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의식을 치르겠는가 죽겠는가 (2)
패도문 논현각(論現閣).
대소사를 논하는 이 전각으로 문파의 간부급 인사들이 모여 앉았다.
한쪽에는 깍지를 낀 채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규와 유진산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장내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수의 물결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요함.
침묵 속에 긴장이 절정으로 치닫는 그때, 누군가가 찾아들며 소식을 알렸다.
“문주님, 광호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백규의 외침이 토해졌다.
“들어오너라!”
절제된 동작으로 들어온 광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올 한마디에 모두의 운명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광호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마천회가 삭발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패도문의 간부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하하!”
“역시 어르신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들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고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반신반의한 상태에서 마천회가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공식적으로 마천회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니, 호현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유진산만이 묵묵히 찻잔을 움켜쥐고 있었다.
백규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형님은 표정이 왜 그러오? 기쁘지 않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네.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겠지.”
“어찌 될 것 같소?”
유진산은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마천회의 무사들도 자네들처럼 모두 대머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지겠지. 지금쯤 사혈문의 귀에도 들어갔겠군. 만약 아우가 사혈문의 문주라면 어찌하겠나.”
“겁도 없이 반대편에 선 그놈들을 먼저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소. 괘씸하기도 하고, 만만하니까.”
“맞는 말이네. 계산이 빠른 마천회의 회주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도 그가 결단을 내린 이유는 자네의 장인인 절대고수를 믿고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백규는 말끝을 흐렸다. 삭발식을 마친 마천회에게 속여서 미안하다고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산이라고 그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내 입으로 절대고수라 말한 적이 없네. 자네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본인들이 스스로 오해했을 뿐이니, 엄밀히 말해서 사기를 친 것은 아닐세. ”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소? 지금 너희들이 믿고 있는 패도문의 절대고수는 사실 세 살짜리 아기였다. 이렇게 말하면 마천회에서 뭐라고 할 것 같소?”
묵묵히 듣고 있던 패도문의 간부들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을 알게 된 마천회의 회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당분간은 함구하는 것으로 하세. 굳이 사실을 얘기하여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겠지. 어쨌거나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천회의 방어 문제일세.”
“하지만 없는 절대고수를 만들어서 보내줄 수는 없지 않소?”
백규의 왼쪽에 있던 장로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쓸 만한 애들을 차출하여 마천회에 지원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맞겠지. 하지만 고작 몇 명의 지원으로 놈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손쉽게 격퇴하려면 문주님을 포함하여 삼 할은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원이 많이 빠지면 놈들도 우리가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눈치채겠지. 그럼 칼날은 다시 이곳으로 향할 테고.”
생각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장내가 정적에 잠기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진산에게로 모였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나직이 말했다.
“우선 당분간만이라도 패도문과 마천회의 복장을 통일시켜야 하네. 그래야 적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네. 삭발식도 거행한 그들이라면, 그 정도는 거부하지 않을 걸세.”
“그것은 바로 시행이 가능한 부분이오. 지금부터 양측 모두 상의를 벗고 다니면 되니까.”
역시나 품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사파인들이었다.
시원시원한 그들의 모습에 유진산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되면 적들은 우리 무사들이 패도문인지 마천회의 소속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네. 그런 상태에서 양측 문파가 인원을 교환하여 배치하는 것이지.”
“인원을 교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유진산은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어 엽전을 모두 탁상 위에 털어놓았다.
이어서 십수 개를 반으로 나누고는 하나씩 하나씩 위치를 교환하며 말했다.
“겉보기엔 모두 똑같지만, 이 중에는 삼류에서 일류까지 뒤섞여 있네. 나는 지금 이류와 삼류를 좌측으로 이동시켰고, 일류는 모두 우측으로 배치했지. 비록 좌측의 숫자가 더 많지만, 실상은 허전해 보이는 우측이 몇 배는 강한 전력이네.”
백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손뼉을 부딪쳤다.
“이해했소. 마천회의 하급 무사들을 은밀히 이곳으로 보내 위장시키고, 내가 정예들을 이끌고 마천회로 가서 머릿수를 조금 채워야겠구려.”
“그리하시게.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적들을 격퇴한 후 역습을 가해 승부수를 띄워야겠지. 이후에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일을 마쳐야 하네.”
“잘 알고 있소. 전세가 우리에게 기울면 사혈문의 문주가 내 도전을 거절할 수가 없을 거요.”
내용이 마무리되자 유진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계획대로만 되면 좋겠군. 나는 손녀를 보러 가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네. 천천히 얘기들 나누시게.”
그 순간 백규와 패도문의 간부들이 동시에 일어서서 포권을 건넸다.
고작 식객에게 이런 최고의 예우를 건네다니. 결코, 정파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인생의 경험은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소. 세상에서 형님의 간계를 따라갈 자가 누가 있겠소?”
