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축하드릴 일이로군요 (2)
치료를 마치고 거처로 돌아온 유진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앞에는 세 살배기 손녀가 대(大)자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에게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주는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반로환동이라……. 젊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만, 정도를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문제로구나.’
충분한 조건이 갖춰졌지만,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지금은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오 년.
그동안 손녀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며 버텨볼 요량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환골탈태는 잠시 미뤄야겠지만, 얻은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임맥이 뚫리며 기혈의 흐름이 좀 더 원활해졌다.
그리고 왼팔의 부상이 치료되었으니 다시 창술을 사용할 수 있을 터.
우선 절단된 화룡신창부터 복원시켜야 했다.
* * *
이튿날 아침.
유진산은 봇짐을 둘러맨 채 손녀의 손을 잡고 동천시장으로 나왔다.
호전적인 사파인들이 가득한 곳이지만, 패도문의 관리에 있는 구역인 만큼 안전지역이었다.
유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곳곳에 펼쳐진 노점상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돌연 유진산이 걸음을 휘청거렸다. 손녀가 손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어이쿠. 아무 때나 내공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방금 할아버지 넘어져서 다칠 뻔했다.”
겉보기에는 유약해 보이는 아이였지만, 힘이 어찌나 억센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유설이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하배 이거 뭐야?”
좌측 노점에 팔뚝만 한 무엇인가가 주렁주렁 꽂혀 매달려 있었다. 향긋하고 고소한 향이 코를 자극해왔다.
“음, 저건 간장에 절인 돼지의 앞발이로구나. 특별한 날에 즐겨 먹는 음식이지.”
유설이 검지로 자신의 코를 들어 올렸다.
“꿀꿀, 돼지?”
“허허. 그래, 맞다. 우리 설이는 동물 흉내도 잘 내는구나. 한번 먹어보겠느냐?”
“시더. 돼지 불쌍해~”
“쑥쑥 크려면 음식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해. 어젯밤에 네가 먹은 것도 돼지고기였다.”
“아니야. 설이 돼지 안 먹어떠.”
시치미를 뚝 떼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유진산은 아이를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조손은 잠시 후 대장간에 도착했다.
철야방(鐵冶房)이란 현판 아래. 상의를 탈의한 여덟 명의 대장장이가 망치로 모루질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물이 망치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제가 방주 양천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르신.”
“창 자루를 새로 제작하러 왔네.”
유진산은 아이를 내려놓고는 봇짐의 화룡신창을 그에게 내밀었다.
무심코 창날을 살펴보던 양천이 어느 순간 놀란 눈을 부릅떴다.
“이 창은…….”
“알아보시겠는가?”
“최고의 명장(名匠)이 만든 보물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제 일평생 진규의 작품을 만져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꿈만 같군요.”
“우리 가문의 가보일세. 화룡신창이란 이름이 붙어있지.”
창날을 살펴보는 양천은 넋을 놓고 있었다.
“진규가 만든 모든 무기에는 숨겨진 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특이한 점이 없었는지요?”
“음. 이 창을 통해 발출하는 기(氣)는 유백색이 아닌 붉은 기운을 띄더군. 내력의 소모가 더욱 크지만, 초식을 펼칠 때 그 위력이 배가되네.”
“정말이지 대단한 물건입니다……. 자루는 어떻게 제작해드릴지요?”
창의 소모성 부속인 자루를 교체하는 것은 흔한 일로 유진산도 몇 번 경험이 있었다.
“재질은 기존과 동일하게 흑단목을 사용해주고, 길이는 날을 포함하여 정확히 일 장으로 맞춰주시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자루를 제작하려면 창날의 치수를 측정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하지.”
능숙하게 일을 마친 양천은 다시 유진산에게 창을 돌려주었다.
“닷새 후에 다시 찾아오시면 만들어놓은 자루와 결합해드릴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진산은 창을 봇짐에 챙겨 넣고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임시로 사용할 창을 하나 구매하기 위함이었다.
수십 자루의 창을 살펴본 그는 손에 익숙한 길이와 비슷한 무게의 것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이것도 한 자루 구매하겠네. 모두 얼마인가.”
“…….”
어찌 된 일인지 양천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무엇인가 충격적인 것을 보았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유진산도 무엇인가를 눈치채고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옆에 붙어있던 손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천의 시선이 향한 곳. 아이의 모습을 대장간의 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설이 꺼야.”
짤막한 아이가 자신의 키보다 열 배나 되는 언월도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룡언월도를 본 따 만든 모조품인 듯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성큼성큼 들고 오는 아이의 모습이 경악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천은 물론 근처에 있던 대장장이들도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팔십 근이 넘는 것을 어떻게…….”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이 버럭 꾸짖었다.
“할아버지가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고 했지? 오늘 한번 혼나야겠구나!”
갑작스러운 호통에 유설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흐이잉.”
창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손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손을 내뻗어 언월도를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아이의 품에 안긴 창은 바닥에 깊숙이 파고든 고목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력을 불어 넣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비록 겉모습은 유약해 보일지라도 반신(半神)의 경지라 일컬어지는 화경이었다.
