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내가 네 할아버지다 (2)
유진산은 한참을 설명하고 나서야 손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 수 있었다.
“정말 할배야?”
“그래, 아가.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구나.”
유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겉모습은 자신과 같은 나이대의 남자아이였지만, 말투는 영락없이 할아버지가 분명했다.
느껴지는 기(氣)의 성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렴풋이 닮은 얼굴의 이목구비까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히히.”
갑자기 해맑게 웃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마음이 놓였다.
변한 모습에 당황하리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 녀석. 할아버지가 이렇게 변했는데 웃음이 나오느냐.”
유설은 할아버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좋아, 할배!”
“큭. 숨 막히니 이거 놓거라.”
겉모습이 비슷하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아이는 마치 친구가 생겼다는 듯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을 풀어준 유설은 눈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할배, 나랑 놀자!”
“너랑 뛰어놀기에는 내 무릎이…….”
유진산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던 대답을 멈추고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체력과 관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갑자기 여덟 살짜리 아이와 뛰어논다고 생각하기엔 뭔가 좀 어색했다.
‘이걸 어쩐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평소 아이와 놀아주지 못했던 순간들을 못내 아쉬워했던 유진산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못 해 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유일하게 남은 가문의 핏줄이거늘.
“……또 어디 아파?”
“아니다. 할아버지가 뭐 하고 놀아줄까?”
얼굴이 활짝 펴진 유설이 혀를 한 번 날름하며 소리쳤다.
“나 잡아봐!”
술래잡기라니.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었지만, 다시 물릴 수도 없는 노릇.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몸 상태도 확인해야 하지 않는가.’
유진산은 호흡을 길게 한 번 들이켜고는 손녀의 뒤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짧아진 지금은 예전보다 경공을 펼치기에 불리한 신체였다.
하지만 오히려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환골탈태를 이룬 후 전신의 뼈마디가 무공을 펼치기에 최적화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병상에만 누워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달리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허허헛!”
유진산은 자신의 웃음소리에 또 한 번 놀라고야 말았다. 아이의 목소리로 할아버지의 웃음이라니. 지금의 상황이 쉽사리 적응되질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유설은 장원의 외곽까지 당도하여 담벼락을 뛰어넘고 있었다.
손녀의 뒤를 쫓아 도약하는 유진산.
타앗-!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는 그의 그림자는 마치 한 마리의 매와도 같았다.
오 장 이상의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금방 잡아주마, 요 녀석!”
“히히. 빨리 나 잡아봐!”
바닥에 착지한 유진산은 전력으로 달려 보았다.
그가 속도를 높이자 손녀의 경공 또한 더욱 빨라졌다.
화살보다 더욱 빠른 움직임. 두 개의 빛살이 움직이는 자리로는 돌풍이 불어닥쳤다.
어느새 둘은 마을을 벗어나 숲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타타타탓-!
둘이 달리는 곳으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풀잎을 밟고 뛰어도 꺾이는 잎이 하나도 없었다. 무림고수들이 펼칠 수 있는 경공술인 초상비(草上飛)였다.
“거기 서거라!”
둘의 거리가 몹시 가까워졌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 말 듯했지만, 일정 거리 이내로는 절대 좁혀지지 않았다.
유진산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가 속도를 조절하며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임을.
“히히. 히히히힛!”
자신의 경공이 아무리 빨라졌다고 한들, 손녀의 무위는 이미 절대자의 반열이었다.
갑자기 아이의 경공이 미친 듯이 빨라지며 거리가 급격히 벌어졌다.
타앗-!
새처럼 날아오른 유설은 허공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유진산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허공답보(虛空踏步)?’
허공을 밟고 달리는 기예로 경공 중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기술이었다.
유진산도 검후(劍后)의 은퇴식 때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도저히 손녀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던 그는 추격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이제 그만하자꾸나.”
항복하기 무섭게 아이가 쏜살같이 되돌아오며 물었다.
“내가 이겼어?”
“그래, 할아버지를 이기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둘이 함께 마음껏 놀아본 기억이 언제 있었던가.
친구처럼 변해 버린 할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엄청 많은 듯했다.
“할배, 이제 우리 다른 놀이 할까? 내가 재밌는 거 알아.”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를 보니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무턱대고 수락했다간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급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남는 것은 시간뿐이거늘.
“우리 설이랑 놀면 뭐든지 다 좋지. 하지만 조금 쉬었다 하는 것이 좋겠구나. 백규 아저씨를 만나봐야 하거든.”
“힝. 알았어.”
평소처럼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유진산은 어색함을 느꼈다.
자신과 똑같아진 눈높이. 그리고 기존과 달리 손을 높게 들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거, 잘 먹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구나.’
자칫하면 성장이 빠른 손녀가 자신보다 더 커질 우려도 있었다.
기존에는 신체적으로 위에서 돌봐줬다면, 이제는 옆에서 돌봐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힘에서도 당할 수가 없지 않은가. 육아의 난이도가 예전과는 달랐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근심이 떠나질 않았다.
* * *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부엉이가 울어댔다.
