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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40화 (40/238)

40화 패도문은 오직 직진뿐이오 (2)

실제로 보는 백규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지살대의 대원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양손에 움켜쥔 쌍도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촤아악-! 푸욱-! 써컹-!

“크아악!”

“크헉!”

백규가 지나는 자리로 적의를 입은 무사들의 시신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과연 일개 문파의 문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뒤이어 그의 부하들이 당도하자 지살대로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모두 퇴각한다!”

지살대주인 용천일의 외침이었다. 그는 백규를 피해 도망치며 퇴로를 찾기에 바빴다.

힘겹게 버티던 부하들도 뿔뿔이 흩어지며 도주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의를 탈의한 채 쌍도를 휘두르는 패도문의 무사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들의 섬뜩한 모습은 흡사 저승에서 내려온 나찰들 같았다.

‘더는 볼 필요도 없겠군.’

유진산은 손녀를 가슴에 안은 채로 등을 돌렸다.

비록 아이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굳이 살육의 현장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물러서는 그때 등 뒤에서 죽어가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뒤를 돌아보자 안색이 창백한 맹련화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유진산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서 상처부터 돌보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등을 돌려 나아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장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아늑한 거처였다.

“우선 좀 쉬자꾸나.”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주저없이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아무리 많은 내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어느새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혼자서 마당을 뛰어노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히이~”

지치지도 않는 아이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거기서만 놀아라.”

육아에 한 눈을 팔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나고 나서서야 손녀가 다시 아장아장 걸어들어왔다.

살며시 다가온 아이는 옆에서 팔을 베고 누웠다. 이제야 만족스럽게 논 모양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같이 운기조식이나 하자꾸나.”

이미 아이의 눈은 반쯤 감겨 흐리멍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유진산도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잠이 많지 않은 그였지만, 오늘따라 금세 곯아떨어져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없이 꿈을 꾸고 있을 때였다.

“형님, 계시오?”

백규의 목소리였다.

그가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유설이 먼저 벌떡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일어선 아이는 방문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백규의 손에 들려있던 탕후루 때문이었다.

유설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빛을 빛냈다.

“설이 꺼?”

“그럼! 우리 예쁜 아가 주려고 아저씨가 간식 가져왔지!”

탕후루를 건네준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빙글빙글 돌렸다.

“히이. 재미떠.”

사태의 수습과 함께 상황 파악을 끝내고 온 백규였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눈앞의 아이가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유진산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바쁠 텐데, 굳이 예까진 뭐하러 왔는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백규는 그를 향해 양손을 모아 깊게 포권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소.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려.”

유진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저 밥값을 한 것뿐이니, 신경 쓸 것 없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 거요? 이 백규, 다른 건 몰라도 은혜는 잊지 않는 사람이오.”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일까?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끌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 좀 하지.”

방의 구석에는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탁상이 있었다.

탕후루에 정신이 팔린 아이를 뒤로한 채 둘은 그곳에 마주 앉았다.

“부인의 부상이 심하던데, 어찌 되었는가?”

“위기는 넘겼으니 걱정 안 해도 되오. 워낙에 용골을 타고난 통뼈라, 잘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말하는 백규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복수를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유진산은 껄껄 웃으며 탁상 위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허허. 어쨌거나 위기를 넘겼다니 다행일세. 그나저나 오늘 찾아온 녀석들은 누구인가? 사혈문의 무력단체 같던데.”

“맞소. 사혈문에는 네 개의 무력단체가 있고, 그중 하나인 지살대였소. 이번에 본때를 보여주었으니, 다신 얼씬도 못 할 거요.”

“그래도 방심하지 마시게. 노부가 걸어온 강호의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위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네.”

백규는 움켜쥔 찻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코웃음을 쳤다.

“상관없소. 나도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으니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혈문으로 쳐들어가, 문주 녀석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이오.”

“자네의 무공이 고강한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무턱대고 공격을 가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닌 것 같군.”

백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먼저 칼을 뽑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세. 당연히 작전이 실패할 경우까지 생각해 놓았을 테지.”

잠시 고민하던 백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형님 말씀처럼 함정을 파놓고 있을 수도 있겠구려.”

“내 짐작대로라면 확실할 것이네. 뭐 그 이상으로 준비한 게 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기습을 받고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소. 얕보이는 순간 잡아먹히는 것이 이곳의 섭리라오.”

“단지 무턱대고 쳐들어가지 말라는 얘기일세. 어떤 싸움이 벌어지든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백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 밖 어딘가를 응시했다. 사혈문이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방향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 백규는 지금껏 앞만 보고 돌격해왔고, 잔꾀 같은 건 부려본 일이 없소.”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에 이렇게나 무식한 문파가 있었을 줄이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또한 식객으로서 패도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이들이 무너진다는 것은 힘들게 얻은 안식처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간 정이 들었는지, 그냥 당하도록 좌시하고 싶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유진산은 다시 설득을 이어나갔다.

