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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2화 (22/238)

22화 나와 무공을 교환하자 (2)

현희는 약속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그녀의 우상인 검후와 같은 자질을 타고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본인이 직접 키워내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오른 것이다.

그러나 두 살짜리에게 경신법을 전수하기가 어찌 쉽겠는가.

영재라 한들 이해력이 부족한 나이인 만큼 구결을 아무리 읊어줘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유설에게 유의미한 변화가 찾아왔다. 몸으로 반복적으로 보여주다 보니 스스로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 위험해!”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유설의 신형이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거기서도 모자라 허공에서 자세를 몇 번이나 바꾸는 것이 아닌가. 최종적으론 새처럼 양팔을 휘젓고 있었다.

당연히 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희는 급강하하는 유설을 받기 위해 우왕좌왕하며 난리가 났다.

쿠웅-!

아이를 가까스로 받아낸 그녀는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꺅! 잘했어, 설아!”

유설도 웃는 걸 보니 자기가 칭찬받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자해떠? 히이~”

“정말 대단해. 우리 설이 나중에 유명해지면 언니 잊으면 안 돼. 알았지?”

현희의 마음은 이미 무림 지존을 키워낸 스승이 되어 있었다.

아직은 어설픈 수준이었지만, 숙련도가 높아지면 허공에서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안정적인 낙하가 가능할 터였다.

그때 뒤에서 유진산이 뒷짐을 지고 다가왔다.

“허허. 두 살배기 아이에게 경신법을 가르치다니, 정말이지 재능이 엄청나구만.”

어느새 현희의 어깨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제가 원래 뭐든 한번 시작하면 꽤 잘하거든요. 근데 뭔가 이상해요.”

“무엇이 말인가?”

“무당파의 제운종과는 좀 달라요. 움직임이 좀 더 바람 같다고나 할까…….”

유진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나는 자네가 의도한 것인 줄 알았네.”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무슨 재주로 무공에 변화를 줄 수가 있겠어요?”

그것은 유설이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변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지금으로선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뭐 나쁠 것은 없겠지. 어디 가서 무당파의 무공을 훔쳐 배웠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테니.”

“네,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럼 이제부턴 뭘 가르쳐 줄까요?”

유진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이제 계약은 끝나지 않았는가. 이제 더는 찾아오지 않아도 돼.”

손녀에게 제운종을 전수해준 대가로 현희에게 유가건곤장을 알려준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제 더는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쉽다는 듯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아이에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다른 것도 알려주고 싶어요.”

“나는 이제 자네와 교환할 무공이 없네. 창술을 배우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고, 그 외에 다른 유가장의 무공은 무당파의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니.”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가끔이라도 찾아와서 설이를 보고 싶어서요. 허락해주세요, 할아버지.”

유진산은 잠시 고민해보았다.

그녀가 아이를 돌봐주는 만큼 내공 수련에 전념할 시간을 벌게 된다. 그것은 곧 환골탈태에 이르는 시기를 앞당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총관으로서 산채 일도 바쁠 텐데.”

“괜찮아요. 요즘엔 별일도 없는걸요?”

유진산은 그녀의 어깨너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하지만 산채에 있는 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군.”

점점 크게 느껴지는 인기척. 현희가 고개를 돌려보자 거적때기를 걸친 산적 둘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당도하자마자 유진산을 향해 허리부터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들은 유진산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현희에게 포권했다.

“총관님, 지금 즉시 산채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비호채 녀석들이 기어코 우리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산적 패거리로, 흑산도와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이었다.

그들은 상당히 호전적이고 수법이 잔인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때 순박한 모습을 하고 있던 현희의 얼굴이 차갑게 돌변했다.

“몇 명이나?”

“열 명쯤 됩니다. 부채주님이 애들 몇 명과 함께 먼저 출발했어요.”

현희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어이가 없네. 산채로 갈 필요 없으니까, 당장 그곳으로 안내해.”

“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유진산은 묵묵히 아이를 건네받고는 가보라고 눈짓을 했다.

“할아버지, 나중에 또 올게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것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조신했던 무당파의 도사가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다니.’

현희는 흑산도를 통틀어 채주 다음가는 실력자였다. 게다가 휘하의 산적들도 무당파의 검법을 배우고 있었기에 세력 싸움에서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기고 지고는 유진산과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바닥에 내려놓은 손녀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걸었다.

“우린 밥이나 먹자꾸나.”

“설이 밥 시더.”

다른 건 몰라도 밥이란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있었다.

“사실 오늘 우리 점심은 아압탕이다. 오리고기로 만든 탕이지.”

“꼬기?”

진지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냐.”

“히히.”

고기를 먹는다는 말에 배시시 웃는 모습이 더는 순수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마냥 흐뭇하게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큰일이로다. 쪼그만 게 벌써 고기 맛을 알았으니, 앞으로 등골이 휘겠구나.’

그때 유설이 걷다 말고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배, 저거 뭐야?”

구름 아래로 참새 두 마리가 나란히 날아가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기도 저렇게 날고 싶은 모양이었다.

“참새들이구나. 저렇게 서로 의지할 친구가 있다면 더욱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법이지. 우리처럼 말이다.”