패도문의 장원에도 인기척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고요가 가득해질 무렵이었다.
문주의 집무실에 때아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경비 무사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어댔다.
눈앞에서 웬 꼬마가 뒷짐을 지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해하지 말아라. 잠시 문주를 불러주면 내 설명하겠다.”
“이게 싸가지없이 얻다 대고 반말이야?”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해가며 설득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최대한 진지하게 얘기했으나, 아이의 목소리에 무슨 위엄 따위가 있겠는가.
역시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경비 무사의 따귀였다.
그러나 다가오는 손바닥을 주시하는 유진산은 여유가 넘쳤다.
애초부터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 속도가 더욱 느릿하게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감각이 더욱 향상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가 상체를 우측으로 슬쩍 비틀자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로 뿜어졌다.
파앙-!
“엇?”
경비 무사가 당황하는 사이, 유진산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재빨리 낚아챘다.
“어른한테 싸가지가 없다니. 오늘 교육을 좀 받아야겠구나.”
꽈악-!
그가 손가락을 슬며시 꺾자 경비 무사의 고함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너, 너 이 새끼 뭐야?”
무지막지한 꼬마의 힘 앞에 그는 몹시 당황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공을 사용하여 벗어나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놈이 그래도?”
“일, 일단 놓고 얘기하자!”
몸에 베여있던 습관 때문이었을까? 유진산은 순간 자신이 심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손목을 놓아주었다.
“이럴 의도까지는 없었네. 노부도 적응이 좀 안 돼서 말이지.”
손가락을 주무르는 무사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웬 노인 행세를 하는 꼬마가 나타나 훈계를 하다니.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너, 너 정체가 뭐야?”
유진산은 대답하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전각에서 만나려던 자가 모습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선으로 길게 새겨진 얼굴의 흉터와 우람한 근육. 그리고 힘줄이 돋아난 두피까지.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본 백규의 모습은 마치 괴물 같아 보였다.
“백규 아우, 나일세.”
“……?”
“드디어 성공했네. 알아보시겠는가?”
백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넋을 놓은 그는 한참이나 미동이 없었다.
조금 전의 경비 무사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유진산의 주변을 맴도는 잔잔한 기(氣)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일까?
유진산은 걱정 반 기대 반 하는 눈치로 잠시 그를 기다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백규가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정말 형님이오? 이것 참, 어찌 이렇게 귀여운 꼬마가 되셨단 말이오? 하하하!!”
“웃을 기분이 아니네. 우리 손녀랑 눈높이가 똑같아졌어.”
백규는 무의식중에 앞으로 내밀던 손을 흠칫하며 회수했다. 자신도 모르게 유진산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전각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하.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합시다.”
“그리하지.”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백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내올 테니 일단 좀 앉으시오.”
의자에 걸터앉은 유진산은 발바닥이 바닥에 닿지를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는지, 백규는 웃음을 참느라 이마의 힘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하하. 좀 어려지긴 했지만 뭐 어떻소? 그만큼 수명이 더 늘어났으니까,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니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강호에서 수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앞길이 막막할 뿐이네.”
“음. 지금 형님 또래는 금방 크는 시기이니 겉모습에 너무 연연할 것 없소. 조금만 지나도 키가 쑥쑥 자라있을 거요.”
떨어지는 낙엽처럼 빠른 것이 세월이 아니던가. 당장의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터. 우선은 백규의 말대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그와 마주한 유진산은 안부를 주고받으며 탁상을 살펴보게 되었다.
널브러진 서신들과 여러 표식이 새겨진 섬서의 지도까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로군.”
백규는 찻주전자를 가져와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이오. 정파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정파와 사파는 시시때때로 전쟁과 정전을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때마다 규모가 좀 다를 뿐.
그때 묵묵히 차를 음미하던 유진산의 미간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윽. 이게 뭐지?”
평소 차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즐겨 마시던 그였으나 지금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형님이 좋아했던 홍아차이지 않소. 하긴, 맛이 씁쓸하니 애들 입맛에는 맞지 않는가 보오.”
한숨을 내쉰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쨌거나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니 정신이 없겠군. 전황은 어떻지?”
“뭐 아시지 않소. 정파와의 싸움에서 사파가 우세했던 적이 한 번도 없던 거. 여기 지도의 붉은 깃발들이 이미 전부 박살 난 곳들이오.”
나름대로 규모 있는 문파는 물론 이름 있는 사도세가도 몇 곳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호현 또한 더는 안전지역이 아닐 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뭐 그렇긴 하지만, 련주께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니 아직 끝난 것은 아니오. 그나저나 형님한테도 전해줄 정보가 있었소.”
“정보라니?”
“그간 병상에 반년이나 누워있지 않았소. 그렇기에 잠시 미뤄뒀는데,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겠구려.”
자신이 백규에게 부탁했던 정보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엇인가를 눈치챈 유진산은 동공이 부릅떠졌다.
“……설마?”
그 순간 백규의 손가락이 붉은 깃발 중 하나를 가리켰다.
“맞소. 극진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형님이 말한 놈들이 나타났었소. 목에 용 문신을 새기고 다니는 놈들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