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축하드릴 일이로군요 (1)
임맥이 타통되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탁기가 쌓여 굳어진 회음혈이 뚫린 것이다. 이제 전신에서 유일하게 남은 혈도는 정수리 부근의 백회혈로 향하는 독맥뿐.
‘성공이다! 임맥을 타통했으니, 독맥 또한 어렵지 않을 터!’
유진산의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찾아올 몸의 변화가 몹시 기대되었다.
그는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은 내기를 단전으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다시 힘을 비축해 단번에 몰아칠 작정이었다.
임맥의 통로가 열린 이상 독맥을 뚫는 것도 시간문제.
잠시 후 거센 기(氣)의 물결이 백회혈로 이어지는 독맥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쿵-! 쿵-! 쿵-!
점점 얇아지는 독맥. 한두 번만 더 두들기면 뚫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유진산은 돌연 고지를 코앞에 두고 기의 흐름을 멈췄다. 돌연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온몸의 맥박이 불안정해지고, 몸이 마치 화로라도 된 듯 타올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환골탈태 직전에 이런 증상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주화입마에라도 빠질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운기조식을 중단했다.
무공을 익힌 신체라 땀이 안 나는 게 정상이지만, 기이하게도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원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침 환골탈태를 경험해본 인물이 이곳에 있지 않은가. 그가 마천회로 떠나기 전에 한번 만나봐야 했다.
갈 곳을 정한 유진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 *
“하하하! 형님이 환골탈태 직전까지 갔었다고요?”
백규와는 달리 그와 마주 앉은 유진산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리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닐세. 방금 얘기했다시피 몸에 찾아온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겠더군. 그렇다고 그냥 강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슨 일인지 아는 바가 없는가?”
“음. 확실히 내 경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혹시 형님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니오? 내 놀리는 것이 아니라, 형님 나이에 환골탈태에 성공했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었소.”
나이가 많을수록 몸에 탁기가 가득해져 환골탈태가 어렵게 된다. 그렇기에 사십만 넘겨도 힘들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유진산은 각고의 노력 끝에 그것을 가능케 했다. 단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
“만약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우리 손녀는 어찌한단 말인가. 핏줄이라고는 나 말고는 없는 아이일세.”
무턱대고 일을 저지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백규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쌍사신의 중 마양이 근처에 머물고 있소. 가서 물어봅시다.”
쌍사신의(雙死神醫). 유진산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의(死醫) 마소와 신의(神醫) 마양을 일컫는 별호로, 이 두 형제는 특이한 행보 때문에 강호에서 부쩍 유명했다.
맏형인 마소는 독술의 대가이며, 반대로 동생 마양은 죽은 자도 살려낼 정도로 뛰어난 의술 실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마양이 한 명을 살려내면, 맏형인 마소가 그의 지인 중 한 명을 죽이는 괴팍한 행보를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인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행위라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원수도 많았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쌍사신의는 대가 없이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건 다 오래전 얘기요. 몇 년 전 사의(死醫) 마소가 화산파의 도사에게 살해당했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갑시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유진산도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 아우는 인맥도 참 넓군. 고맙네.”
둘은 곧바로 패도문을 벗어나 마을 어딘가로 경공을 펼쳐 나아갔다.
목적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경공으로 일각을 달리자 인적이 드문 곳에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오. 마침 안에 있는 것 같으니 어서 들어가 봅시다.”
백규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백의를 입은 노인이 무엇인가를 조제하고 있었다. 신의(神醫) 마양이리라.
“패도문의 문주께서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이신지요.”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렸소이다. 환골탈태에 관련한 문제인데 잠시 시간 좀 내주소.”
사파 전체를 통틀어도 백규의 위치와 무공은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대하는 마양의 태도가 다소 조심스러워 보였다.
“우선 이쪽으로들 앉으시오.”
“고맙소.”
마양은 한쪽에 자리한 탁상으로 백규와 유진산을 안내했다.
그는 두 개의 찻잔을 채워 그들에게 건네며 물었다.
“문주께서는 이미 환골탈태를 겪지 않았소?”
“내가 아니라 옆에 앉아 계신 우리 형님 때문이오. 환골탈태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몸에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고 하오.”
마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산을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진맥부터 좀 해봅시다.”
“고맙소.”
무림인들이 하는 진맥은 단순히 맥박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직접 상대의 몸속에 진기를 흘려보내면서 기혈의 흐름을 진단한다.
손목을 잡고 진맥을 계속하던 마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환골탈태를 시도한다고 하여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내공 수준이 엄청나시구려.”
“내공 수련만큼은 한시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소. 상황이 좀 절박하기도 하고.”
“그런데 왼팔은 왜 그 모양이 되었소?”
진맥만으로 왼팔의 부상까지 눈치채다니. 그의 능력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젊은 도사에게 당했소. 사정이 좀 있소이다.”
고개를 끄덕인 마양은 그의 손목을 놓고는 팔짱을 꼈다.
“어쨌거나 나는 아무것도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소.”
