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밥값은 해주셔야지 (1)
“갚을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시장 한복판. 한 여인이 두 명의 무사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상인과 주민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무공을 익힌 천룡상회의 무사들은 모두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노인이 그들 앞을 가로막으며 오열했다.
“아이고, 세상에. 제 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처맞기 싫으면 비켜. 돈을 가져오든가.”
위압적으로 눈알을 부라린다고 한들, 딸의 안위 앞에서 굴복할 아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어코 이성을 잃은 노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야 이놈들아! 내가 언제 돈을 빌려달라고 했느냐! 너희들이 강제로 빌리게 해놓고 몇 배로 갚으라고 하면 무슨 수로…….”
콰직-!
무사의 발길질에 얼굴을 맞은 노인은 몸이 축 늘어졌다. 아마도 기절한 것이리라.
“모든 일에는 선이란 게 있는 법인데, 그걸 넘으면 안 되지.”
“흐윽. 아버지…….”
“입 닥치고 빨리 따라와. 좋은 기루로 넣어줄 테니까. 가서 귀염도 받고 좋잖아?”
거리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파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속닥거리며 욕지거리를 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휴. 불쌍해서 어떡해……. 아직 시집도 못 간 처자가.”
“저런 천인공노할 놈들.”
“세상에 어찌 저런 흉악한 놈들이 있어요?”
그때였다. 돌연 몰려든 인파를 비집고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좀 지나갑시다.”
태극 문양이 새겨진 도복과 등 뒤로 동여맨 장검. 영락없는 무당파의 도사들이었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그들 중 유일한 여도사가 앞쪽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쓰레기들!”
여인을 끌고 가던 천룡상회의 무사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이? 어이가 없네. 어떤 년이 뒈질…….”
뒤를 돌아본 무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파 무림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무당파의 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하필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감히 맞서도 되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무당파의 여도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겠네. 어디, 계속 얘기해봐.”
“…….”
천룡상회의 무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그 손 놓지 않으면, 손목 날아간다.”
상당히 위협적인 어조였지만, 무사들 또한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들 중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자가 말했다.
“우리 천룡상회의 회주님은 화산파의 속가제자이십니다. 저희는 단지 빚을 받아가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빚이라고? 내 눈에는 납치로 보이는데?”
무사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산파의 이름을 꺼낸다면 누구든 한발 물러서는 게 정상이다. 상대가 다른 거대 문파의 일원일지라도, 문파 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가 있는 일은 어지간하면 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독기 서린 여도사의 눈빛은 마치 작정하고 덤비려는 듯했다.
“물러서지 않으신다면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당파에 정식으로 항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도사가 말을 잘랐다.
“인신매매범들하고 타협 따윈 없어.”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검 날이 전광석화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반월을 그렸다.
무당파의 발검기술인 태극단섬(太極斷閃)이었다.
써컥-!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손목이 주인을 잃는 소리였다.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무사의 비명에, 옆에 있던 동료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저희한테 왜 이러십니까?”
그녀는 끌려가던 여인을 자신의 뒤로 잡아끌며 되물었다.
“그럼 너는 이분한테 왜 그랬는데?”
“그, 그거야…….”
무당파의 여도사는 그에게 답변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한 줄기 빛살이 땅을 차고 오르며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무당파의 도사들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아주 기본적인 초식이었다.
무사의 눈은 분명 그것을 쫓고 있었지만, 피해내기엔 너무나도 정교하고 빨랐다.
써컥-!
무엇인가가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팔 한 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비명의 메아리.
“끄하아악!!!”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지켜보던 주민들은 오히려 신나는 음악이라도 듣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어서 사선으로 솟구친 여도사의 검 끝이 파르르 떨리며 살기(殺氣)를 머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하면 되었네, 현희 사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살기가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아……. 제가 잠시 흥분했었나 봐요.”
이들의 정체는 흑산도였다. 간부들을 포함하여 가장 강한 일곱 명의 산적이 무당파의 도사들로 변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무당파의 이대제자 중 발군의 실력자였던 현희가 앞장서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 풍호가 무사들의 앞으로 다가서며 등 뒤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목도 성치 못할 것이다.”
보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천룡상회의 일원들은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주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펴졌다.
“와아아아!!”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산적들이 언제 이렇게 환호를 받아봤단 말인가.
벅차오르는 가슴과 뿌듯해지는 마음. 익숙하지 않은 이 기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흑산도의 산적들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뒤따르던 산적들이 앞 다투어 현희를 추켜세웠다.
“와. 역시 대단하십니다, 총관님.”
“현 총관님이 우리 편이라니 정말 든든해요.”