이번엔 유설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하배, 이거는 뭐야?”

“이건 지렁이구나. 더러우니까 만지지 말거라.”

“지렁이 아야해. 개미 친구들이 냠냠하고 이떠.”

유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일일이 답해주는 것이 다소 곤욕스러울 법도 했건만, 그에게는 즐겁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를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굉장히 영특하여 한 번 알려준 단어는 까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엌에 들어온 유진산은 아압탕이 담긴 솥단지 아래의 아궁이를 살펴보았다.

“이런, 아궁이에 불이 꺼졌구나. 부싯돌을 가져올 테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거라.”

“응!”

유진산은 손녀를 부엌에 내버려 둔 채 잠시 밖으로 나왔다.

“부싯돌을 어디에 놔뒀더라.”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농기구 따위를 모아놓은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급한 대로 여분을 꺼내쓰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도구를 챙겨 부엌으로 돌아온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손녀 어디 갔어? 설아!”

그사이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기척으로 감지했을 테지만, 손녀가 반박귀진을 이룬 뒤로는 바로 뒤에 있어도 알아채는 것이 어려웠다.

“…….”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유진산은 국자를 아압탕에 담그며 소리쳤다.

“안 나오면 할배 혼자 고기 다 먹는다!”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설이 참새 되떠.”

부엌 천장이었다. 유진산은 그곳에서 박쥐처럼 매달려 있는 손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할아버지 놀라게 하면 못써. 어서 내려오너라!”

유설은 재미있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뛰어내렸다. 아직 낙하가 자유롭지 못했지만, 떨어져도 자신이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히이~”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차마 야단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밥상 앞에서는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유가장의 규칙이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보자꾸나.”

아궁이 앞에서 쪼그려 앉은 그는 목화솜에 부싯돌을 비벼댔다.

치잇-! 치잇-!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쉽사리 불이 붙지 않았다. 어제 비가 와서 목화솜이 눅눅한 탓이었다.

그 와중에 번갯불이 튕겨 오르는 것이 재밌어 보였는지 유설이 반응을 보였다.

“설이도 해볼래.”

어차피 소용이 없을 테지만, 밑져야 본전이 아니겠는가. 유진산은 아이가 떼를 쓰기 전에 부싯돌을 넘겨주었다.

비벼대는 모습이 나름 그럴싸했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하는 모습을 몇 번 지켜보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유진산도 해내지 못한 것을 아이가 어찌한단 말인가. 번갯불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대로 되지 않자 점차 유설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심술이 난 것이리라.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란다. 다시 내놓거라.”

“시더!”

반드시 불을 붙여야겠다는 의지가 눈빛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 참. 애비를 닮아서 고집이 대단하구나.’

유설은 죽은 막내아들의 늦둥이였다.

손녀의 모습이 아들과 겹쳐 보이자 유진산의 표정이 점차 서글프게 변해갔다.

그가 잠시 회상에 젖어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화르르-!

갑자기 목화솜이 세차게 타올랐다. 결코, 부싯돌의 힘이 아니었다.

화들짝 놀란 유진산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삼, 삼매진화? 어떻게 했어?”

삼매진화(三昧眞火). 내기(內氣)를 이용하여 불길을 만들어내는 재주로, 막대한 내공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화경을 이룬 절대고수의 기준에서는 삼매진화 따위 잔기술 축에도 못 끼지만, 놀라운 것은 손녀가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는 것이다.

“자해떠?”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아이의 머리부터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주었다.

‘이거, 하늘이 우리 가문에 무신의 씨앗을 내려주었구나.’

우선 배부터 채우고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아궁이에 불이 붙은 지 일각이 지나자 미리 끓여놓은 탕이 따듯하게 데워졌다.

좁은 부엌에 마주하고 쪼그려 앉은 둘은 본격적으로 아압탕을 먹을 준비를 마쳤다.

“아압탕은 국물이 최고지. 맛이 괜찮을 거다.”

국자를 푸기 무섭게 유설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국물이 뜨거웠지만, 혀를 델 리는 없었다. 용암에도 견딜 수 있는 화경의 신체가 아니던가.

그러나 유진산의 눈에는 한없이 여린 손녀일 뿐이었다.

바람을 몇 번 불어 입에 넣어주니 통통한 볼살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마이떠. 귀가 막혀.”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오리고기를 집어 들었다.

“허허. 귀가 아니라 기(氣)가 막히는 게다. 이제 고기도 한번 먹어 보아라.”

손녀가 오물오물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둘은 모처럼 마주 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즐겼다. 그렇게 일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르신!”

말투로 보아 흑산도의 산적 중 하나인 듯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몹시 다급해 보였다.

“들어오너라.”

낯익은 산적 한 명이 부엌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며 숨을 헐떡였다. 조금 전 현희와 함께 떠났던 일행 중 한 명이었다.

“도,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어찌 된 일인지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호채 녀석들한테 당했나? 산적들 싸움에는 관심 없어.”

“아닙니다. 비호채 녀석들도 이곳으로 도망 온 것입니다.”

인근에 있는 다른 세력의 산적들이 이곳으로 도망을 왔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산에서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로부터?”

“무당파의 도사 한 명이…… 산을 휘젓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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