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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6화 (26/238)

26화 살풍창의 주인 (1)

가보속에서 나온 양피지의 길이는 무려 반장이나 되었다.

깨알같이 적힌 내용은 분명 무공 비급이었다.

다급히 앞부분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살풍창(殺風槍)?”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오래전 유가장을 천하제일의 창술가로 만들어준 창법을 말이다.

이 비급이 실전된 이후부터 가문은 쇠퇴기를 걸어와야만 했다.

선대의 조상들이 그토록 찾으려 했으나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던 절세무공.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격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설마 가보 속에 숨겨두었을 줄이야.’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애초부터 비급이 있었다면 가문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할 리도 없었으니까.

앞부분에는 조상이 남긴 문구가 채워져 있었다.

『나의 이름은 유정풍이다.』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조상님의 이름이 아니던가.

이백여 년 전 창귀(槍鬼)로 이름을 날렸다던 가문의 전설적인 고수였다.

유진산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깔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노부는 일평생 무림에서 종횡하며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검제(劍帝)와 도황(刀皇)뿐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무림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으리라.

생각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마지막 말이 너무도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문구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부상이 심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대단했던 고수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여러 명에게 협공이라도 당한 것인가?’

양피지에 적힌 필체에는 다급함이 묻어나와 있었다.

어서 다음 내용을 읽어봐야 했다.

『그들은 서역의 천축국에서 넘어온 대맥일천교라 하였다. 검제와 도황과 힘을 합쳐 물리치긴 하였으나, 우리 또한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전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두렵구나. 그들을 세상에 남겨 놓고 죽는 것이 두렵구나.』

그곳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천축국 또한 무림과 같은 무법세상이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있었기에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검후도 서역으로 간다고 했지.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의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안이었다.

『노부는 명상 속에서 그들과의 결투를 수천 번이나 대뇌였다.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에서야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살풍창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감시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 무공이 후대에 계승되면 오히려 가문에 화근이 닥치겠구나.』

유진산은 그의 의지에 깊이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가면서도 무공에 대한 정진을 멈추지 않았단 말인가? 대단한 무인이로구나.’

그리고 가문의 비전무공인 살풍창이 창귀라 불리던 조상님의 손에서 다시 한번 발전한 모양이었다.

다음 글귀부터는 비급과 관련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이백 년 후 가보가 부러지고, 가문에 큰 위기가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의 점괘에 따라 내 평생의 깨달음을 이 화룡신창 안에 남기니, 인연이 닿는 나의 후손이 얻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살풍창의 비급을 봉인한다. 부디 노부의 안배가 일말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노라.』

다음 내용부터는 창술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한평생 창술을 연마한 유진산이었다. 구결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창법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그는 양피지를 둘둘 말아 옆에 내려놓았다.

기쁠 만도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저무는 노을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조상님……. 가문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점괘는 맞았지만, 시기가 좀 빗나간 것 같구려. 이제 와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지 않소?”

지금 상황에서 천하제일 창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팔까지 병신이 된 상황이었다. 양손을 쓰지 못하는 이상, 창을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상님이 꼭꼭 숨겨놓은 가문의 비전을 찾았지만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잠시 알 수 없는 자책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돌연 그의 시야에 손녀의 모습이 잡혔다.

“……음?”

잠에서 깬 유설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걷는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배고파, 하배!”

소리를 빽 지르는 걸 보니 밥 먹일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그때 아이가 손에 움켜쥐고 있는 가늘고 긴 막대기가 눈에 띄었다. 대나무를 다듬어 만들어준 장난감이었다.

그 순간 유진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 어쩌면 이 비급은 우리 설이를 위한 인연일지도 모르겠구나.’

애초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던 문제였다.

선음지체라는 천하제일의 자질을 타고난 핏줄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진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오른팔로 안았다.

“허허. 그래, 어서 저녁 먹으러 가자꾸나. 할배가 고기죽 끓여 놨다.”

유진산은 손녀를 데리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는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맛있어?”

“꼬소해~.”

“허허허. 그래그래,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왼팔의 상처가 계속 아렸지만, 유진산의 웃음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일식경이 지난 후. 부엌문이 다시 힘차게 열렸다.

“어떡해~ 설이 배불뚝이 되떠.”

어느새 손바닥만 한 유설의 배가 터질 듯 빵빵해져 있었다.

한참 성장이 빠를 때라 그런지 먹성이 대단했다.

유설은 마치 소화라도 시키려는 듯 자신의 유일한 장난감을 움켜쥐었다.

춤이라도 추듯 기다란 막대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재롱을 떠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허허. 할아버지랑 같이 한번 놀아보자꾸나.”

유진산도 마당 근처에서 갈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동안 지켜본 게 있었는지 평소의 자신을 흉내 내려는 것 같았다.

물론 혼자 신이 나서 중구난방 휘두르는 움직임이었으나, 그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팟-! 파파팟-! 파파팟-!

갈대로 막대기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유진산. 그리고 그것을 피하려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유설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것은 대련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행위였다.