“정말 최고였어요!”
현희가 어깨를 으쓱할 찰나, 풍호가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호들갑들 떨지 마. 무당파의 도사들이 그렇게 경박할 리가 없잖아?”
자칫 발각이라도 된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은 변장이었지만, 도사들이 풍기는 특유의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산적들에게서 어찌 그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풍호가 한숨을 내쉬자, 현희가 괜찮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도사들은 사람 아닌가요? 다를 것 같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요. 자연스럽고 좋은데요 뭐.”
“그건 그렇지만…….”
풍호는 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유일하게 그녀의 앞에서만 작아지는 채주였다.
“아무튼, 너무 뭐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나저나 다음 장소는 어디죠?”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들 일곱 명은 천룡상회의 안마당이라 할 수 있는 진양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루터로 갑시다. 정보대로라면 곧 있으면 수금 올 시간이니,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좋겠지요.”
* * *
진양현의 시장 중심가.
평소 적막이 가득한 이곳이 오늘만큼은 왠지 모를 활기가 넘쳤다.
상인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으며, 곳곳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골목 어귀의 노점 찻집. 죽립을 깊게 눌러쓴 노인이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고 있던 유진산이었다.
맞은편에선 유설이 대나무에 담긴 우유를 홀짝이고 있었다.
“하배, 우유는 어디서 나와쩌?”
“응. 암소의 젖에서 나오는 게다.”
“소? 음메에~?”
“허허. 그렇게 우는 건 염소란다. 암소는 집에 가는 길에 보여주마.”
유진산은 손녀와 잡담을 나누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곧이어 어딘가를 포착했다.
거리를 순찰하고 있는 천룡상회의 무사들이었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유진산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매화가 수놓아진 흑의에 불어터진 얼굴. 며칠 전 객잔에서 혼쭐을 내줬던 천룡상회의 사군자 중 일인이었다.
그는 지금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부하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었다.
“조금 전에 야광이네 조도 당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당파가 왜 여기까지 와서 지랄을 떨고 있어?”
이들이 성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주요 활동무대가 호북성인 무당파의 도사들이 왜 이곳까지 와서 설쳐댄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고 다니는데, 아주 작정한 모양입니다.”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금전도 건네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뒷목을 잡았다.
며칠 사이 그들 때문에 입은 금전적 손실이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두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들을 모두 소집해서 묻어버리시죠.”
“누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전부 골로 가는 거야.”
무당파의 도사들이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주민들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부하로 보이는 인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
“총관님의 지령입니다! 모두 활동을 멈추고 대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주께서 직접 화산파에 도움을 요청하셨다고 합니다. 마침 이대제자 몇 분이 근처에 머물고 계셔서 중재하러 가신답니다.”
반가운 소식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우리가 화산에 상납한 돈이 얼만데, 밥값은 해줘야지.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은 양화객잔에 머무르고 있는데, 나루터로 간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또 사건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나루터까지? 지독한 놈들이로구나. 나는 그곳으로 가 볼 테니, 나머지는 모두 해산해.”
“예!”
그들의 모습을 유진산이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우리 설이, 암소 보러 갈까?”
“응!”
우선 나루터로 가봐야 했다.
유진산은 손녀를 다시 보자기에 감싸서 등에 업었다.
그의 발걸음은 천룡상회의 사군자 중 일인인 매화의 뒤를 따라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
작전에 차질이 없게 하려면 변수가 될 수 있는 요소를 미리 제거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네놈은 살려둘 수가 없겠구나.’
그는 기척을 죽인 채 매화의 뒤를 한참이나 미행했다.
그리고 매화의 발걸음이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접어들 때쯤이었다.
“이제 왈패 짓은 그만한다고 하지 않았나.”
등 뒤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노인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매화가 뒤를 바라보았다.
유진산을 마주 본 그는 마치 주화입마에 빠진 인물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등 뒤로 격공섭물을 펼치던 절대고수. 은퇴한 마두로 짐작되었던 그가 아직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 당신이 왜 이곳에…….”
“그래도 마지막 기회는 줘야겠지. 네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어서 노부에게 얘기해보아라.”
“…….”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는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고 있었다.
정적이 감도는 그때. 유진산의 어깨 위로 아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모생긴 아찌.”
유설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어라, 아가.”
“알아떠.”
그냥 보내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눈을 감는 순간, 유진산의 신형이 그를 향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온몸이 얼어붙은 상대는 마치 방어할 생각도 잊은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 유진산의 양손이 백학(白鶴)의 날갯짓처럼 그의 턱을 휘감았다.
우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