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축하드릴 일이로군요 (3)
유진산은 지원군으로 편성된 무사 삼십여 명과 함께 동천시장으로 향했다.
등에는 손녀가 업힌 채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자신의 등 뒤야말로 험난하고 모략이 가득한 강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장소에 도착하자 두 배 정도나 되는 인원이 미리 대기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의 외형이 동일했다. 상의를 탈의한 대머리 무사들. 누가 패도문인지, 마천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웃으며 다가오는 백규의 옆에는 마천회의 회주인 장량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던 둘의 관계가 막역지우처럼 다정해진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고생들 많았네. 녀석들이 대비하기 전에 어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예, 어서 가서 사혈문을 접수하고 마무리를 지어야지요.”
여유가 넘치는 백규와는 달리 장량은 뭔가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가 유진산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르신께서 오셨으니, 이제 걱정 없겠군요. 어서 가서 야비하고 간악한 사혈문의 수뇌들을 모두 제압해주십시오.”
“내가? 왜?”
시큰둥한 유진산의 대답에 장량이 어리둥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나는 단지 구경하러 가는 것뿐이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장량이 당황하고 있을 때 묵묵히 지켜보던 백규가 슬그머니 등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마천회의 장로 여일이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화경에 접어드신 어르신께서 나서주신다면, 유혈 사태를 피하고 간단히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가 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화경이라니? 누가?”
여일의 얼굴에 살며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유진산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절세의 무공을 보유하고 계시다는 것을요. 사혈문에 도착하면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유진산은 먼 산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나는 내가 화경이라고 말한 적이 없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얘기하지 않았나. 아니라고 말이야. 나는 그냥 늙고 힘없는 노인일 뿐일세.”
그 순간 장로 여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회주 장량을 보니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저희는 어르신만 믿고 패도문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지금 와서 화경이 아니라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백 문주께서 말씀을…….”
장량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백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한 나머지, 그가 자리를 피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사이 저 멀리 부하들의 틈새로 자취를 감춘 듯했다.
장량이 목 뒤를 부여잡았으나, 장로 여일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그, 그럼 저희 마천회에서 보여주신 무공은 무엇입니까? 분명 화경이 아니라면 할 수가 없는 수준의 기술이었습니다.”
“이상하군. 노부는 그날 아무런 무공도 사용하질 않았네.”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분명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예사롭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의 흐름이 뭔가 어색했다.
화경의 고수라고 치부하기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여일의 머릿속은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우리 마천회의 모두가 보았습니다. 어르신이 아니라면 누가 격공섭물과 삼매진화를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그 순간 노인의 등 뒤에서 어깨 위로 여자아이의 얼굴이 빼꼼 올라왔다.
“설이가 해떠.”
유설이 진지한 표정으로 여일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여일은 아이의 말을 믿지도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해석할 수도 없었다.
당황하던 그때 불현듯 무엇인가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했다, 시발.’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속았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패도문에서 무엇인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패도문처럼 머리를 삭발한 지금 어찌 다시 사혈문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때 여일의 귓가로 회주의 전음이 날아왔다.
- 나도 황당하지만, 어차피 우리의 상황이 더 유리하니 상관없다.
사혈문의 기습조를 손쉽게 제압함으로써 아군의 전세가 더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마천회로서도 직진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여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백 문주를 믿어봅시다. 어쩌면 우리는 나설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럴지도 모르겠군. 무식하게 강한 인물이니까.
그들이 전음을 주고받을 무렵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패도문이 선두에서 행군을 개시한 것이다.
장량과 여일도 축 처진 어깨로 부하들을 이끌고 뒤따랐다.
그리고 유진산은 웃음을 참으며 대열에서 가장 후미로 이동했다.
‘녀석들, 어차피 순순히 따라갈 거였으면서.’
그의 눈에는 마천회의 간부들도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대열을 갖추어 이동하는 백여 명의 무사들.
무림인이 이렇게 많은 수가 모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마을의 주민들은 서둘러 좌우로 물러나며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일식경이 지난 후 드디어 행렬이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곳에선 사혈문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 무사 둘이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들로 오셨소?”
대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임을.
양손으로 쌍도를 움켜쥔 근육질의 무사가 선두로 나왔다.
찬란한 햇빛이 그의 머리에서 반사되며 경비 무사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이놈들아, 백규 형님이 왔다!”
패기 넘치는 그의 모습에 경비 무사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그의 뒤로도 같은 모습을 한 자들이 백여 명이 넘었으니 움츠러드는 것이 당연했다.
“문,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백규는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들의 사이를 태연히 지나쳤다.
자신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전해 들었을 터. 그냥 들여보내라고 언질을 받았으리라.
