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래, 끝장을 보자 (2)
진양현의 중심부에 자리한 양화객잔.
그곳에서부터 삼십여 장이 떨어진 나무 그늘에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예상하셨던 거예요?”
객잔에서 몰래 빠져나온 현희였다.
그녀의 옆에는 잠든 손녀를 업고 있는 유진산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음. 이 마을은 당초육(糖醋肉)이란 요리가 유명하지. 맛이 괜찮다던데, 먹어 보았는가?”
난데없이 웬 요리 타령이란 말인가? 현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튀긴 고기에 설탕과 꿀을 바른 요리잖아요.”
“맞네. 조리 과정을 보면 기름에 튀기기 전에 고기에도 기름을 듬뿍 바르지. 그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현희는 무엇인가를 기억해냈다.
“기름과 기름이 만나면 화력이 더욱 거세진다고 들었어요.”
“바로 그것이네. 무당파와 화산파 양쪽 모두에게 기름을 듬뿍 발라 불을 지폈으니, 어떻게 정상적인 대화가 되겠는가.”
지금의 상황이 재밌다는 듯 현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이런 기막힌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뭐 그리 생각해준다면 고맙고. 하지만 나도 이렇게 잘 타오를 줄은 몰랐네.”
지켜보고 있는 객잔의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성을 잃은 화산파의 제자들과 천룡상회의 무사들.
객잔을 완전히 포위한 그들의 수는 무려 이백여 명에 가까웠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청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저들이 공격을 개시할까요? 아무리 그래도 같은 무림맹인데…….”
“누군가에겐 자존심이 목숨보다도 소중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조금 전 따귀를 맞았던 녀석의 눈빛에서 무서운 살기(殺氣)를 보았네.”
어떠한 성인군자라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유진산은 대사형의 참을성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고 확신했다.
현희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 이길까요?”
“숫자는 저 녀석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무당파도 만만치는 않겠군. 일류고수의 숫자가 우세하고, 원로고수까지 함께 있으니.”
“직접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워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했다.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이동해야 하는 게 아쉽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전투가 시작되면 바로 이동해야 하니 준비하게.”
“네, 할아버지.”
현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잔의 정문 앞에서 누군가가 검을 치켜세웠다.
“화산파를 공격하고 능멸한 자들이 이 안에 있다! 지금부터 적들을 처단하고, 죗값을 받아낼 것이다!!”
화산파의 대사형인 청수가 앞장서서 객잔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뒤를 따라 여섯 명의 매화검수가 대열을 맞추었으며, 나머지 이대제자들과 천룡상회의 무사들이 차례로 진격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이백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파도가 출렁이며 밀물이 들이닥치는 듯했다.
이들은 앞문과 뒷문은 물론 객잔의 창문으로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객잔 안에서 거센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듯,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우리도 출발하지.”
한가하게 구경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자 유진산과 현희는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경공을 펼쳐 마을 외곽으로 달리던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멈춰섰다.
기척을 죽인 채 웅크려 있는 괴한들. 팔십여 명에 이르는 그들은 흑산도의 산적들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채주 풍호가 다가와 유진산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한 게 뭐가 있겠나. 여하간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세.”
“예.”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미리 준비해온 복면을 착용한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간 곳에는 천룡상회의 장원이 있었다.
이천 평에 이르는 부지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재력을 가진 가문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웅장했다.
평소 물샐틈없는 감시가 펼쳐져 있던 이곳이 지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대다수의 무사들이 화산파를 지원하기 위해 양화객잔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리라.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유진산이 대열을 갖추는 흑산도를 향해 우려 섞인 목소리로 조언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각이다. 금고를 찾지 못하더라도, 일각이 지나면 반드시 철수하거라.”
일각. 천룡상회의 본거지가 공격당했다는 정보가 양화객잔까지 도달할 예상시간이었다.
이곳이 털렸다는 소식이 퍼져나간다면, 무당파와 화산파도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눈치챌 터.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때 풍호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예, 어르신. 빈집이니 오래 걸릴 것도 없습니다. 금방 쓸어 담고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하시게.”
등을 돌린 풍호가 부하들을 향해 검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공격하지 말고 무시하라! 일각 안에 마무리하고 집결장소에서 모인다! 자, 가자!!”
목적은 양민들로부터 부당하게 취득한 천룡상회의 자금이었다. 불필요한 살생과 전투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풍호와 현희가 동시에 질주하며 지면을 박찼다. 그들의 신형이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나머지 산적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타앗-! 탓-! 탓-!