“예전에도 그런 소리를 하다 혼난 녀석이 있었지. 간계라고 하면 내가 꼭 악당 같지 않은가? 그냥 어른의 지혜라고 해두시게.”
유진산의 너스레에 모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형님답소.”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그는 어깨 위로 한 손을 올려 보이고는 전각 밖으로 빠져 나왔다.
장원의 중심부를 향해 이어지는 가벼운 발걸음.
이윽고 도착한 곳에는 잘 가꾸어진 꽃밭에 큼지막한 전각 한 채가 있었다. 문파의 식솔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안에서는 연신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부인들의 틈새에 껴서 유과를 먹고 있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하배!”
그는 상체를 낮춰 후다닥 달려오는 손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조금 더 묵직해진 아이의 무게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허허헛. 잘 놀고 있었느냐?”
“맘마 먹어쩌. 히히.”
배가 사과처럼 불룩한 것을 보니 이것저것을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었다.
얼굴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채 배시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지로 입가를 닦아주고 있을 때 부인들이 다가와 재잘거렸다.
“부러워요, 할아버지! 아이가 귀엽고, 너무 총명해요!”
“말을 다 알아듣던 대요? 에휴. 우리 딸내미도 반만 따라갔으면.”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손녀를 다 얻으셨대요?”
“누구를 닮은 거예요?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천하제일미는 떼놓은 당상이겠어요!”
열댓 명에 이르는 중년의 부인들에게 둘러싸인 유진산이었다.
끊임없는 질문 공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진 그는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맙네. 혹여 우리 아이가 사고를 치진 않았는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예쁜 아이가 무슨 사고를 쳐요?”
“벌써 데려가시려는 거예요?”
유진산은 아이를 안고 토닥이며 잠시 고민했다.
육아에 능숙한 부인들에게 이렇게라도 가끔 맡겨두는 것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도 도움이 될 듯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혼자 있을 시간이 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핏줄이라고는 할아버지밖에 없는 가여운 아이일세. 우리 손녀가 모처럼 이렇게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구만. 결례가 안 된다면 해 질 때까지 이곳에서 좀 더 놀게 해줄 수 있겠나.”
다행히도 부인들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하루에 열두 시진도 돌봐줄 수도 있으니까.”
“호호.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우리가 더 즐겁다고요.”
문파의 살림을 도맡은 야무진 여인들이었다.
맹련화의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그녀들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아이의 존재로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얘기를 마친 유진산은 아이를 안아 들고 눈을 마주쳤다.
“할아버지가 조금 이따가 데리러 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더 놀고 있거라. 잘 있을 수 있지?”
“하배 가지 마~. 힝.”
울먹이며 양팔을 흔드는 손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지금은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간식 가지러 가는 게다.”
간식이라는 말에 반신반의한 아이는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설이 간식?”
“그럼~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만 놀고 있어.”
“응……. 빨리 와.”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고도 간식에 혹하다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뭇한 미소로 아이를 한 번 안아준 유진산은 부인들에게 다시 넘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장원 외곽에 있는 거처였다.
‘이제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사치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공심법을 통한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쌓기 위함이었다.
패도문의 식객이 된 이후로는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몇 배나 빨라졌다. 이곳의 도움으로 육아를 제외한 시간을 오로지 내공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내공 수련에만 박차를 가해왔다.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곳곳의 위험들. 그런데도 몸은 점점 늙어가고, 왼팔은 창을 휘두를 수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손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잠시도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환골탈태만이 유일한 길이겠지.’
환골탈태(換骨奪胎). 뼈와 살이 재구성되어 온몸이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화된 상태가 되는 현상이다.
거사를 마치면 신체의 나이가 조금 젊어지고, 왼팔의 부상이 즉시 회복될 터. 이후에는 살풍창의 연마도 가능하기에 더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구나.’
다른 건 몰라도 내공만큼은 절대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련해왔다. 이제 그것을 시험해볼 때가 다가온 것이다.
단전에서부터 출발한 중후한 기(氣)가 전신의 혈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망망대해의 바다처럼 고요한 내공의 물결은 마치 때를 기다리듯 숨을 죽인 채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무술에 사용되는 삼십육 개의 혈도. 유진산은 이 중 임맥과 독맥을 제외한 모든 혈도가 타통된 상태였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 불리는 이 두 개의 혈도만 뚫는다면 환골탈태가 시작될 터.
어느 순간 삼 갑자에 달하는 그의 내공이 한곳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진산아.’
잠시 후 용암이 폭발하듯 그의 진기가 관문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쿵-! 쿵-! 쿵-!
용솟음치는 진기가 임맥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송곳처럼 변한 진기의 물결이 한 번씩 혈도에 부딪힐 때마다 점차 힘을 잃어갔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여섯 번째의 시도를 거듭할 때였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