예상대로 장원의 앞마당에 사혈문의 일원이 모두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붉은 경장 차림의 무사들이 사십여 명. 그리고 그들을 감싸듯 비슷한 인원의 흑의인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적지 않은 전력이었지만, 전체적인 숫자는 패도문측이 더욱 많았다.
“어이, 천수! 그간 잘 지냈는가?”
패도문과 사혈문의 문주는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선두에서 껄렁거리며 다가오는 백규의 모습에 사혈문의 문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문주라는 녀석이 품위는 어따 팔아먹었느냐. 하는 짓을 보니 시정잡배가 따로 없구나.”
백규는 양손에 움켜쥔 쌍도를 목 뒤에 걸치고는 씩 웃어 보였다.
“사파인들에게 품위 따위는 사치에 불과해. 자 이제 어쩔 텐가? 우리가 더 유리한 것 같은데.”
천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는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보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전에 궁금한 게 있다. 마천회를 포섭한 것도 모자라 함정까지 파놓고 우리를 유인하다니, 무식한 네가 어떻게 이런 수를 두었지?”
앞만 보고 돌진하는 패도문이 아니었던가. 사혈문의 문주 또한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쉽게 호현의 패자가 되리라 예상했다.
결코,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한테 형님이 하나 생겼거든.”
백규의 시선이 후열의 가장 구석진 곳을 향했다.
그곳엔 아이를 업고 죽립을 눌러쓴 채 창을 움켜쥐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유진산의 정체를 알 길이 없던 천수는 어리둥절했다.
“호현에 외부인까지 끌어들였단 말인가?”
“뭐 따지고 보면 꼭 외부인이라고 볼 수는 없지. 우리 패도문의 식구나 마찬가지니까. 어쨌거나 이제 결판을 내야겠지?”
상의를 탈의한 대머리 무사들이 백규의 뒤로 쭉 늘어서며 대열을 갖추었다.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돌진할 상태였다.
물론 자세만 잡는 것일 뿐 집단전투로 치달을 리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목적은 호현의 패자를 결정하는 것일 뿐. 상대 세력의 궤멸이 아니었기에 그리할 이유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천수는 검을 뽑아 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사혈문의 문주인 천수 또한 백규와 마찬가지인 초절정고수의 반열이었다.
쉽게 볼 수가 없는 강자였지만, 백규의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도 없었다.
“예전의 너 맞아. 이십 년 전쯤 나한테 살려달라고 빌었던 천수.”
백규와 천수는 호현의 토박이로 어린 시절부터 경쟁해왔던 관계였다.
같은 사파임에도 잦은 다툼이 있었고, 승부는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그가 기억하기 싫었던 일을 꺼내자 천수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 나왔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악연도 인연이잖아. 옛정을 생각해서 지금 포기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하지만 덤비면 진짜 죽어.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는 놈은 필요 없으니까.”
천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야망은 결코 이곳에서 뜻을 굽힐 만큼 작지 않았다.
복수할 날 만을 꿈꿔오며 칼을 갈아왔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가 움켜쥔 검 끝이 백규의 목젖을 가리켰다.
“나 사도광검(邪道光劍) 천수. 오늘 사혈문을 대표해 너를 쓰러트리고 패도문을 접수한다.”
백규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시 후 둘의 간격이 삼 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 백규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어느새 천수의 측면에서 다시 나타나 오른손에 움켜쥔 도를 후려치고 있었다.
쩌엉-!
거센 폭음과 함께 천수의 신형이 후방으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기(氣)의 돌풍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엄청난 내공.
지켜보던 자들은 무식한 그의 모습에 놀라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럼 죽어야지.”
백규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찰처럼 일그러진 얼굴.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그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였다.
잠시 후 백규와 천수가 서로 뒤엉키며 본격적인 싸움을 개시했다.
쩡-! 쩌엉-! 쩌저정-!!
검강과 도강이 맞물리며 둘의 신형이 밝은 빛에 휩싸여버렸다.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천수의 쾌검은 일품이었지만, 백규의 이도류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지켜보던 자들은 난무하는 불꽃과 날카로운 기의 파동에 말려들지 않게 거리를 벌렸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격렬한 싸움.
서로가 팽팽한 듯 보였지만, 빛무리 속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아.”
그의 어깨 위로 유설의 턱이 걸쳐졌다.
“응?”
“이 정도의 고수들이 겨루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매우 귀중한 경험이지. 네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눈빛을 빛내어 싸움을 지켜보던 유설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들머리 아찌가 이겨떠.”
“음. 그럼 잠시 눈을 가려보아라. 네 말이 맞는지 할아버지가 먼저 한번 봐야겠구나.”
“알아쩌.”
유설은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가 절단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