의 손바닥이 맞부딪친 순간 거센 장력이 물결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앙-!!
우렁찬 폭음과 함께 구경하던 도사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 저게 뭐야…….”
“이럴 수가…….”
도사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현호 장로의 신형이 튕겨 나가듯 주르륵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막내 항렬이라 믿었던 쪼그만 녀석이 도리어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을 무렵. 유진산은 현호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유진산의 주먹이 십여 차례나 그의 복부를 두들겼다.
쾅-! 콰콰쾅-!!
호두 같은 주먹이었지만 일격에 바위를 분쇄할 정도의 내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돌발적인 기습에 현호는 혼비백산했다.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방어하던 그는 보법부터 밟았다.
스르르륵-!
위기의 순간 잔상을 남기며 겨우 위치를 벗어났지만, 검을 뽑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유진산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지금은 비록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을 듯했다.
주 무기인 창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맨손 격투는 유진산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시간은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었다.
“저, 저놈 정체가 뭐야?”
“장로님을 도와야 하는 거 아냐?”
지켜보던 도사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자신들이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곳은 문파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근처에서 그것을 감지한 종남의 다른 원로 고수가 다가온 것이다.
“모두 비키거라!”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백발의 도사 한 명이 제자들의 머리 위로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한눈에 보아도 현호에 뒤지지 않는 몸놀림.
그의 등 뒤로 제자들의 외침이 뿜어져 나왔다.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급해진 것은 유진산이었다.
그가 합류하자 사태는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렸다.
이대 일의 싸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황이 유리해진 장로들은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듯 검을 뽑지도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정신없이 두들겨 맞아야 했다.
콰직-!
“큭!”
현호의 발길질에 넘어진 유진산. 그는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좌측으로 재빨리 굴렀다.
그가 있던 바닥이 터져나가며 태상장로의 발바닥이 내리꽂혔다.
콰앙-!!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이어진 것은 벼락처럼 꼽히는 현호의 손바닥이었다.
쩌억-!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막아냈지만, 그 충격이 엄청났다.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태상장로의 손에 또다시 얼굴을 가격당하고야 말았다.
쩌억-!
“크윽!”
반격은커녕 방어만 하는 것도 벅찬 상황. 이대로는 도저히 답이 없었다.
시간을 더욱 지체한다면 빠져나갈 수조차 없을 터. 뒷걸음질치던 유진산은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분하지만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구나.’
그의 소매에서 붉은 구슬이 모습을 드러내며 손아귀에 움켜쥐어졌다. 거기에 내력을 주입하자 구슬이 쾅 하고 터져버렸다.
찰나의 순간 희뿌연 연기가 확 퍼져나가며 주변을 끊임없이 잠식해갔다.
백규가 건네준 백연단(白煙團)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운무. 그 안에서는 기(氣)의 흐름을 느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사도련의 간부들이 사용하는 보물답게 그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주변을 포위한 도사들은 몹시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안개가?”
“방금 그놈 어딨어?”
그 시점에서 유진산은 뒤도 안 돌아보고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포위망을 벗어난 이후부터는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 * *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패도문의 거처로 돌아온 유진산.
어깨가 축 처진 그는 방 안으로 힘없이 걸어들어왔다.
손녀는 놀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억울하게 죽어간 식솔들에게 전하는 속내였다.
코앞으로 다가온 가문의 원수들. 하지만 그 상대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방 안에 소리 없이 누운 그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었다.
반로환동을 하며 감성까지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일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기력함에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할배, 언제 왔어?”
“…….”
“내 선물은?”
방 안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손녀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이의 선물을 사오기로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은 봇짐 안에 있었고, 종남파의 어딘가에 숨겨놓았다가 급히 도망치느라 챙겨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오늘 정신이 없어서 미안하구나. 내일 꼭 사주마.”
평소와는 달리 유설은 떼를 쓰지 않았다.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일까?
살금살금 다가온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할배 목소리가 왜 그래? ……울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유설은 그의 등 뒤에 앉아 어깨를 흔들었다.
“힝. 왜 그래. 빨리 일어나 봐.”
유설이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려 했지만, 유진산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화경의 힘을 어찌 당하겠는가.
이불에 내력을 불어넣었음에도 어림도 없었다.
부아악-!
단번에 이불을 빼앗아버린 유설은 큼지막한 눈을 찢어질세라 부릅떴다.
퉁퉁 부어버린 할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야. 누가 때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