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리집에는 호랑이도 있소 (2)
식객으로 생활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간 패도문에서는 어떠한 요구나 감시도 없었으며, 문파의 출입 또한 자유로웠다.
가식이 없고 한결같은 이곳의 모습은 점차 유진산의 마음을 열게 했다.
눈앞에선 손녀가 쉴 새 없이 양손으로 막대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얍얍!”
왼손을 뒷짐 쥔 유진산도 오른손의 막대기로 연신 합을 교환했다.
기다란 두 개의 막대기가 뒤섞이며 경쾌한 소리를 끊임없이 뿜어냈다.
파팍-! 파파팍-!
“천천히. 조금 더 힘을 빼고.”
원래의 훈련 방식이라면 더 빠르고, 강하게 휘두르고 외쳐야 했다. 그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유설이 힘과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팍-! 파파팍-!
“좀 더 천천히.”
합을 나눌 때마다 손목이 찌릿했다. 손녀가 막대기에 내기를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빠각-!
나무가 두 동강이 난 소리였다.
유진산은 부러진 자신의 막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갈 길이 멀었구나. 어서 속도와 힘을 조절하는 법부터 터득해야 할 터인데.’
할아버지가 고민에 빠진 것도 모르고 유설은 까르륵거리며 좋아했다.
“자해떠?”
“요 녀석. 할아버지 막대기를 이렇게 망가트리면 좋더냐.”
“히히힛.”
유설은 신나는지 양팔을 벌리고 마당을 뛰어다녔다.
잠시 아이의 눈치를 살펴보던 유진산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살풍창의 비급을 꺼내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가문의 무공을 아이에게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리 와보거라. 이제부터 우리 가문의 창술을 익혀보자꾸나.”
“시더~”
손녀는 어느새 마당 구석에 있는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걸 익혀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다. 어서 내려오너라.”
“설이는 안 할 거야.”
역시나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무공들의 수련은 놀이처럼 좋아하면서 정작 살풍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재미없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니 단단히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본인에게 의지가 없는 이상 살풍창을 전수할 길이 없었다.
‘이거 큰일이로구나. 설이가 살풍창에 흥미를 느끼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할 터인데.’
창귀로 이름을 날렸던 조상의 절기로 가문의 제일 무공이었다.
이 비급을 배울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 무림인들이 줄을 설 터였다.
하필이면 이 절세무공의 수련만을 거부하다니. 유진산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배, 이거 먹어.”
나무에 매달린 유설이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앙증맞은 손아귀에는 먹다 남긴 복숭아가 들려있었다.
“이 나무는 우리 것이 아니니, 함부로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단다.”
“시더! 마이딴 말이야.”
“그럼 도둑이 되는 게다. 도둑이 되면…….”
유진산은 말끝을 흐렸다. 담장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운마저 느껴지는 기(氣)의 흐름이라니.
다가가 담장 밖을 살펴보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패도문의 문주인 백규였다.
허리춤에는 두 자루의 도(刀)가 매달려 있었으며, 반짝 빛나는 대머리는 붉은 두건으로 동여맨 상태였다. 게다가 상의까지 탈의하고 있다니.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의 뒤로 수십여 명의 문도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모두가 같은 복장이었다.
“어디 전쟁터라도 나가시는가?”
지나가던 무사들의 발걸음이 동시에 정지했다.
선두에 자리한 백규가 담장 너머를 바라보며 한 손을 올려 보였다.
“별거 아니오, 형님. 사혈문 새끼들이 동천에서 우리 애들을 습격했다길래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소. 지금 가서 다 죽여버릴 참이오.”
동천은 패도문의 관할구역에 있는 시장의 이름이었다. 최근 호현의 영역싸움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어느새 깊숙이 파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별거 아닌 놈들만 온 모양이니, 신경 쓰실 것 없소. 그리고 말이오, 형님.”
백규는 말을 하다 말고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탄 아이를 쓱 바라보았다.
“……?”
“거, 우리가 남이오? 복숭아든 뭐든 우리 애기가 먹고 싶다면 마음껏 따먹게 하소. 잘 먹어야 빨리 크지 않겠소?”
조금 전 손녀에게 하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과연 초절정고수답게 그의 청각은 명불허전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럼 조심히 잘 다녀오시게.”
“걱정할 것 없수다. 오는 길에 죽엽청이나 한 동이 사다 드리겠소.”
“아닐세. 술은 됐고, 탕후루나 하나 사다주면 좋겠군.”
백규는 유진산과 손녀를 번갈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나중에 설이 시집가면 혼자서 어찌 살려고 하오? 그럼 저녁에 보기요!”
“그리하세.”
유진산은 뒷짐을 쥔 채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지간한 세력은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자네 말대로 우리 설이 시집가는 것까지만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을 걸세.’
등을 돌린 유진산은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앉아서 호흡을 고르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뒤따라 들어왔다.