옆에서 듣고 있던 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맥까지 해놓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문주께서도 아시지 않소. 기혈의 성질을 보니 정파의 심법으로 내공을 쌓았던데, 나는 목이 떨어져도 정파인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오.”
백규가 피식 웃으며 왼팔을 탁상 위에 턱 올려놓았다.
“이보시오, 마 형. 진양현에서 벌어졌던 양화객잔 사건을 기억하시오?”
“어찌 모르겠소. 화산파와 무당파의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기막힌 작전으로 소탕했던 쾌거를. 누가 그런 짓을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내 평생 가장 통쾌한 소식이었소.”
“그럼 그 일을 주도하신 분이 누구인 것 같소?”
“내가 어찌 알겠소. 단지 신선 같은 노인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인데. 근데 그걸 왜 물…….”
마양은 돌연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처의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왔다.
무림맹에서 배포한 현상수배 전단이었다.
전단의 그림과 유진산의 얼굴을 몇 차례나 번갈아 보던 마양.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유진산과 백규는 어안이벙벙해졌다.
“몰라뵈었습니다, 대협.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정파에서 죽일 놈으로 낙인찍힌 제가 대협이라니요? 당치도 않소.”
마양은 유진산의 두 손을 움켜쥐고 울먹이며 말했다.
“제 형님이 화산파의 일대제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양화객잔에서 죽은 도사 중에 그놈도 포함되어 있으니, 대협께서 제 원수를 대신 갚아주신 셈입니다.”
“무당파와 싸우다 지가 알아서 죽은 거지,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손사래를 친 마양은 다시 유진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일단 진맥부터 다시 해봅시다.”
급작스러운 마양의 태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말투까지 바뀌다니.
하지만 거절할 이유 또한 없었다.
두 눈을 감은 그는 반각 동안 진맥을 마친 이후 물었다.
“혹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급격한 체온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맞소이다. 그걸 어찌…….”
“그렇다면 축하드릴 일이로군요.”
“……?”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거늘 도리어 축하받을 일이라니. 도무지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양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백회혈에 탁기가 너무 많이 쌓여, 노화된 신체가 환골탈태의 과정을 버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백규가 마양을 재촉했다.
“그런데 뭐가 축하할 만한 일이란 것이오?”
“이 상태에서 환골탈태를 진행하면 대협의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급격한 변형을 일으킬 것입니다. 즉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얘기입니다.”
“반로환동이라니? 그럼 우리 진산 형님이 다시 젊어진다는 말이오?”
마양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이 든 노인이 무공을 유지한 채 다시 젊음을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유진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반로환동이라……. 그럼 얼마나 젊어지겠소?”
“그것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중년이 될 수도 있고, 어린아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자나 깨나 손녀 걱정뿐인 유진산이 아니었던가. 만에 하나 어린아이가 되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휴.”
“인생에 이보다 더한 축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표정이 어두우십니까?”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우리 손녀 때문이오. 여차해서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이를 어찌 돌볼 수 있겠소?”
유진산이 머뭇거리자 백규가 옆에서 그를 거들었다.
“좀 어려지면 어떻소? 외형적 나이는 금방인데. 설이도 잘 먹으니까 금방 클 거요.”
“그래도 아이를 놔두고 모험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환골탈태를 강행하는 것은 잠시 보류해야겠네.”
잠시 호흡을 고르던 마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늦어도 오 년 안에는 결정하셔야 합니다. 대협의 기혈을 진맥해보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직 내공의 힘으로 버티는 것일 뿐, 환골탈태를 진행하지 않으면 오 년 이내에 노화로 급사할 것입니다.”
한숨을 내쉰 유진산은 창문 밖에 비추어진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오 년이라……. 우리 설이가 아홉이 되기 전에는 진행해야 한다는 말이로구나.’
무림인의 기준에서 오 년은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었다. 무공 몇 개를 수련하다 보면 훌쩍 지나있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우선은 손녀가 조금이라도 더 클 때까지는 버텨볼 작정이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소. 나중에 꼭 보답하리다.”
유진산이 떠나려 하자 마양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당장 환골탈태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 왼팔의 부상이라도 치료해주겠습니다.”
“쌍사신의는 대가 없이 남을 치료해주지 않는다고 들었소만…….”
“원수를 갚아주신 분께 대가를 바라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어서 팔을 주시지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무당파의 일대제자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창을 휘두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왼팔을 슬쩍 내밀었다.
“힘줄이 손상되어 쉽지 않을 것이오.”
마양은 피식 웃으며 의료상자를 펼쳤다.
수십여 개의 침과 수술 도구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정도의 치료도 불가능하다면 어찌 제가 신의라 불릴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감이 가득한 마양의 표정에 유진산도 안심이 되었다.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상황이 좋게 풀리자 백규가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하! 형님, 부상을 치료할 수 있다니, 거 참 기쁜 소식이오. 그럼 치료 잘 받고 오시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나는 애들 데리고 먼저 마천회로 출발하겠소.”
“알겠네. 가는 길에 우리 설이한테 할배 곧 간다고 좀 전해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