시간이 갈수록 유진산은 몹시 놀라고 있었다. 손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점점 움직임이 빨라지는 유설은 한 호흡에 무려 서너 번씩 막대기를 휘둘러댔다.

일류고수에 필적하는 움직임이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천천히 하거라.”

그러나 할아버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유설은 더욱 신이 나서 움직였다.

“히이~.”

파파팟-! 파파팟-!

계속해서 빨라지는 움직임은 급기야 절정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곧이어 막대기가 갈대의 움직임을 피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진산이 손녀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그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계속하다간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얀 녀석. 할배를 꼭 이겨야겠느냐?”

“재미떠~.”

유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이마의 땀을 훔치던 유진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화들짝 놀랐다. 방방 뛰던 손녀가 갑자기 메뚜기처럼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용수철처럼 치솟은 아이는 순식간에 삼 장 높이를 넘어서고 있었다.

“헙!”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아이를 따라 도약했다.

타앗-!

손만 뻗으면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그의 손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유설이 허공에서 발을 튕기며 또 한 번 날아올랐던 탓이었다.

‘제운종(梯雲縱)?’

현희에게 배운 이 기묘한 신법을 벌써 응용하다니. 놀라움이 끝이 없었다.

“히이~.”

지붕 위에 올라탄 유설은 마치 자신을 놀리듯 까르륵 웃고 있었다.

“이 녀석, 오늘 혼 좀 나야겠구나!”

위험하게 날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놀리다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면을 박찬 유진산은 지붕 위를 향해 매처럼 날아올랐다.

이번엔 반드시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을 내뻗음과 동시에 귀신같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어느새 창고 위로 옮겨타 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과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히힛.”

“어서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창고를 향해 다시 도약했다.

손녀와의 술래잡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반각이 지난 뒤 체력이 모두 소진된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죽겠구나.”

진이 빠져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더는 뒤쫓지 않자 아이가 먼발치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설이 여기떠.”

몰라서 놔두는 게 아니었다. 더는 쫓을 기력이 없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소곤거렸다.

“할배 지금 죽는다……. 앞으로 설이 혼자 잘 살아야 한다.”

손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유진산은 두 눈을 감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유설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가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무서워진 것이다.

갑자기 아이의 눈망울에 물기가 급격히 차올랐다.

아장아장 다가온 아이는 유진산의 옷깃을 잡고 눈물을 터트렸다.

“둑디 마, 하배! 흐이잉.”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눌러 참으며 죽은 척을 계속했다.

실눈을 떠서 보니 눈물범벅이 된 손녀가 서럽게 우는 모습이 보였다.

“흐아앙.”

유진산은 가만히 누운 상태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대로라면 점점 강해지는 손녀를 감당할 수가 없을 터. 위험한 장난에 재미를 붙이기 전에 다른 취미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제운종을 먼저 가르쳐 준 것은 실수였다. 가문의 비전창법을 익히도록 해야겠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유가 무공의 근본은 천지만물의 질서와 조화로 내면을 중시하는 건곤(乾坤)의 이치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정수를 담아낸 무공이 바로 유가건곤장이다.

건곤장은 상대적으로 익히기가 어렵지 않으며, 인체 내면의 정기신(精氣神)을 단련하는 것이기에 틀림없이 아이의 성장과 정서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유진산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이가 할아버지 말을 잘 듣겠다면 살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할아버지의 반응에 유설이 다리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말 잘 들을게, 둑디마! 흐이잉.”

“……정말이냐?”

“응!”

잠시 실눈을 뜨고 아이를 살펴보던 유진산은 씩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우리 설이가 이제 말썽 안 피운다니까 살아야겠구나! 그럼 이제 할배랑 다른 놀이를 해볼까?”

유설은 할아버지의 다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유진산은 손녀를 데리고 마당의 넓은 중심으로 이동해 마주 섰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한번 할아버지를 따라 해 보아라.”

양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유진산은 자세를 낮추며 양팔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그 모습은 마치 학의 날갯짓처럼 유연했으며, 기품이 넘쳐났다.

앞에서 열심히 흉내 내는 유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앙증맞았다. 팔다리가 짧아 유연함은 부족해 보였지만,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자해떠?”

“아주 잘했다! 이제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바람을 느껴보아라.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변화가 무쌍한 바람을 말이다.”

심호흡을 크게 하는 걸 보니 반 정도는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다음 동작을 개시했다.

물결이 흐르듯 그의 전신이 서서히 움직이며 천지의 조화를 그려나갔다.

무공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심신 수양을 목적으로 전수하는 건곤장이었다.

그의 양팔은 고요 속에 구름이 나아가듯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숨을 내쉬며 따라 해 보아라. 정신이 맑아질 게다.”

지시한 대로 유설이 작은 입술을 병아리처럼 모았다.

“후우~.”

손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유진산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아이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질과 유연함까지. 마치 이것을 익히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허허허!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구나!”

껄껄 웃던 유진산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초식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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