유진산은 잠든 손녀를 업은 채 그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들 움직임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현희의 도움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산적들이 절망 속에 무당파의 무공을 배웠으니, 폭풍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장원 안에서 호각이 울리고 소란스러움이 거세졌다. 계산된 일이었기에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거세지는 소란은 멈출 줄을 몰랐다. 더군다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아직도 무사들이 남아있었던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유진산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로 잠에서 깬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아야해.”
유진산은 보자기를 풀러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춰 물었다.
“잘 잤느냐, 아가. 언니가 아야하다니?”
아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유설이 검지로 담벼락을 가리키며 다시 옹알거렸다.
“언니가 아야해~. 누가 때찌해떠?”
그 순간 장원 안쪽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크아아악!!”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악!”
“커헉!!”
연달아 들려오는 비명들. 아무래도 강적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주어진 시간을 넘길 게 불 보듯 뻔한 일.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아이를 등에 묶을 시간이 부족했기에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가,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릴 수 있지?”
“알아떠.”
큰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응!”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담장 아래에 기대어 놓았다.
순식간에 달려가서 해치우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반토막난 화룡신창을 뽑아 들고는 지체없이 담장 너머로 몸을 날렸다.
타앗-!
장원의 내부로 들어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고작 한 명의 무사에게 흑산도 전체가 쩔쩔매고 있었다.
“이 쥐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천룡상회의 다른 무사들과는 달리 붉은 적의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쓰러져 뒹구는 산적이 이미 열 명을 넘었다. 나머지는 그를 포위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유진산의 시선을 이끌었다.
전각의 벽면에 등을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현희. 그녀는 검상을 입었는지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 나뒹구는 금고 상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진산을 발견한 풍호가 지친 몰골로 다가와 말했다.
“어르신, 저자가 천룡상회의 총관인 양충입니다.”
절정의 무위를 가진 자로 천룡상회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객잔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철수해!”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산적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금고 상자들을 움켜쥐었다.
검을 움켜쥔 총관 양충이 그들을 막아서려 했지만, 지켜만 보고 있을 유진산이 아니었다.
“어딜!”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유진산이 그의 측면에서 화룡신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창끝에 서린 붉은 기(氣)의 소용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까? 양충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검에서도 유백색의 아지랑이가 꿈틀대며 유진산의 창기와 일합을 교환했다.
쩌엉-!!
둔탁한 폭음과 함께 양충이 세 걸음을 뒷걸음질 쳤다.
반면 유진산은 한 보를 물러섰을 뿐이었다. 내공에서는 완전히 우세를 점한 것이다.
이 기세를 놓칠 수 없었다. 유진산은 그가 자세를 바로 하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상대를 압박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의 기류와도 같아보였다.
캉-! 카카카캉-!!
“큭!”
상대의 자세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쓰러질듯 말듯 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기에, 도무지 결정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마음이 답답해졌다.
왼팔의 부상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 손으로는 창술을 연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위력 또한 반감될 수밖에.
그 순간 양충이 보법을 밟자 그의 신형이 반월을 그리며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스르륵-!!!
겨우 위기에서 빠져나온 그는 자세를 바로 잡고는 다시 유진산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둘의 신형이 본격적으로 맞물리며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카캉-! 카카카캉-!!
그들이 싸우는 사이 산적들도 하나둘씩 퇴각하며 자취를 감춰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진산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졌다.
자신의 왼팔을 다치게 했던 무당파의 정현에 비한다면 한 수 아래인 적이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콰아앙-!!
거센 굉음과 함께 맞붙어 싸우던 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유진산은 육 장 거리에서 호흡을 고르며 창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후.”
쉽게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방법을 생각해내고 있을 때, 양충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왼팔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로군.”
이미 적은 약점까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네 녀석 따위,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과연 그럴까?”
그의 얼굴엔 확실한 자신감이 묻어나와 있었다.
선택이 없던 유진산은 승부수를 띄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번엔 오른팔이라도 내줘야 할 판국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가 필살의 절초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양충의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
“……?”
“전투 중에 어딜 한눈을 파는 거지? 경험 많은 노장인 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보았군.”
“설, 설아……?”
양충의 본능이 무엇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뒤를 슬쩍 돌아본 그는 입을 떡하고 벌리고야 말았다.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아장아장하는 몸짓으로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배!!”
할아버지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는 유설.
그리고 둘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양충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아이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근데 저 쪼그만 게 어떻게 이렇게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