“패도문과 사혈문의 힘을 비교해보자면 어떤가?”

“예전엔 큰 차이가 없었소. 하지만 사혈문이 흑룡단을 흡수한 뒤로는 인원 차이가 두세 배쯤 될 거요.”

귀를 열고 차를 들이켜던 유진산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의 말은, 인원이 몇 배나 되는 문파를 정면으로 공격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

“싸움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니니 걱정할 것 없소. 그대로 돌진해서 문주의 수급만 따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이오.”

유진산이 탁상을 내리쳤다.

“에끼, 이 사람아!”

“아니 형님, 왜 성을 내시고 그러시오?”

백규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찌 그리 사람이 무모한가. 최소한 정찰이라도 하고, 승산이 있는지는 먼저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패도문에게 정찰 따위는 없소. 우린 상대를 죽여야 하면, 그냥 가서 죽입니다.”

이대로 계속 대화를 하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유진산은 숨이 막힌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물었다.

“이유라도 알아야겠네. 패도문이 그렇게 저돌적인 이유가 도대체 뭔지 말해주시게.”

백규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울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문도들이 전부 대머리인데, 어찌 정체를 숨기고 정찰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잊고 있었다. 백규의 아내를 제외하면 무공을 익힌 모두가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을.

패도문이 무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오로지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그들의 사연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정체를 숨길 수가 없으니 정찰도 불가능할 수밖에.

사혈문의 근처에만 접근해도 즉시 발각될 공산이 높았다.

“…….”

유진산은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제 궁금증이 좀 풀리셨소?”

헛기침을 몇 번 한 유진산은 찻잔을 비우고 물었다.

“내 그것도 모르고 자네를 오해했군. 그래도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좋은 방법이 있으면 형님께서 조언 좀 해주소.”

이미 유진산은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이곳 호현에 또 하나의 세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마천회가 있소. 생각보다 약골들이라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우리랑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소.”

“좋든 싫든 그들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해야 하네. 아군이 되지 못하면 적군도 되지 못하도록 말일세.”

“하긴, 마천회까지 사혈문에 붙는다면 끔찍하겠구려.”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제안을 건넸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닐세. 나는 사혈문을 정찰하고 올 테니, 자네는 마천회로 가서 그들을 설득을 해보시게. 탐탁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네.”

백규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들과 만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진산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는 상황이었기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만나보겠소.”

* * *

날이 어두워진 후 유진산은 손녀를 업고 호현의 북쪽으로 향했다.

거리마다 삼삼오오 모인 무사들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패도문을 경계하기 위함이리라.

다행인지 그들 중 유진산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 설이 간식으로 뭘 사주면 좋을까나.”

“히히.”

간식이란 단어만 들어도 웃음이 자동으로 나오는 손녀였다.

노점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었지만, 아직도 거리에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유진산의 발걸음은 어느 과일가게 앞에 멈춰섰다.

“어서 오십시오! 곶감이 아주 맛있어요!”

“우리 손녀에게 먹일 거니 한 개만 주시오.”

유진산이 엽전 한 냥을 내밀었지만, 가게 주인은 받지 않고 망설였다.

“저……. 아이가 두 개를 달라는데요?”

고개를 돌려본 그는 황당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유설이 상인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두 개를 주시오.”

곶감을 양손에 받아든 유설은 오물거리며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혼자 까르륵거리는 걸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골목길을 돌아 걷고 있는 유진산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혈문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웅장한 장원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

“곶감 맛있느냐.”

“응!”

“간식을 사줬으니, 우리 설이도 할아버지를 도와줘야겠구나.”

“알아떠.”

유진산의 발걸음은 사혈문의 장원을 십여 장 남겨두고 멈추었다.

굳이 정찰을 위해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절대고수의 기감(氣感)을 가진 초인이 등 뒤에 업혀 있지 않은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그는 장원이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등 뒤로 물었다.

“저기 안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

“엄청 많이 이쩌.”

당연히 많을 수밖에. 아직은 숫자의 개념이 부족했기에, 구체적인 인원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듯 보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유진산이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으니. 문제는 이곳에 어떠한 고수가 있는가였다.

“백규 아저씨만큼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어?”

“백구? 백구우~?”

백규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낭패였다.

그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그에게 불현듯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부들머리 아저씨 말이다.”

그 순간 유설이 검지를 내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장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 웅장한 높이로 우뚝 솟은 한 채의 전각이었다.

“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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