손녀가 마음먹고 버티고 나오자 답이 없었다.
“어, 어서 이거 놓거라!”
유설은 창을 부둥켜안고 서럽다는 듯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줄다리기에 장인들은 놀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기에 바빴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을 살며시 놓았다. 더욱 격하게 하면 아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온화한 미소로 유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타이르듯 물었다.
“그것이 그리도 갖고 싶더냐.”
“응…….”
그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럼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하자꾸나. 더 좋은 것으로.”
“설이 꺼?”
“그럼! 대신 할아버지와 창술을 같이 수련하는 조건이다.”
“알아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 유진산의 마음도 흐뭇해졌다.
‘드디어 살풍창을 같이 연마할 수 있겠구나!’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유일하게 손녀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가문의 비기. 살풍창(殺風槍)의 연마를 같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었으니.
아이에게서 언월도를 건네받은 그는 양천에게 돌려주며 물품 하나를 더 주문했다.
“굵기는 손가락 마디 한 개. 길이는 반 장. 끝은 뭉툭하고 날이 없는 몽둥이 형태의 목창(木槍)을 하나 제작해주시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닷새 뒤 찾으러 오겠네. 비용은 모두 얼마인가.”
“은자 세 냥입니다.”
계산을 마친 유진산은 손녀를 번쩍 들어 가슴으로 안아 들었다.
유설은 돌아가는 내내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고 있었다.
“힝.”
조금 전 혼난 일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진 유진산은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해주었다.
“다섯 밤만 지나면 선물이 완성된다는구나.”
“……정말?”
“그럼! 돌아가면 할배가 재밌는 놀이를 알려주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층 발걸음이 가벼워진 그는 한달음에 거처로 향했다.
패도문에 마련된 거처의 뒷마당.
손녀와 마주 보고 선 유진산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자, 할아버지의 옷을 한번 잡아보아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뭇거리던 유설은 앙증맞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진산의 신형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응?”
마치 바람을 움켜쥐듯 헛손질을 한 유설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느새 할아버지는 뒤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허헛. 다시 한번 해보거라.”
몇 번을 더 시도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에 어리둥절했지만, 유설은 할아버지와 처음으로 하는 술래잡기에 언제 울었냐는 듯 까르륵거리며 좋아했다.
한참을 반복하던 유진산은 은근슬쩍 걸음을 멈추고 아이에게 붙잡혀 주었다.
“어이쿠, 잡혔구나!”
“히이~”
유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그는 방금 보여준 기술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방금 할아버지가 보여준 것은 보법(步法)이라고 하는 게다.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고, 공격을 회피할 때 사용하는 기술이지. 한번 배워보겠느냐?”
“응!”
재촉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이미 손녀는 도약 기술인 제운종이라는 경신법을 터득한 상태였으나, 전투에 응용할 수 있는 보법은 처음이었다.
유진산이 가르치려는 것은 가문의 기술인 선풍보법(仙風步法)으로, 보법을 펼칠 때의 모습이 바람처럼 움직이는 신선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익히기가 어렵지 않아 아이에게 전수하기에 제격이었다.
“보법의 원리는 폭발적인 기(氣)의 발출을 통해 순간적으로 몸을 이동시키는 것이지.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는 없을 테지만, 할아버지를 따라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게다.”
“알아떠.”
배우려는 아이의 의지가 강하다면 가르쳐주는 사람도 신이 나는 법. 구결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그의 얼굴엔 흐뭇함이 떠나질 않았다.
보법을 반복해서 보여줄 때마다 아이는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그렇게 한참을 설명해주고 있을 때였다.
“어르신!”
담장 너머에서부터 상의를 탈의한 대머리 무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자네는 왕칠이 아닌가.”
백규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경공이 빠른 무사였다. 마천회에 있던 그가 돌아왔다면 그곳의 일이 마무리되었을 터.
게다가 얼굴에 미소까지 가득한 걸 보니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하하! 역시 어르신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조금 전 마천회로 사혈문에서 습격이 왔다고요.”
“결과는?”
“저희 문주님께서 기습조의 대장을 제압한 후에는 별다른 피해 없이 일망타진하였습니다. 전원 포박하였어요!”
“역시 백규 아우로군. 적들을 최대한 죽이지 않고 포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야.”
정파와 비교하면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사파가 아니던가.
호현의 사파가 하나로 통합되면 무림맹의 견제가 거세질 확률이 높았기에, 이후의 상황까지 대비해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옳았다.
“모두 어르신 덕분이죠, 뭐. 곧 저희 문주님이 마천회와 함께 사혈문으로 이동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자네는 지원군을 편성하러 돌아온 것이고.”
왕칠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 어떻게 그걸 다 아십니까? 아무튼, 동천시장에서 모두 합류하기로 했어요.”
패도문의 식객인 유진산도 결과를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네. 나도 함께 갈 테니 입구에서 보지.”
“예,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