“무공을 연마한 후 운기조식을 하면 피로가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지.”
그가 가부좌를 틀자 아이도 마주 앉아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언제나 무공 수련이 끝나면 둘이 함께 운기조식을 한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내공 수련을 하는 손녀가 이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운기조식 중에 잡담은 금물. 유진산은 두 눈을 감은 채 진기의 일주천(一周天)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깊은 정적 속에서 둘은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갔다.
모든 것을 잊고, 시간의 흐름에 모든 자신을 맡기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
그렇게 정적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돌연 손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야해…….”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운기조식 중에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혈도의 흐름이 자유로운 절대자급의 고수들이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꾸를 할 수 없었던 유진산이 그냥 넘겨 버리자, 다시 한번 아이가 중얼거렸다.
“호랭이가 아야하고 이떠.”
난데없이 호랑이라니. 실제로 호랑이를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유진산은 어떤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 앞에서 백규가 자신의 아내를 호랑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설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유설은 백 장 밖을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까지 감지한다.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소릴 할 이유가 없었다.
유진산은 서둘러 운기조식을 마무리하고 벌떡 일어섰다.
“호랑이 아줌마가 아프다고?”
“응!”
분명 패도문의 장원에서 무엇인가 사달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화룡신창부터 챙겨 들었다.
“할아버지가 한번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벌컥-!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홀로 남겨진 유설은 가만히 앉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벌컥-!
또다시 문이 열리며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왼손에는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혼자 가려던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만약 이곳에 위험이 있다면, 손녀를 혼자 남겨두는 게 더 나쁜 선택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서 업히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설이 후다닥 달렸다.
앙증맞은 발이 지면을 박차고, 할아버지의 등에 안기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한가롭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유진산은 달리면서 보자기로 아이를 묶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낚싯대처럼 내려앉은 긴 막대기를 보았다.
“그건 왜 가져왔어?”
“설이 장난감 가져와떠.”
더는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패도문의 훈련장이었다. 그곳과 가까워질수록 소란스러움이 거세졌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끊이지 않는 비명. 습격이 분명했다.
‘성동격서란 말인가?’
백규와 정예무사들이 자리를 비운 이때 때맞춰 공격이 들어오다니. 동천시장에서 벌인 사혈문의 도발은 미끼였을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왜? 무서워? 어서 와보라니까!”
언월도를 움켜쥔 백규의 부인이 전각을 등진 채 악을 쓰고 있었다.
복부에 검 한 자루가 틀어박혀 있었음에도, 부상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조하듯 좌우로 늘어선 십수 명의 대머리 무사들. 양손에 쌍도(雙刀)를 움켜쥔 얼굴에는 하나같이 비장함이 넘쳤다.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오십여 명으로 하나같이 적의(赤衣)를 입고 있었다.
“순순히 항복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너희들에게 굴복하느니 내 목을 스스로 끊겠다.”
적의를 입은 무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백규의 아내를 설득하고 나섰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꼭 이렇게까지 버틸 필요는 없지 않소? 사도련의 뜻에 따라 호현의 사파는 하나가 되어야 하오.”
“그럼 너희들이 우리 패도문에 무릎을 꿇으면 되겠구나.”
“그깟 자존심 때문에 기어코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오?”
백규의 아내는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자신들을 인질로 삼아 백규를 굴복시키고, 패도문을 흡수할 요량인 것을.
악귀 같은 표정을 한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아가리 닥쳐. 언월도로 입을 찢어놓기 전에.”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혀를 내둘렀다.
‘그것참 대단한 여장부로구만.’
무공이 고강한 백규가 아내에게 꼼짝 못 하던 이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냈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합류한다고 해서 뒤집을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사들 하나하나가 최소한 이류를 넘는 수준이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자는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절정고수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의리 없이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이것 참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백규가 다시 정예들을 이끌고 돌아온다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때맞춰 올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소강상태도 잠시일 뿐. 사혈문이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면 지금 패도문의 전력으로는 잠시도 버티지 못할 듯했다.
아무리 고심을 해봐도 방법은 하나뿐이 없었다.
유진산은 호흡을 고른 후 등 뒤로 나직이 물었다.
“아가. 할아버지가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때찌!”
“그래, 아주 잘 맞췄다. 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놀이 하나 할까?”
“응! 어떤 거?”
그는 창끝으로 적의 무사들을 겨누며 속삭였다.
“저기 붉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 보이지? 지금부터 할아버지가 달리면, 우리 설이가 막대기로 머리를 때려주는 거다.”
“아찌들이 나쁜 짓 해떠?”
“응, 아주 많이 했단다. 그래서 우리가 혼쭐을 내줘야겠구나.”
유설은 손에 쥔 막대기를 빙빙 돌리며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때찌해?”
평상시 사람에게는 절대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받았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할아버지가 허락할 때는 괜찮단다. 그럼 지금부터 신나게 한번 놀아보자꾸나.”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